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 * *
“많이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장원에서 멀리 떨어진 전각의 삼 층.
창가에 선 사내가 찬찬히 설명을 시작했다.
“은밀히 중원을 떠도는 마교의 타격대. 그들의 존재를 알아챈 곳은 드뭅니다. 기껏해야 본문과 개방이 전부겠죠. 그들의 위치까지 잡아낸 곳은 없어요. 아마 총단에서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가을 수리는 의자에 앉아 사내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른 비 일행이 떠난 후, 마중 나온 요원들 덕분에 그는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며칠 전, 장사 외곽에서 무서운 기운을 내뿜는 자들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흘려듣지 않은 덕분에 소교주를 발견할 수 있었죠. 마기를 숨기기 힘든 게 그들의 유일한 약점. 단서가 있는 이상 장사에서 우리의 이목을 피할 순 없었습니다.”
조용히 듣던 가을 수리가 사내에게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그렇군요. 한데 마교의 타격대를 찾았더라도 그들이 야투와 연관이 있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본문과 개방은 중원을 떠도는 타격대의 위치를 찾지 못했지만, 그들이 쓸고 간 곳을 뒤졌습니다. 그리고 공통점을 발견했지요.”
“공통점? 그게 무엇입니까?”
사내는 잠시 입술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인간의 시체가 겹겹이 쌓인 곳에 근거지를 마련한 세력. 하나같이 정체가 불분명한 조직들이지만, 타격대가 공격한 집단은 전부 그런 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건… 야투와 같군요!”
가을 수리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네. 장원의 숲에는 셀 수 없는 인간의 시체가 묻혀 있죠. 마교의 타격대가 장사에 들어왔다는 걸 안 순간, 야투를 떠올리는 건 쉬웠습니다. 그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저는 그들이 움직이도록 부추겼을 뿐입니다.”
거기까지 들은 가을 수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만약 경계에 틈이 생기지 않았다면요? 비아가 투기장을 헤집어 놓지 않았으면 야전단은 등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소교주가 해코지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다시는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가을 수리가 항의하듯 외쳤다.
충심? 의리? 아니면 우애?
어느 하나로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확실한 건 가을 수리가 사내를 무척이나 염려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마음을 읽은 사내가 뜨겁게 웃었다.
“내 사람 하나 챙기지 못하는 자가 어찌 대의를 논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울컥한 가을 수리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분타주님. 형님의 아들이 위험에 처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사내는 웃으며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침 해가 비추는 도시.
그는 어지러이 얽힌 장사의 골목 어딘가를 바라봤다.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마른 비 일행이 멀어지고 있었다.
은밀한 기동이지만, 이동로를 확보한 게 자신이었기에 사내는 그들의 모습이 잡힐 듯이 보였다.
가을 수리가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분타주님을 두고 갈 순 없죠. 비아는 무사할 겁니다. 형님의 아들이라 그런지 정말 엄청나더군요.”
“아까부터 말씀하시는 형님이…? 아, 가끔 언급하셨던 그분인가 보군요.”
“네. 족장에 취임하셨답니다. 형님이 어릴 때의 모습 그대로 성장했다면, 적어도 십좌에 필적할 겁니다. 정말 대단한 분이셨지요.”
어릴 때 떠나온 이후,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살아온 부족의 일.
마른 비에게 대략적으로 듣긴 했지만, 가을 수리는 알 수 없었다.
너른 하늘과 와족의 힘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를.
“그렇군요. 아드님만 봐도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이 갑니다. 마른 비라고 했나요? 그 인원으로 야투를 흔들어 놓다니. 신성이 등장했군요.”
자신의 아들이 칭찬을 받은 것처럼 뿌듯해하는 가을 수리에게, 사내가 말했다.
“감시 때문에 고생하시는 동안, 부탁하셨던 분도 구해왔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어떻던가요? 그녀는?”
“힘든 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크더군요. 얼마 전부터 겨우 입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하오문 장사지부 분타주.
백강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추측하신 대로 그녀는 와족의 일원이었습니다. 겨울 달. 그녀의 이름이죠.”
* * *
이게 숨겨왔던 그의 본모습일까?
문지기 사내는 신속하고 단호했으며, 엄격했다.
“타라.”
이의를 허용치 않을 듯한 말투에는 사람을 위에서 부려본 경험이 녹아 있었다.
적어도 여규가 느끼기엔 그랬다.
하지만 여규는 준비된 마차에 타기 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잠깐! 잠깐만요! 급한 건 알겠는데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왜?”
사내의 물음에 여규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곱게 접은 서신이었다.
“제가 직접 방문할 계획이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이걸 여기 쓰인 장소로 전해주셨으면 해요. 꼭 부탁드립니다.”
사내는 말없이 서신을 받았고, 대기 중인 수하에게 건넸다.
몸을 숨긴 별비와 철중구를 건네받은 마른 비.
마른 비가 아직 기절에서 깨지 않은 철중구를 마차에 앉히며 물었다.
“뭔가 전할 게 있는 거야?”
“응. 오래전에 아버지와 원 사제가 구해준 분이 멀지 않은 곳에 계셔. 끔찍한 일을 겪을 뻔한 여인인데, 고향을 떠나서 호남에 정착하셨거든. 원 사제가 한참 찾아뵙지 못해서 서신을 전해달라고 했어.”
“그렇구나.”
마른 비의 궁금증을 해소해 준 여규가 마차에 타며 문을 닫았다.
“됐어요. 가죠.”
일사천리.
마른 비 일행의 이동은 그 말이 딱 걸맞았다.
야투가 벌어진 장원을 빠져 나와 마차를 탔다.
마부는 기다렸다는 듯 능숙한 솜씨로 말을 몰았고, 해가 중천에 뜨기 전 망성(望城)에 도착했다.
그리고 강변에 대기 중인 허름한 배에 올라탔다.
겉은 허술하게 꾸몄지만 제대로 정비한 배였고, 선장의 배를 모는 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동정호를 거슬러 올라 호북을 향할 때쯤 철중구가 깨어났다.
“으엉? 여기가 어디야? 설마… 동정호?! 날 어디로 데려가는데?!”
장사로 돌아가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걸 설득과 협박으로 뜯어말렸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가을 수리가 노인과 아이들을 책임지기로 한 것과, 그가 장사에 있으면 오히려 그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들은 후에야 철중구는 얌전해졌다.
결정적으로 그가 조용해진 건 가을 수리가 몸담은 조직을 알게 된 후였다.
“마 뭐시… 아니, 비아라고 했나? 그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냐?”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하오문. 단 형은 하오문 장사지부에서 중책을 맡은 사람이지. 믿어도 된다.”
“하오문?”
문지기 사내의 말에 철중구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하오문이 어떤 집단인지 모를 리 없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겨우 마음이 놓였는지 한결 안색이 편안해진 철중구가 이번엔 엉뚱한 걸로 시비를 걸었다.
“그보다 형씨? 어째 말을 점점 아랫사람에게 하듯 하시네? 물론 형씨가 나이도 많고 위기에서 구해줬으니 그래도 돼. 근데 꼬박꼬박 존댓말을 듣다가 갑자기 반말을 듣는 내 심정도 이해를 해주셔야지? 사정이라도 설명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달라 이거야.”
강바람 스치는 뱃전.
문지기 사내가 철중구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널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걸 신경 쓰는 남자는 아니지 않나? 얻어맞고 기절한 게 분한 모양인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네 몸이 정상이었다면 네가 이겼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받아넘기면 더 시비 걸기도 힘들다.
무지하게 억울하단 표정을 짓는 철중구에게, 사내는 말했다.
“그리고 말 놓는 건 억울해하지 마라. 충분히 그럴 만하니까. 차차 알게 될 거다.”
사내에게선 굉장한 박력과 여유가 느껴졌다.
굽은 등과 뒤틀린 어깨.
불편한 신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철철 흐르는 위엄에 철중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시벌. 말은 졸라게 잘하네. 그간 답답해서 어찌 살았수?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차차 알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솜씨 좋은 선의(船醫)를 붙여줄 테니 빨리 몸이나 회복해.”
사내는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고 웃기만 했다.
악양(岳陽), 홍호(洪湖), 무한(武漢), 안경(安慶), 화현(和縣)…….
배는 장강의 도도한 물길을 타고 끊임없이 흘렀다.
처음 배를 타고 즐거워했던 마른 비조차 기나긴 여정에 넌더리를 낼 무렵.
선실에 널브러져 있는 일행에게 문지기 사내가 찾아왔다.
“도착했다.”
화아아악―!
그 말과 동시에 감지된, 하늘을 찌를 듯한 군기(軍氣).
마른 비 일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상으로 달려 나갔다.
“이, 이건…!”
저 멀리 시야를 꽉 채우는 군진(軍陣)이 엄청난 위용을 뽐냈다.
장사의 선착장이 초라하게 보일 만큼 거대한 항구에는 군선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전의가 타오른다.
대기의 밀도를 조이며 꿈틀거리는 기세는 폭발할 순간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사기충천(士氣衝天).
연승을 거듭한 군사들만이 지닐 수 있는 기세였다.
“대… 단한데?”
마른 비가 진심 어린 감탄을 흘렸다.
천 단위가 맞붙은 전쟁을 겪었지만, 이건 급이 다르다.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뿜어내는 군기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지경이었다.
하늘까지 치솟은 기세는 집결된 인간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미소를 띤 채 마른 비의 표정을 감상하던 문지기 사내가 말했다.
“자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 출중한 투사에게도 군대의 위용은 인상적인 모양이지?”
마른 비는 물론이고 여규와 철중구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일행의 반응을 충분히 즐긴 다음, 정신 차리라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자, 하선할 준비를 해야지. 항구까진 생각보다 금방이야.”
사내가 마른 비 일행을 둘러보며 웃었다.
“강소성(江蘇省)에 잘 왔네.”
처처척!
좌우에 일렬로 늘어선 군사들이 마른 비 일행을 맞이했다.
그들은 판자를 대고 하선하는 일행에게, 정확히는 문지기 사내에게 절도 있는 군례를 올렸다.
“충(忠)!”
대열을 갖춘 군사들이 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오른 주먹을 가슴에 댔다.
일말의 흐트러짐 없이 일치된 동작은 군인만의 전유물이니, 마른 비는 또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멋있다!”
순수하게 감탄한 마른 비와 달리 여규와 철중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 시커멓게 변한 철중구의 안색에서 된통 잘못 걸렸다는 속내를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봐, 형씨. 당신… 뭐야 대체?”
야투의 문지기.
아니, 이제는 도무지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에게 철중구가 조그맣게 물었다.
“음? 중구, 뭐라고?”
사내가 구부정한 허리를 돌리며 웃었다.
“장사 제일의 쾌남께서 원래 그렇게 목소리가 작았었나?”
도발.
이건 분명 도발이자 짓궂은 장난이다.
왜 장사에서처럼 크게 떠들지 못하느냐는.
울컥한 철중구가 항구가 떠나가도록 외쳤다.
“너! 뭐 하는 놈이냐고!”
충심으로 가득했던 군기가 돌변한다.
한데 뭉쳐 날카롭게 쏘아지는 살기에 천하의 철중구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장사 제일 쾌남이자 야투의 간판 투사가 아닌가.
발끈한 철중구가 기세를 끌어올리며 버럭 소리 질렀다.
“뭐! 이 새끼들아! 난 이 형씨가 뭐 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고 끌려왔어! 제대로 알려주고 꼬나보던가! 어쭈? 너 거기 어린 새끼! 눈깔에 힘 안 풀어? 팍, 씨!”
“하하하하!”
문지기 사내는 진심으로 유쾌한 듯했다.
‘과연 중구야!’라고 흡족해한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중구.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