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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01화 (201/463)

201화

* * *

휘오오오―

야투의 장원이 작은 점으로 내려다보이는 언덕.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 소란……. 무언가 이변이 일어났군요.”

그의 옆에는 검은 장포를 휘날리는 남자가 서 있었다.

훤칠한 키와 탄탄한 육체.

흔들림 없이 곧은 자세는 흑색의 철탑을 연상케 했다.

밝아오는 동녘을 올려다본 사내가 장원으로 눈길을 내리며 답했다.

“그렇구려. 반신반의했거늘. 그대의 말이 맞았소. 금일 야투에서 무언가가 벌어질 거라더니 정말 그렇군.”

묵직한 음성이다.

사내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도, 그 목소리에서 불굴의 의지와 군림자의 위엄을 느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강렬한 눈빛을 확인하며, 이변을 이야기했던 사내가 말했다.

“저 역시 이렇게 시끄러워질 줄은 몰랐습니다. 간신히 꼬리를 잡은 원의 군사들이 야투에 집결하고, 사호의 한 명인 악교익이 장원에 드는 걸 포착했을 뿐이죠. 절대 잃을 수 없는 분이 지령을 무시하고 야투를 향하는 바람에 다급히 찾아뵌 것입니다.”

검은 장포의 사내가 옆을 흘깃 바라봤다.

어젯밤, 이자가 불쑥 자신을 찾아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누구도 자신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했다.

자신의 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고, 그 세력은 규모를 짐작하기가 힘들 정도였으니까.

그에게 포착되는 순간, 죽음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항상 살얼음판을 걷듯 신중히 행동했는데 자신의 위치를 잡아낸 자가 있었을 줄이야.

당장 목을 따야 한다는 수하들을 제지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자를 따라왔다.

항상 철저한 검토 끝에 움직인다는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동이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 자신을 움직였다.

이자를 믿어야 하고, 지금 당장 따라나서야 한다는 본능적인 이끌림.

그리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대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을 움직이게 만든 사내가 별빛 같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수많은 사람을 접했지만, 단연코 이런 독특한 인물은 본 적이 없다.

무공? 잘 모르겠다.

싸우면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싸워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싸우기 싫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누구도 겁내지 않고, 모든 적을 거꾸러뜨려 온 사내에게 그건 대단히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대의 청을 받아들이겠소.”

결단은 빠를수록 좋다.

밤이 물러가고 새벽이 번지는 시각.

바늘 하나 통과하기 힘들 정도로 철통같던 장원의 경계에 틈이 보인 건 처음이다.

시기도, 상황도 최적이다.

무조건 움직여야 할 때였다.

“준비하라.”

검은 옷의 사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 *

“하압!”

콰아앙―!

급제동을 걸며 내리찍은 진각에 흙더미가 솟아올랐다.

역, 뿌리내리기.

수직으로 뽑아 올린 자연기의 벽에 막힌 비수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숲에 매복한 적들은 혹독한 훈련을 거친 자들이었다.

비수의 궤도 하나까지 철저히 계산된 공격은 마른 비 일행의 발길을 늦췄고,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강자들이 튀어나오며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여규가 앞에서 날아드는 비수를 쳐내는 동안 마른 비와 별비는 위로 날아올랐다.

“별비야! 질러!”

질러? 뭘 지르란 말인가?

가을 수리에게 업힌 철중구가 의아해할 때, 숲 상부까지 뛰어오른 별비가 울부짖었다.

“크허허헝!”

자연기를 꾹꾹 눌러 담은 야생의 포효다.

숲을 쩌렁 울리는 맹수의 위압에 매복자들이 움츠러들었다.

마른 비가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인위적인 기운이 꿈틀댄 지점들.

번갯불이 거리를 지우고, 극속의 권각이 숨어 있는 적들을 쳐부순다.

매복자들 중 개인의 힘으로 마른 비를 당해낼 자는 존재하지 않았고, 위치가 발각된 이상 남은 건 몰살뿐이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촤라라라락!

“엇?!”

상하좌우를 포함해 열여섯 방위에서 날아든 무언가가 마른 비를 휘감았다.

그의 몸에 감긴 건 은은한 푸른색을 띠는 사슬이었다.

번갯불의 기동을 잡아낸 것도 놀라운데 이런 정밀함이라니!

주위를 둘러본 마른 비가 상황을 짐작했다.

‘이놈들, 아군을 미끼 삼았구나!’

그 짧은 사이에 번갯불의 이동 거리를 눈치채고 함정을 팠다.

번갯불로 습격 가능한 거리에 한 명을 놔두고 나머진 뒤로 몸을 물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자를 노린 순간, 일제히 준비한 걸 집어던진 것이다.

‘싸움에 능숙한 자들이야!’

어지간한 훈련과 경험으론 실전에서 이 정도의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 없다.

야전단이란 자들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집단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설마… 저거 살쇄(殺鎖)인가?!”

쇠사슬의 정체를 알아본 철중구가 소리쳤다.

사슬 하나하나를 날카롭게 갈아낸 그것은 구속 도구이자 인간분쇄기나 다름없었다.

특별한 존재를 잡기 위함인지 한철로 특수 제작한 사슬이 밝아오는 새벽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그그그극―

야전단이 사슬을 힘주어 당기자 칼날들이 마른 비의 몸을 긁으며 불쾌한 소음을 흘렸다.

귀한 한철을 쏟아부은 보람이 있는지 교룡갑을 발동한 마른 비의 피부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다.

사슬을 다루는 자들의 내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큰 부상을 입었으리라.

하지만 마른 비에게는 아직 여력이 있었고, 온몸이 사슬에 칭칭 감긴 그가 육신에 자연기를 흘려 넣었다.

“후읍!”

범의 앙심.

자연기를 공급받은 육체가 팽창한다.

강화된 육신이 극한의 힘을 발휘하니 이십 명에 가까운 야전단이 마른 비 쪽으로 덜컥 끌렸다.

“……!”

가면 뒤로 보이는 눈동자들에 경악이 깃든다.

하지만 놀라기엔 한참이나 일렀다.

“으아아아아!”

마른 비가 사지를 풍차처럼 휘돌리자 사슬을 붙잡은 야전단 무인들이 한꺼번에 허공을 날았다.

살쇄의 칼날로부터 손을 보호하고, 당기는 힘을 더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손잡이.

그곳에 팔을 고정시켰던 그들은 사슬을 놓지도 못했다.

“흡!”

마른 비가 사지를 한 방향으로 모으자 사슬에 매달린 이십여 명의 사내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꽈아앙!

“컥…!”

“크학!”

“별비야!”

비명이 터지고, 으깨진 살점이 비산한다.

그들이 충격에서 헤어나기도 전에 사신의 발톱이 엄습했다.

“크허헝!”

퍼어어어억!

크게 휘두른 앞발.

막대한 자연기가 깃든 발톱이 그어지자 이십여 명의 육체가 통째로 찢겼다.

새하얀 맹수가 인간으로 이루어진 공을 터뜨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철중구는 기가 질려 버렸다.

“시벌… 존나 살벌하네. 절대 개기지 말아야지. 저 범이랑은 눈싸움도 안 할 거야…….”

철중구가 중얼거릴 때, 정면에서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대단하군. 진형을 갖춘 야전단을 이토록 애먹일 줄이야……. 어디서 튀어나온 놈들이냐.”

사내의 가면에는 어김없이 백사 한 마리가 양각되어 있었고, 그 크기는 투주를 제외하면 누구보다 컸다.

지금까지 싸운 경험으로 볼 때 뱀의 크기가 클수록 지위가 높고, 강한 자임이 틀림없었다.

별비가 여규보다 강하다고 판단했던 사지환보다도 윗줄에 있는 자였다.

“내가 야전단주다. 그 나이에 이런 얼토당토않은 무력이라니. 게다가 평생 가도 보기 힘든 영수까지. 이름이 뭐냐.”

야전단주의 눈길은 마른 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양측을 대표하는 자들이 마주치자 자연스레 시선이 둘에게 모였다.

마른 비가 몸에 걸린 사슬을 끌어내리며 대꾸했다.

“마른 비.”

“마… 뭐? 뭔 이름이 그따구야? 한어로 된 이름 없냐?”

그제야 마른 비의 이름을 알게 된 철중구가 끼어들었다.

달아오르는 분위기를 깬 그를 모두가 돌아봤다.

“뭐! 뭐 이 시발. 왜 그렇게 보는데? 나는 말하면 안 되냐?”

여러모로 재미있는 남자다.

곧 넘어갈 듯 휘청이면서도 도전적인 눈빛으로 야전단주를 노려본다.

마른 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건우. 한어로 하면 건우라는 뜻이야.”

“건우? 뭔 이름이 그래? 그냥 마 뭐시기라고 부르는 게 낫겠네.”

친절하게 알려줘도 지랄이다.

마른 비는 그게 또 재미있는지 킥킥댔다.

한순간에 증발해버린 긴장감에 야전단주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 철중구가 또 한번 선수를 쳤다.

“마 뭐시기야? 지금 여기서 저딴 놈이랑 노가리 깔 때가 아닌 거 같은데? 투주 새끼가 쫓아오고 있지 않냐?”

노가리 깐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체할 때가 아닌 건 확실하다.

마른 비가 뒤를 돌아볼 때, 졸지에 ‘저딴 놈’이 되어버린 야전단주가 눈을 치떴다.

“철중구……. 악교익 따위를 상대하며 만신창이가 된 약골이 주둥이만 살았구나. 약자는 강자들의 대화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는 것도 모르는가?”

“약고올…?! 이 시벌 놈이 내가 다치니까 이때다 싶지? 얼굴도 못 까는 병신이 어디서 허세야? 너 그거 못생겨서 가린 거지?”

대체 어떻게 하면 가면을 쓴 게 그렇게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말을 섞을수록 늪으로 빠지는 것 같은 느낌에 야전단주는 철중구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리고 말을 쏟아내던 철중구는 여규를 곁눈질했다.

‘됐냐?’

‘잘했어. 충분해.’

싸움에 이골이 난 이들이 쓸데없이 말을 늘일 리 없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장 위협이 되는 투주가 투기장을 나온 이후 기세를 죽인 채 천천히 따라오고 있다.

야전단도 위험하지만 투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그들의 교묘한 암격 때문에 흩어진 일행이 진형을 갖출 시간이 필요했다.

철중구는 눈치 빠르게 끼어들어 시간을 끌었고, 마른 비 옆으로 돌아온 별비가 여규와 함께 그의 좌우를 받쳤다.

이제 일점 돌파를 시도할 때였다.

하지만 싸움에 도가 튼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제법 머리를 굴렸다만 안타깝게 됐군.”

야전단주의 웃음.

그건 목적을 이룬 자의 만족스런 미소였다.

“시간이 필요한 건 너희만이 아니었거든.”

후우욱―

오가는 공기가 갑작스레 차단되는 느낌.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사방을 에워싸는 감각이었다.

그 자체로 위협적이진 않지만, 불길한 느낌이 든다.

야전단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마른 비 일행에게 말했다.

“투주님의 기파가 새어나가면 곤란한 건 우리 쪽이거든. 소리와 기를 차단하는 방벽이다. 여기가 바로 너희가 묻힐 자리지.”

“이런…! 비아야, 당장 움직여야 해!”

촤라라라랑―!

야전단주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챈 여규가 소리쳤으나, 한발 늦었다.

푸른 사슬이 마른 비 일행이 서 있는 곳 주변의 나무를 두르며 넓게 둘러쳐졌다.

땅에서부터 나무 위까지 빼곡히 에두른 살쇄를 보며 철중구가 혀를 찼다.

“염병……. 한철로 만든 사슬을 얼마나 갖고 있는 거야? 야투로 돈 오지게 벌었구만. 썩을 놈들.”

후아아악―

폭발적으로 커지는 살기.

음파와 기파를 차단하는 막 내부로 들어선 투주가 급격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한 번도 곤란한 표정을 지은 적 없는 마른 비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억울해하지 마라. 이 포진은 애초에 ‘그’를 잡기 위해 설계된 것. 투주께서 가세하지 않으셔도 너희만으로 장원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사방을 가로막은 살쇄 너머로 야투 무인들의 기척이 감지됐다.

하나둘 모여든 기운은 어느덧 백을 훌쩍 넘겼고, 엄밀한 포위진을 형성했다.

철중구의 몸이 정상이란 가정하에 가을 수리까지 힘을 합쳐야 겨우 승산을 점쳐볼 수 있는 상황.

여기에 투주까지 합세하면 빠져나갈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당했네.”

마른 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들은 포기를 모르는 자들이었다.

살아나가는 게 불가능할지라도 끝까지 저항하리라.

마른 비가 주먹을 움켜쥐고, 여규는 검을 고쳐 잡았다.

별비가 자세를 낮추며 발톱을 드러냈다.

상대적으로 무력이 떨어지는 가을 수리와 부상자인 철중구도 싸울 태세를 갖췄다.

“투주께서 몸소 나오셨지만, 그분을 귀찮게 할 순 없다. 우리 선에서 정리한다. 전원….”

휘이이익―!

야전단주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기 직전, 날카로운 장소성(長嘯聲)이 숲을 가로질렀다.

“커헉…!”

“아악!”

“뭐, 뭐냐…!”

밝아오는 장원의 숲.

때아닌 검은 질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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