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꽈르르릉―!
뢰창이 마른 비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그 표적은 투주나 출구 쪽이 아니었다.
투사들이 경기를 벌이는 장소.
지저에서 불길한 기운이 꿈틀대는 투기장이었다.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동요하지 않을 것만 같던 투주가 깜짝 놀라며 달려 나왔다.
하지만 뢰창은 이미 투기장의 바닥에 깊숙이 꽂혔고, 뇌전의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몸부림쳤다.
자연기로 모방한 천공의 포효.
지면에 꽂힌 뢰창은 이차적으로 강렬한 음파까지 쏟아내며 투기장을 뒤흔들었다.
기긱― 기기기긱― 퍼어엉!
정교한 기계장치로 구동되는 기관이 비명을 질렀다.
마른 비의 추측이 맞았다.
투기장 바닥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었고, 처음으로 걸린 건 화살을 쏟아내던 장치의 모태가 되는 기관이었다.
거기에 전기적 성질을 띠는 뢰창이 꽂히자 어딘가가 망가진 게 틀림없었다.
‘저게 다가 아닐 텐데?’
하지만 마른 비가 진짜로 노린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무엇이었다.
“끼… 끼아아악!”
그때,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렸다.
지저에서 올라오는 울음은 모골이 송연해질 섬뜩함을 담고 있었다.
“뭐, 뭐야, 이 소리는?!”
“윽! 귀가…!”
“소름 끼쳐…….”
“저 아래에 뭐가 있는 거야?”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관객이 인상을 찡그리며 주저앉았다.
땅속에는 무언가가 있었고, 뢰창이 뿜어낸 굉음에 노출되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절대 인간이나 짐승 따위가 아니었다.
“야투……. 여기 야투 맞지? 내가 꿈꾸는 거 아니지?”
“우리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거 맞아?”
관객들은 급격히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투기장이지만, 여긴 더 이상 그들이 아는 공간이 아니었다.
집보다도 잘 안다고 생각한 장소에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
익숙했던 만큼 낯설어진 괴리감은 그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주었다.
“가, 갈래…! 돈이고 뭐고 난 집에 가겠어!”
“뭐야? 언제 문이 닫힌 거야? 저 철판은 뭐고? 투주! 문을 열어줘! 난 나갈 거야!”
“저 새끼, 우리를 선동해놓고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다시 보기 힘든 난투에 취해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린 관객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출구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겨우 한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으로 수백 명이 몰리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뒤쪽에 정체된 관객들은 손에 든 걸 집어던지고 욕설을 뱉으며 투주를 재촉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방금 뭐지?”
우습게도 지금 이 순간, 가장 놀란 건 일을 벌인 마른 비였다.
땅 밑에서 불길한 무언가를 감지했고, 전력을 다한 뢰창을 내리꽂았다.
투주의 꿍꿍이를 방해하고, 그의 주의를 돌릴 심산이었다.
그 직후에 들린 끔찍한 비명.
거기에 실려 있는 기운은 마른 비가 어디서도 느껴본 적 없는 기괴한 것이었다.
‘뭐였지? 어떻게 저런 기운이 존재할 수가…!’
생명체의 울부짖음?
아니다. 생명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다.
죽었지만, 동시에 살아 있는 모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무언가가 땅 밑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끼아아아악!”
“윽…!”
마른 비가 귀곡성 같은 소리에 소스라칠 때, 짐승이 그르렁대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이… 마라(魔羅)의 존재를 어떻게 알고…!”
가면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
절대 건드려선 안 될 무언가를 건드린 걸까?
시종일관 차분하던 투주가 끓어 넘치듯 분노했다.
푸화하학―!
이글이글 타오르는 공기.
인내심이 끊어져 실체를 드러낸 투주는 인간 같지 않은 기운을 내뿜었다.
투기장 전체가 그의 존재감에 짓눌리는 듯하다.
그의 힘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던 마른 비의 눈빛이 흔들릴 정도니, 여규나 철중구, 가을 수리가 기절할 듯이 놀란 건 당연했다.
“크… 르르…….”
별비마저 털을 곤두세우며 위축된 기색을 내비쳤다.
“투, 투주님!”
안 된다.
여기서 투주의 존재가 드러나면 그간 준비해온 모든 게 허사가 된다.
투주와 마라는 교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그’를 잡기 위한 비장의 한 수가 아니었던가.
사지환이 당황하며 투주를 말리려 했지만, 그는 이미 결심을 굳힌 후였다.
「야전단은 들어라.」
웅혼하게 퍼지는 전음이 투기장을 흔들었다.
본색을 드러낸 투주는 무엇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거침이 없었다.
「마라가 드러난 이상 온건한 대응은 무의미하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입막음을 할 터이니 오늘의 일을 깨끗이 지운다.」
투주가 북쪽 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벽에 가로막힌 북쪽 장원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응답했다.
「야전단주, 투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잠시 시간차를 두고, 같은 음성이 명을 내렸다.
「한 놈도 살려 보내선 안 된다. 모조리 죽여라.」
명이 떨어지자마자 끔찍한 비명이 출구를 타고 넘어왔다.
“아아아악!”
“커헉…!”
“사, 살려…!”
보지 않아도 보인다.
도살.
출구 너머 장원에선 먼저 빠져나간 자들이 도륙을 당하고 있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비, 비켜!”
“아악! 크아…!”
나가도 죽고, 안 나가도 죽는다.
하지만 안에 있으면 바로 죽지는 않으니 그들의 선택은 뻔했다.
사색이 된 관객들이 도로 투기장으로 밀려 들어왔다.
“투, 투주! 이러고도 당신이 무사할 것 같아?”
“우릴 다 죽이겠다고? 수백 명을? 제정신이냐?!”
“가족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 야투에 왔다가 이 많은 인원이 증발했는데?”
관객들의 협박에도 투주는 웃었다.
“아둔한 것들. 이 중에 원의 황자라도 있나? 기껏해야 지부대인의 사촌 되는 자가 하나 있더군. 그 외엔 전부 다 한족과 소수부족, 또는 색목인뿐이다. 네놈들, 야투가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투주는 목에 칼이 박힌 채 숨진 차우와 처거를 가리켰다.
“그 개눈깔로는 저들이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겠지. 우리에겐 첩보대의 전멸을 무마할 인맥과 힘이 있다. 내일이면 철중구와 그의 일행이 원의 첩보대를 몰살시켰다는 소문이 쫙 퍼질 거야. 카안의 자식이 죽는 정도의 일이 아니면 누구도 야투를 건드릴 수 없다.”
투주는 비릿하게 웃으며 새하얗게 질린 관객들을 둘러봤다.
“네놈들의 가족이 가만있겠냐고? 큭큭, 웃기는군. 황실의 비호와 거액의 보상금이면 잡음은 싹 사라질 거다. 기둥뿌리를 흔들던 도박 중독자가 사라지고 거금을 손에 쥐면 너희를 신경이나 쓸 것 같으냐? 오히려 좋아하겠지. ‘가족들을 고생시키던 인간 망종이 그래도 마지막엔 좋은 일 하나 하고 갔구나.’ 하고.”
관객들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에 말을 잃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다는 저 말투.
투주는 진심으로 여기 있는 모두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들이 기댈 건 한 곳뿐이었다.
“주, 중구! 살려다오!”
“난 항상 너에게 걸었다! 네가 야투에 등장한 순간부터 너를 응원했어! 네 친구들을 움직여서 길을 뚫어줘!”
“그, 그래! 이제 믿을 건 너희 넷밖에 없다! 우리가 가진 돈을 모두 주겠어! 제발 투주 저 미친놈을 죽여 다오!”
수백 쌍의 눈이 마른 비 일행에게 모였다.
영웅에서 역적으로, 죽여 없애야 할 대상에서 하나뿐인 구원자로.
자신들의 입장과 입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대우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들의 비루하고도 추잡한 근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여규는 기가 막힌 듯 혀를 찼고, 철중구는 욕설을 뱉었다.
“하? 언제는 잡아 죽이라며? 이 녀석들 덕분에 집에 가게 됐는데도 그따위로 대하더니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염치도 없는 시벌 새끼들이…! 양심이 있으면 그냥 뒈져! 아니면 스스로 살길을 구하던가! 뭐 이런 빌어 처먹을 인간쓰레기들이 다 있어?!”
바깥에선 여전히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투주는 내빈석에서 내려와 투기장을 가로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철중구의 일갈에 관객들이 움찔할 때, 잠자코 있던 마른 비가 움직였다.
“별비야.”
속성을 띤 자연기는 연달아 사용하기 힘들다.
순수한 대자연의 기운을 특정 속성으로 변환하려면 배에 가까운 힘이 들기 때문이다.
뢰창을 사용할 수 없는데, 당장 그에 준하는 파괴력이 필요하다.
마른 비는 별비에 이어 여규까지 불렀다.
“휴우. 이럴 줄 알았어. 비아, 넌 참 속도 좋다. 어디로 할 거야?”
“남쪽. 우리가 먼저 갈게.”
“……? 뭐야? 뭔데? 너네, 뭘 하려고?”
혼자만 알아듣지 못한 철중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나머지 셋은 일시에 움직였다.
별비가 훌쩍 뛰어오르고, 마른 비의 신형이 횡으로 기동한다.
무수히 손을 맞춘 합격기.
둘이 교차하는 순간, 눈부신 십자포화가 빛을 토했다.
번쩍!
“어림없는 짓을. 그 정도로 뚫릴 거라면….”
투주가 여유로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다섯 겹을 덧댄 한철(寒鐵).
전설 속의 만년한철(萬年寒鐵) 같은 강도는 아니지만, 숙련자의 강기(罡氣)도 버텨내는 단단함을 지녔다.
상당한 힘이지만, 저 정도로는 두어 번을 더 두드려야 철판을 깰 수 있으리라.
“하앗!”
하지만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여규의 일점 찌르기가 더해졌을 때, 십자포화의 교차점에 일자형 검기가 가세했을 때, 투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콰카카카캉!
귀청을 찢는 충돌음과 함께 남쪽 출구를 막은 철판이 단번에 터져 나갔다.
가을 수리가 철중구를 챙겨서 합류하고, 마른 비는 멍하니 서 있는 관객들에게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들, 꼴도 보기 싫지만 기회는 주겠어. 길은 뚫어놨으니 살아남는 건 알아서 해. 여태껏 타인의 싸움을 구경만 했으니 한 번쯤은 스스로 생존싸움에 뛰어들어 보라고.”
투주까지 막아주길 바랬던 걸까?
남쪽 출구를 열어주었음에도 관객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마른 비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고, 일행과 함께 그대로 출구를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게 보고 있던 관객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죽을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또 한번 아비규환의 장이 펼쳐졌다.
“남쪽으로 가면 살 거라 여기는 건가. 포위진이 북쪽에 설치된 건 맞지만, 야전단이 장원을 에워싸고 있는 건 변함이 없거늘.”
투주가 사지환을 힐끗 쳐다봤다.
그 의도를 파악한 사지환이 투기장 내에 잔존해 있던 소수의 병력을 움직였다.
그들은 서로 나가겠다고 싸우는 관객들을 뒤에서부터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비켜라. 쓰레기 같은 것들.”
투주가 손을 휘젓자 남쪽 출구 주변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쾌적해진 출구를 나서며, 투주는 선언했다.
“아무리 기를 써도 너희는 장원의 절반도 못 가고 내게 따라잡힐 것이다.”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먼 하늘에서 어둠을 물리치는 일출이 기지개를 켠다.
하지만 장원을 둘러싼 숲은 아직까지 새카맸고,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저씨! 이 사람을 부탁해요!”
빠른 이동을 위해 철중구를 둘러맸던 마른 비가 그를 다시 가을 수리에게 집어 던졌다.
숲으로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비수들이 비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아아악―! 아파, 이 새끼야! 날 소중히 다뤄달란 말이다!”
곧 죽어도 입은 물 위에 동동 뜰 위인이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으니 배짱 하난 좋다고 해야 할까?
여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때, 뒤쪽에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쏟아졌다.
“투주다! 쫓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