199화
교(敎)의 비밀을 담고 있는 곳.
야투를 힘으로 점거한 이래로, 투기장은 교의 차지가 되었다.
대규모 인원을 파견할 필요도 없었다.
사지환 자신과 교에서도 손꼽히는 무력을 지닌 투주만으로도 야투를 빼앗는 건 식은 죽 먹기였으니까.
야투를 운영해온 진짜 투주와 수뇌부를 은밀히 살해하고, 수족들을 채워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투기장은 간단히 자신들의 손에 들어왔다.
호남의 중심지인 장사에 교의 전진 기지를 세운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곳은 ‘그분’께서 원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였고, 잃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신이시여.’
가짜 신 따위가 아닌 진신(眞神).
자신은 보았다.
교리에 의해 인신(人神)으로 떠받들어지는 가짜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증거를 지닌 진짜 신을!
그분께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자신은 그분을 위해 살아가리라 맹세했고, 교를 떠나 머나먼 장사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데 최근 교를 나와 중원을 떠돌며 신의 수족을 잘라내는 불신자가 있었다.
아니, ‘그’는 애초에 신을 공경하지 않았으니 불신자라고 하는 건 맞지 않다.
신의 존재를 알면서도 스스로 신이 되려 하는 자.
제 아비의 뒤를 이어 인신이 되기를 꿈꾸는 자였다.
중원에서 암약하는 그와 그의 세력을 포착한 이후, 투주와 자신은 준비해 왔다.
그는 분명히 야투를 찾을 것이며, 그날을 그의 생애 마지막 날로 만들기 위해서.
투기장을 그의 무덤으로 삼을 준비 말이다.
‘여기서 전부 드러낼 필요는 없지. 그래서도 안 된다. 저 녀석들이 위협을 느끼고 바깥으로 도망칠 정도로만.’
사지환이 손을 들자 요란스럽게 돌아가던 기계음이 멈췄다.
「‘그’를 잡기 위한 본 기관을 노출해선 안 된다! 간단한 장치만 발동하여 놈들을 바깥으로 내쫓는다. 야전단이 포진을 완료한 북쪽 출구만 열어놓도록.」
마음만 먹으면 저들을 이곳에서 척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투주의 선언으로 경기가 시작되었고, 앞날을 위해서라도 야투의 힘으로 저들을 꺾는 장면을 연출할 필요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기관을 발동하는 수하들에게 전음을 보낸 사지환이 입을 열었다.
“하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야투가 준비한 깜짝 무대를 보여드리죠!”
사지환이 손가락을 튕기자 여덟 개의 출구 중 일곱 개가 닫혔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투기장에 이런 기관 장치들이 있었다는 데 놀란 관객이 웅성거렸다.
사지환은 그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말 그대로 깜짝 무대일 뿐이니까요. 여러분께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더 화려한 경기를 위해 장소를 옮겨 보죠.”
딱!
사지환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의 뒤에서 무언가가 쏘아졌다.
어느새 돌로 된 객석의 곳곳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강철로 된 화살이 별비와 여규를 향해 튀어나왔다.
퀴아아악―!
하나하나 쳐내는 건 어렵지 않으나 기관에 의해 연발로 쏘아지는 철전(鐵箭)은 위협적이었다.
별비는 여규의 앞을 막아선 채 사지환에게서 떨어져 투기장으로 내려섰다.
“이건 또 뭐야? 투기장에 이런 장치들이 있었다고? 내가 야투에 출전한 게 몇 년짼데…….”
오늘은 경악의 연속이다.
강제로 야투를 점거한 후, 투주가 ‘그’를 잡기 위해 거금을 쏟아부어 설치한 기관을 외부인이 알 방도는 없었다.
철중구가 떡 하니 입을 벌릴 때, 그에게도 예외 없이 철전이 날아들었다.
퀴아아악―!
“이런 시벌!”
힘으로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마른 비와 여규, 별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걸까?
관객이 없는 투기장에는 거리낌 없이 화살을 쏟아부을 수 있었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화살이 철중구의 목숨을 노렸다.
땅을 구르다가 체력의 한계에 부딪힌 철중구가 암담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갑자기 억울해진 철중구가 눈을 부릅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이게 무슨 난리인지,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정도는 알고 죽었으면 좋겠다.
영문도 모르고 목이 떨어졌을 장 씨 할배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투주를 향해 소리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이게 뭔 짓거리냐! 넌 내가 지옥에서 부활해서라도 모가지를…!”
“그게 유언이야?”
쩌저저정!
강풍에 휘말린 듯 쓸려나가는 철제 화살들.
폭풍 같은 신위를 선보이던 청년이 투기장 아래로 내려섰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마른 비를 보고 철중구가 중얼거렸다.
“와, 이 새끼…! 졸라 멋있네. 까딱하면 내가 반하겠는데?”
“당신, 그 욕 좀 안 하면 안 돼?”
어느새 합류한 여규도 철중구의 뒤를 막아섰다.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게 된 철중구는 민망한지 구시렁댔다.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요래 겹겹이 호위를……. 니들은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너무 허약해서 그냥 놔두면 죽을 거 같아서?”
여규의 대답에 눈이 뒤집힌 철중구가 고함을 치려는 찰나, 마른 비가 선수를 쳤다.
“나가자. 이대로는 끝이 없어. 그리고 여기, 느낌이 안 좋아. 이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아.”
발밑에서 꿈틀대는 불길한 기운.
무언가 계기만 있으면 엄청난 게 터져 나올 것 같다.
목숨 걸고 섬멸전을 펼칠 것도 아닌데 굳이 여기서 버틸 이유가 없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철전을 쳐내며, 마른 비가 외쳤다.
“가자!”
“어? 어, 어~? 우아악!”
마른 비와 여규가 앞서고, 별비가 철중구의 옷깃을 물고 뒤를 따랐다.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 길을 뚫는 삼인 일수.
일렁이는 횃불의 빛을 받으며 치솟는 그들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저기! 출구 하나가 열려 있다!”
별비에게 목 뒤의 옷깃을 물린 채 허공에서 덜렁대는 철중구가 용케도 길을 찾았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누가 봐도 그건 미심쩍은 길이었다.
마른 비와 여규가 뭐라 말하려 할 때, 저 아래에서 딱! 소리가 울렸다.
“……?”
고개를 돌린 마른 비는 보았다.
사지환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그의 눈길을 따라간 곳엔 자신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가을 수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편으로 다가드는 검은 그림자도.
“제길! 규야, 먼저 가!”
급선회한 마른 비가 가을 수리에게 뛰었다.
위험을 눈치챈 가을 수리가 뒤를 돌아볼 때, 그림자가 엄습했다.
“……!”
검이 날고, 피가 튄다.
가까스로 허리를 꺾어서 급소를 피한 가을 수리가 반격을 감행했다.
“2년간 날 감시한 게 네놈이었나!”
패애애액!
올빼미 사냥.
가을 수리가 펼친 건 그믐의 비기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연기의 분배가 어딘가 엉성하다.
이십여 년 전, 그가 성년식을 떠나기 전에 그믐이 전수했던 기예는 완성형에 이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가면…!’
원의 첩보대가 아닌 야투의 인물.
그를 감시했던 자의 소속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휘익―
습격자는 목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가을 수리의 반격을 간단히 피했다.
그리고 검을 들어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상체를 뒤로 젖힌 가을 수리는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허나 그는 절망하는 대신 눈을 빛냈다.
“걸렸구나…! 다색아!”
“슈륵!”
가을 수리의 오른편.
객석의 돌이 움직였다.
자신의 몸을 암석에 동화시킨 채 잠복해 있던 반려수가 날아올랐다.
육중한 도마뱀이 발톱을 그었으나 습격자는 그마저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가을 수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무공.
습격자의 가면에 새겨진 흰 뱀의 크기는 사지환의 그것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다.
‘빌어먹을! 대비를 했는데도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드는 검날을 응시하는 가을 수리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분타주……. 그대의 곁을 끝까지 지키지 못해 미안하오. 부디 무운을.’
그가 죽음을 각오했을 때, 돌풍이 당도했다.
“타아앗!”
전력으로 질주하며 뻗어낸 날짐승 떨구기가 습격자의 안면을 가격한다.
너무나 강렬한 일격에 습격자의 머리가 통째로 터져 나갔다.
내리긋던 검이 가을 수리의 상반신에 박혔으나 다행히도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고, 고맙구나.”
어떻게 벌써 그 거리를 주파했단 말인가!
가을 수리는 오늘 마른 비의 싸움을 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와족 역사상 최강의 전사가 될 거라고 칭송받던 너른 하늘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일 정도였다.
‘과연 형님의 아들…!’
마른 비가 이토록 강한 줄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을 거다.
아니, 그러면 마른 비가 조직의 일에 엮일 수 있으니 안 됐으려나.
가을 수리가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놀라움을 다스릴 때, 마른 비가 그를 잡아당겼다.
“가요! 이야기는 나중에! 우선 여기를 벗어나요!”
이제 규와 별비를 따라잡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가?
관객을 피해 교묘하게 퍼붓는 강철 화살을 쳐내며 하나뿐인 출구에 다가간 일행을 마른 비가 바라봤다.
찌이잉―!
‘어?’
뭐냐, 이건!
감각을 건드리는 위험 신호?
오랜만에 울리는 야생의 경고음이다.
마른 비는 출구에 가까워진 여규에게 다급히 외쳤다.
“규야! 멈춰! 나가지 마!”
급제동을 건 여규가 의문을 담은 눈으로 마른 비를 돌아봤다.
‘뭐지? 저 밖에 뭐가 있는 거야?’
분명히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건 목숨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마른 비는 언제나 위험에서 자신을 구했던 감각을 믿었고, 굳게 닫힌 일곱 개의 출구들을 둘러봤다.
‘……언제 저런 게?’
정신없이 움직일 때였나?
돌문이 닫힌 줄만 알았는데 출구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푸른 광택을 띠는 두꺼운 철판이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을 통째로 가로막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특별한 금속인 그것은 쉽게 뚫긴 어려워 보였다.
‘대체 뭘 준비한 거야?’
밖이 위험하다?
그럼 여기 머물면?
여기서 투주라는 자를 사로잡고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농성을 하면 어떨까?
관객들도 있으니 놈들도 섣부른 짓은….
찌이잉―!
‘흡!’
그러다가, 마른 비는 보았다.
객석에 움푹 파인 내빈석, 그 끝에 서 있는 투주라는 사내를.
가면 안에서 도사리는 화염을 담은 눈빛을.
‘저, 저 사람…!’
강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저 범상치 않은 존재라고만 여겼는데 이 정도였다고?
그가 힘을 숨기면 자신의 감각으로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강하다는 말이 아닌가.
가면 사이로 보이는 눈엔 갈등이 서려 있었고, 직접 손을 쓸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그가 움직이게 되면 관객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전부 죽일 거라는 두려움이 일었다.
「나가라.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면.」
투주가 마른 비 일행을 내쫓기 위해 일부러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었지만, 마른 비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초조함이 가중될 뿐.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나가야 해!’
직접 전음을 받고 나니 확신이 든다.
바깥에 무엇이 있든 저자보다는 덜 위험할 거라는 확신이!
‘그래. 나가주마. 하지만…!’
너희의 뜻대로 움직이진 않으리라.
마음을 굳힌 마른 비가 외쳤다.
“별비야!”
이름을 부르는 순간, 고스란히 전달되는 의지다.
혼으로 이어진 영수는 그의 뜻을 받았고, 별비는 물고 있던 철중구를 여규에게 짐짝처럼 던졌다.
“어, 어? 왜 던져…?! 아악! 소중히 다뤄 줘! 아프단 말이다!”
별비는 쏜살같이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마른 비는 그만의 비기를 준비했다.
우르르릉―!
“저, 저…!”
“이럴 수가! 뭐냐! 저게!”
지하 투기장에서 하늘의 창이 푸른빛을 내뿜는다.
경악한 관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마른 비가 투주에게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복잡하게 사네. 당신, 대체 뭘 숨기는 거야?”
“…….”
설마 투주와 싸우려는 건가?
관객은 물론이고 야투의 무인들마저 바짝 긴장했다.
마른 비는 투주가 가면 속에서 눈살을 좁히는 걸 확인하고 작게 웃었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