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마른 비가 투기장에 진입하며 감지한 것처럼, 야전단은 항상 외부의 침입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물샐틈없이 유지되던 방비가 내부의 소동을 진압하기 위해 돌아섰다.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진형이 흐트러졌고, 비장의 한 수나 다름없는 살쇄가 마른 비 일행을 저지하기 위해 쓰였다.
철옹성 같은 방벽에 그어진 한 줄기 균열.
사내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라! 진형의 틈을 헤집은 후 좌우로 펼쳐서 놈들을 섬멸한다!”
쩌렁 터져 나온 호령.
검은 복면을 쓰고 흑색 장포를 휘날리는 사내는 하늘이 내린 신장(神將)과 같았다.
양손에서 뿜어진 묵색 강기가 야전단을 가차 없이 휩쓸었고, 발도와 함께 쏘아진 도강(刀罡)이 포위망의 후방을 짓이겼다.
그는 야전단의 우측으로 파고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권마(拳魔)! 좌측을 부탁하오!”
“걱정 마십시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쓸어버릴 터이니!”
사내와 마찬가지로 흑색의 복면을 쓰고 장포를 걸친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와 다른 게 있다면 무공이었다.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장대한 체구의 노인은 일반인의 두 배는 될 법한 주먹으로 적들을 격살했다.
노인이 주먹을 뻗을 때마다 기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야전단이 쓸려나갔다.
압도적인 무공, 산이라도 무너뜨릴 기세였다.
“하필 지금…! 헉! 자, 장로님! 용서를…!”
야전단이 제대로 진형을 갖춘 상태였다면 이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검은 옷을 걸친 자들은 야전단이 등을 돌린 사이에 치고 들어왔고, 뒤를 잡힌 상태로는 승산이 없었다.
가면을 쓴 무인이 벌벌 떨며 노인에게 목숨을 애걸했다.
“용서? 그게 교를 등진 배신자가 할 소리냐! 헛소리하지 마라! 너희에게 줄 건 죽음뿐이니라!”
노인이 주먹을 휘둘러 무릎 꿇은 야전단원의 얼굴을 부쉈다.
그리고 풀썩 엎어지는 무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서둘러라! 적들이 진형을 갖추기 전에 쓸어버려야 한다!”
“무슨 일이지?”
사슬로 둘러싸인 경계 너머에서 커다란 소란이 일었다.
시야가 제한되지만, 기감으로 알 수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야전단을 습격한 게 틀림없었다.
“누구지? 누가 야전단을 공격한 거야?”
마른 비가 궁금해할 때, 여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경련하는 눈꼬리와 긴장을 머금은 입매.
여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패도적이고 강렬한 기운…! 마치 시커먼 무저갱을 보는 것 같은 두려움이……. 이런 느낌을 주는 집단은 세상천지에 하나밖에 없어!”
여규가 일행을 돌아보며 외쳤다.
“마교(魔敎)…! 틀림없어, 비아야! 야전단을 공격한 건 마교야!”
“마교?! 신강 끝자락에 사는 놈들이 호남에 어떻게? 아니, 왔다고 쳐도 그놈들이 야투에 왜 와?”
“음…….”
철중구는 경악했고, 가을 수리는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마른 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교? 그게 뭔데?”
“천마신교(天魔神敎)다. 본교를 그따위로 부르지 말도록.”
후방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여규의 표현을 정정했다.
화들짝 놀란 마른 비 일행이 반전하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어느새 사슬의 경계를 넘은 투주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네놈들…… 아니지, 기관과 마라를 건드린 건 한 놈이었지. 네가 집어던진 창 때문에 숨겼어야 할 것들이 전부 드러나 버렸다. 오랫동안 준비한 것들이 전부 어그러졌단 말이다!”
투주는 마른 비를 노려보며 분노를 드러냈다.
‘일주일. 일주일 후면 그분께서 맡기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사이에 ‘그자’는 분명 기다리지 못하고 쳐들어왔으리라.
지금처럼 빈틈을 노리는 게 아니라, 불리한 걸 알면서도 철저히 준비된 함정으로 기어들어 올 수밖에 없었을 거다.
‘임무를 달성하는 건 물론이고 그분의 심려를 덜어 드릴 절호의 기회였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야만인 꼬마가 계획을 전부 망쳐버렸다.
투주는 마른 비를 용서할 수 없었다.
뒤를 잡힌 이상 외곽에 포진한 야전단은 무슨 수를 써도 살릴 수 없다.
그들이 목숨으로 시간을 버는 사이, 이놈들을 빠르게 죽이고 투기장으로 복귀한다.
기관이 제대로 작동할지 모르겠지만, 마라가 있는 투기장을 전장으로 삼는 게 그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단주. 나와 함께 이놈들을 쳐 죽이고 투기장으로 이동한다.”
“존명.”
결정을 내린 투주가 내공을 끌어올릴 때, 사슬로 만든 남쪽 담장이 터져 나갔다.
쩌저정!
산산조각 나서 비산하는 사슬들.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살쇄들 사이로 흑색 장포의 사내가 걸어왔다.
“아니? 어떻게 벌써…!”
투주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검은 철탑 같은 사내가 단단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며 말했다.
“벌써라니? 아직도 내가 물렁하게 보이는가? 당신이 기억하는 시절의 내가 아니오.”
검은 복면 위로 곡선이 그어졌다.
“오랜만이오. 드디어 만났구려. 환마(幻魔).”
“소교주(小敎主)…!”
투주의 행세를 하며 모종의 임무를 수행 중이던 남자.
마교 칠대 장로의 일인, 환마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소교주에 대한 마른 비의 첫인상은 ‘놀라움’, 그 하나로 압축할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가.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에게선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헤쳐 온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굴강함이 흘러나왔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은 가늠할 수 없는 무의 경지를 대변했고, 흔들림 없이 꼿꼿한 자세는 그의 성정을 드러내는 듯했다.
단일 무력 단체로는 천하 최강의 자리를 한 번도 내준 적 없는 천마신교.
모두가 두려워하는 집단의 차기 주인 될 자가 등장하자 모두가 숨을 멈췄다.
“……!”
하지만 놀란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소교주 역시 티는 내지 않지만 감탄을 삼키고 있었다.
야투를 뒤흔든 장본인들.
그에게 환마를 칠 기회를 만들어준 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려 할 때였다.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내는 짐승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끌었다.
새하얀 털을 지닌 대호는 흥미로움과 호기심, 경계심이 뒤섞인 눈을 하고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인간처럼 뚜렷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놀란 건 백호 때문이 아니었다.
영수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껏 본 영수들 중 단연 압도적이라고 해도 전투 중에 주의를 빼앗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눈을 커다랗게 뜬 청년.
변방의 소수부족으로 보이는 사내가 소교주의 이목을 강제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자는…!’
밝아오는 새벽빛이 청년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빛나고 있었다.
우연찮게 겹친 배경 따위가 아니라 그가 지닌 독특한 느낌과 걸출한 존재감이 소교주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뭐라 딱 집어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
어젯밤 그에게 찾아온 사내와 비슷하면서도 판이한 느낌이었다.
‘이토록 독보적인 존재감을 지닌 자들을 하룻밤 새 둘이나 만나다니…!’
피와 전투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과분한 이들과 연을 맺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들을 만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극히 드물게 마주쳤던 그들은 적이 되거나 지금은 만나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 짧은 시간차를 두고 마주친 둘에게선 강렬한 운명의 끈이 느껴졌다.
소교주는 어느새 눈빛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과 말없이 감정을 교환했다.
그러다가 전투 중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선… 감사를 전하오. 그 인원으로 야투를 흔들어놓다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군. 덕분에 쉽게 침투할 수 있었소. 시작은 그대들이 했지만, 여긴 본교의 배신자들이 머무는 곳. 뒤는 우리에게 맡겨주시오. 이곳이 우리의 전장임을 이해해주었으면 하오.”
정중한 요청이자 권유다.
함정에 빠져 꼼짝없이 목숨을 잃을 뻔한 마른 비 일행이 도리어 고맙다고 절을 해도 모자랄 텐데.
소교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마른 비가 답했다.
“무슨 소릴.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꽤 위험한 상황이었거든.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거기까지 말한 마른 비가 환마를 돌아봤다.
“저 사람, 이거저거 준비한 게 많던데. 쉽지 않을 거야. 도와줄까?”
환마와 야전단으로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이었다.
소교주와 권마가 이끄는 타격대만으로도 벅찬데 마른 비 일행이 합류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소교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했듯이 이건 우리의 싸움이오. 오랜만에 만난, 마음에 드는 이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군. 그리고 손발을 맞춰보지 않은 합공은 서로에게 방해가 될 수 있소.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지.”
마른 비 역시 소교주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곳은 저자의 천명이 꿈틀대는 공간이며,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은 끝이 났다는걸.
“알았어. 그럼 우린 가볼게. 무사하길 바라.”
마른 비는 적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등을 돌렸다.
환마는 이를 뿌드득 갈았지만, 소교주를 앞에 두고 마른 비에게 달려들 배짱은 없었다.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린 소교주가 멀어지는 마른 비에게 물었다.
“천진운. 내 이름이오. 그대의 이름도 알고 싶소만.”
“마른 비. 발음하기 어려우면 그냥 건우라고 불러.”
슬쩍 고개를 돌린 마른 비가 환하게 웃었다.
장원의 남쪽 출구로 향하는 길은 살풍경했다.
횃불이 타오르며 긴장감과 기대감을 불어넣었을 화강암 길 위로 가면을 쓴 자들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인체가 박살 나고 찌부러져 내장을 드러낸 모습.
비위가 약한 자라면 몇 번이고 구토를 했을 광경이었다.
“허……. 난장판이구만?”
별비에게 물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서 이동 중인 철중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게. 마교의 타격대가 휩쓸고 지나간 길인가 봐.”
여규는 속이 좋지 않은지 가슴을 두드렸다.
그가 마른 비를 보며 말했다.
“생각할수록 놀랍네. 환마면 마교 칠대 장로 중 한 명이야. 그런 엄청난 인물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의 비명도 그렇고……. 마교가 뭘 꾸미는 걸까? 그리고 아까 그 남자, 평생 잊지 못할 존재감이었어. 소교주라고 했지? 그럼 천마(天魔)의 후계자라는 말인데……. 그 둘이 왜 싸우는 걸까?”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여규는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반면 철중구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말했다.
“지들끼리 내분이 일어났나 보지 뭐. 우리 덕분에 쉽게 환마를 치게 된 거고. 마교 소교주씩이나 돼서 치졸하게 간이나 보다가 들어왔다, 이거 아냐? 영 별로구만. 역시 패군 같은 남자가 없어.”
“패군? 당신, 패군을 직접 봤어?”
여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철중구는 자부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봤지! 그분은 야투의 제왕이자 장사의 영웅이었다고! 어릴 때 잠시 스친 게 전부지만, 절대 잊지 못한다. 그 당당함과 압도적인 힘이라니! 그분은 사나이 그 자체다, 이 말이야!”
‘패군도 장사 출신이었구나.’
침까지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걸 보니 철중구에게 패군은 우상 내지는 선망의 대상쯤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정도맹주인 천검을 우러러보는 것처럼, 사파의 인물이 사도련주인 패군을 숭앙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그 말을 뱉은 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칠 것 같은 철중구라서 어색한 걸지도.
“그보다 마 뭐시기야. 소교주랑 둘이 왜 그렇게 뜨거운 눈빛을 한 거냐? 너네, 첫눈에 반했냐?”
“큭큭. 마른 비가 어려우면 건우나 비아라고 불러. 그냥 저절로 쳐다보게 되던데? 보는 순간 깜짝 놀랐거든. 진짜 굉장하단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그 사람, 왠지 다시 보게 될 것 같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출구가 보였다.
마른 비는 소교주와 환마가 격돌하고 있을 투기장 쪽을 흘깃 돌아보다가 멈췄다.
새벽빛이 드리운 장원의 출구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야투의 문지기.
허리가 굽은 사내가 마른 비 일행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