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으엉? 저 형씨, 도망 안 갔네?”
문지기 사내를 본 철중구가 중얼댔다.
그는 움직일 기력이 없는 건지, 지금의 상태가 편한 건지 별비에게 내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게슴츠레한 눈을 끔뻑이는 게 곧 졸도할 것처럼 보이는데 용케 기절하지 않는다.
철중구를 가만히 살피던 별비가 그를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아야! 거 야박하기는! 이왕 운반하는 거 좀 끝까지…!”
“그르르르…….”
떠들 힘이 있으면 두 발로 걸어라.
분명 그런 뜻이리라.
별비가 이빨을 드러내자 철중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뭐, 내 말은 그러니까…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거지.”
별비가 적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봐서일까?
환마나 소교주를 보면서도 쫄지 않은 철중구가 희한하게 별비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한다.
뭐라 꿍얼대던 그가 벌떡 일어섰다.
‘연기였네.’
‘연기였어.’
‘연기였구먼.’
힘줄이 끊긴 팔과 검에 베인 부상을 제외하면 철중구는 많이 회복된 것 같았다.
피를 철철 흘렸는데도 그새 기운을 차린 걸 보면 마른 비처럼 회복력 하나는 타고난 모양이었다.
그는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더니 갑자기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 문지기 사내에게 휘적휘적 걸어갔다.
“형씨. 용케 살아 있네? 시커먼 애들이 가만 놔뒀어?”
철중구의 의문은 그럴 만했다.
문지기 사내의 주변엔 그와 함께 장원의 입구를 지키던 청년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으니까.
피로 뒤덮인 문간에 홀로 서 있는 꼽추 사내는 상당한 위화감을 자아냈다.
일개 문지기가 이 난리 속에서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한다?
게다가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몰살했는데도 홀로 살아남아 자신들을 기다렸다고?
철중구가 떠올릴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기다렸다……. 우리를? 왜? 투주, 아니 환마 새끼가 우릴 놓쳤으니 마무리하라 그랬냐?”
꼽추 사내는 오랫동안 야투의 문지기를 맡아왔다.
휴가라도 다녀온 건지, 아니면 아팠던 건지 가끔 장시간 자리를 비울 때가 있었지만, 야투를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원이 가까워질 때 그를 먼저 떠올린다.
철중구가 그를 환마의 수하라고 의심하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런……. 중구, 자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잠깐 멈추고 내 이야기를….”
“중구 님, 중구 님 하더니 바로 말 놓는 거 보소? 응. 안 들어. 일단 드러눕고 말씀하세요.”
거침없이 걸어온 철중구가 오른발을 내질렀다.
장귀삼과 거두도를 격침시킨 그 발차기였다.
놀랍게도 문지기 사내는 그들도 받아내지 못했던 일격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이거 봐. 내 이럴 줄 알았지. 투기장 문이나 지키는 인간이 이걸 피한다고? 몸도 불편하면서? 똑바로 불어! 너, 뭐 하는 새끼야?!”
철중구는 방심하지 않았다.
발차기가 빗나간 순간, 지체 없이 도를 뽑았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휘둘렀다.
“허! 이거 참……. 성급하구만, 중구.”
문지기 사내는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움직임은 전혀 곤란하지 않았으니, 한 걸음을 슬쩍 옮기는 것만으로 철중구의 도를 흘렸다.
“이걸 피한다고?!”
철중구의 몸이 정상이 아니지만, 그는 사호의 하나를 쓰러뜨린 남자다.
그의 도가 허공을 그었을 때, 모두가 놀랐다.
가을 수리만이 놀라지 않고 철중구를 말렸다.
“그만! 그만하게! 그는 적이 아니야!”
하지만 철중구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악교익과 싸운 이래로 그는 짐짝 취급받으며 모두의 보호를 받았다.
몸이 회복되자 부끄러워졌고, 장 씨 영감을 죽인 자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런 상황에서 문지기 하나를 쓰러뜨리지 못하자 오기가 치밀었다.
적이 아니라고?
그래? 난 대단히 의심스러운데?
사정이야 어떻든 일단 눕히고 보련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카아압!”
그가 고집을 피우며 도를 휘둘렀을 때, 문지기 사내가 혀를 찼다.
“심정을 이해는 하네만, 무모하군. 한숨 자고 일어나시게.”
쩌정! 뻐억!
오른 주먹으론 도의 옆면을.
왼 주먹으론 복부를.
공방일체의 권격이다.
문지기 사내가 뻗어낸 반격에 철중구가 허물어졌다.
겨우 회복한 그는 이번엔 완전히 뻗어버렸다.
“후우… 중상을 입었는데 이 정도라니. 몸이 정상이었으면 내가 위험했겠군.”
문지기 사내가 팔뚝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몸이 불편한 만큼 그는 운신이 어려워 보였다.
여규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방금 그 움직임…! 어떻게 이런 고수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거지?”
처음 봤을 때부터 분위기가 남달랐지만 무를 수련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한데 움직임을 보니 상당한 강자다.
자신이 감지하지 못할 만큼 강한 게 아니라 기운을 숨기는 데 능숙한 쪽이지만.
여규가 탄성을 흘릴 때, 가을 수리가 문지기 사내에게 다가섰다.
“강 형!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원의 첩보대는 그렇다 쳐도 마교라니?”
“단 형!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오! 마교가 등장했을 때는 나도 깜짝 놀랐소. 야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분타주께서 단 형을 염려하여 손을 쓴 듯하오. 나만 놔두고 전부 쓸어버리더군.”
“분타주께서요? 마교가 엮인 건 어찌 알고? 그새 무언가를 포착한 건가? 아니, 그렇다 쳐도 그들을 움직였다고요? 저 안에 들어간 사람, 마교의 소교주라던데?”
“뭐라고요? 소교주?!”
문지기 사내도 거기까지는 몰랐는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와 가을 수리는 협력 관계지만, 서로 다른 조직인 듯했다.
원의 첩보대와 야투의 세력, 갑자기 들이친 마교까지.
그들의 조직까지 치면 대체 몇 개의 세력이 얽혀 있는 것인가.
마른 비는 말할 것도 없고, 여규마저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가면을 쓴 자들……. 우리가 임의로 지칭했던 ‘백사회(白蛇會)’가 마교의 배신자들이었던 것 같소. 투주의 정체는 환마라는 마교의 장로였고요. 투기장에 기관장치와 마라라는 괴물을 숨겨 뒀더군요. 지금 저 안에서 소교주가 이끄는 마교의 타격대와 백사회가 싸우고 있소이다.”
“키아아아아악―!”
그때였다.
괴생물의 포효가 장원을 뒤흔들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소름을 유발하는 그것은 인간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진 공포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흠칫 몸을 떤 문지기 사내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저런 게 야투에 있었다니! 마교라… 일이 점점 커지는구려. 이렇게 된 이상 바로 몸을 빼야 할 것 같소. 원의 첩보대가 왔다는 건 우리의 존재를 황실이 눈치챘다는 뜻일 테니까요.”
“아, 그건 투주의 계략이었소. 눈치로 보건대 그들을 끌어들여 내부에 숨어든 첩자들을 일소할 심산이었던 것 같소. 실제로 그렇게 됐고.”
야투에 침투시킨 양측의 공작원들이 일거에 쓸려나갔다.
그들의 희생을 떠올리고 입술을 깨물었던 문지기 사내가 눈빛을 빛냈다.
“때가 무르익었소. 안 그래도 슬슬 떠나려던 참이었지. 마지막에 이런 일이 생겨 안타깝지만… 그간 섭외한 자들로 충분하오. 그분께선 분타주와 단 형의 협력을 절대 잊지 않으실 것이오.”
“거사에 보탬이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부디 초심을 잃지 마시길. 무운을 빌겠소.”
정보 교환을 끝낸 가을 수리가 마른 비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에는 폐가에서 보여주었던 피폐함과는 다른 활력이 담겨 있었다.
“비아야, 미리 사정을 말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감시의 눈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단다. 너를 야투에 출전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른 비는 또렷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한 내부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야투를 눈여겨 봐왔다. 그리고 이용해왔지. 돌아가는 정황으로 보건대 일주일 안에 큰일이 터질 거라 짐작했단다. 그 안에 널 장사에서 빼낼 생각이었지.”
거기까지 말한 가을 수리는 문지기 사내에게 눈길을 돌렸다.
“강 형. 미리 전했던 대로 비아를 부탁하오. 마교는 물론이고 원의 첩보대까지 얽힌 상황에서 비아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건 그 길뿐이군요.”
“걱정 마시오. 그러기 위해 기다렸던 거니까. 단 형은 정말 가지 않아도 되겠소? 원한다면 분타주와 측근들까지 모두 모실 수 있소.”
“아니오. 우리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소. 이대로 갈 순 없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마른 비가 입을 열었다.
“야투에 들어간 후에… 아저씨를 오해했어요. 처음의 느낌이 맞았네요. 뭔지는 몰라도,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 거죠?”
그 말에, 가을 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평생의 꿈을 뒤로 미룰 만큼 중요한 일이지. 부족을 나온 후, 난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단다. 나중에 아버지를 만나면 그리 전해주면 좋겠구나. 당신의 아들은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노라고.”
자부심 어린 말이다.
또한 그 안에는 이십 년간 꾹꾹 눌러온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심정을 어렴풋이 짐작한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다만, 직접 전하세요. 할아범이 아저씨를 진심으로 그리워한다는 걸 잊지 마시고요.”
가을 수리의 눈이 커졌다.
부족을 나설 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아버지다.
자신의 꿈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폄하했던 분이다.
지금껏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 거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세월은, 그리고 부자간의 연은 절대 녹일 수 없으리라 여겼던 완고함마저 풀어낸 모양이었다.
격동에 차서 눈을 꾹 감은 그를 두고, 마른 비가 여규에게 눈짓했다.
“이 사람, 믿어도 될 것 같아. 따라가자.”
마교 세력 간의 충돌과 그에게 원한을 품은 환마.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를 원의 군사들까지.
이대로 장사에 머무는 건 위험한 일이다.
가을 수리가 자신의 신변을 부탁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터.
문지기 사내에게서 전해지는 느낌은 좋았다.
마른 비는 그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중구, 저 친구도 여기 남는 건 위험하네.”
문지기 사내가 턱짓을 했고, 가을 수리가 말을 덧붙였다.
“맞다. 그가 가장 위험해. 허융에게 뒤집어씌웠지만, 애초에 저 친구를 노린 건 투주였어. 우리가 파악한 게 맞다면 투주가 악교익을 불러들인 거다.”
“투주가요? 왜죠? 철중구는 야투의 최고 인기 투사잖아요? 야투의 흥행 측면에서 그를 버리는 건….”
여규는 질문을 하다말고 입을 벌린 채 멈췄다.
바보 같은 질문이었단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 싸움꾼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타협하지 않는 중구를 쳐내고, 승부조작 및 배당금 분배에 적극적인 자를 간판으로 세우면 훨씬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지. 그리고 이건 추측이지만, 투주는 장사의 상권까지도 넘본 것 같다. 그랬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 또한 중구지. 이 친구 때문에 장사의 뒷골목에서 상납과 보호비가 사라졌으니까.”
“……지저분하군요.”
여규의 말은 철중구가 얽힌 상황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를 지켜본 결과, 여규는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장사를 떠나려고 할까요? 성격도 그렇고, 생활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가을 수리는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그가 돌보는 사람들은 우리가 파악하고 있다. 뒤는 걱정하지 말라고 해. 그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가 빈자리를 메우마.”
마른 비와 여규가 영문도 모르고 갑작스럽게 휘말린 데 반해, 가을 수리와 문지기 사내는 많은 걸 예측하고, 준비한 모양이었다.
대화가 끝났으니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마른 비가 턱으로 철중구를 가리켰다.
“별비야, 물어.”
“크앙?”
이러다가 이 인간의 전담 운반자가 되는 거 아닐까?
별비가 투덜대며 기절한 철중구를 물어 올렸다.
마른 비가 문지기 사내에게 말했다.
“가자, 아저씨. 어디로 가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