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05화 (205/463)

205화

“그래, 궁금하다! 형씨가 뭐 하는 인간인지 궁금해서 돌아버릴 지경이야! 그러니까 빨리 말해! 당신, 정체가 뭐야?”

사내는 철중구의 재촉에 대꾸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풀었다.

목을 돌리고, 어깨를 기울이더니 허리를 비튼다.

그 느긋함에 울화통이 치민 철중구가 발작하려는 순간, 사내의 몸에서 뼈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두둑!

“으엉?”

으득! 우드득!

“이, 이봐. 형씨?”

뿌드드드득!

“으억! 깜짝이야! 뭐야, 이거? 혀, 형씨! 괜찮은 거야?”

철중구가 기겁하며 다가갈 때, 사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후우우…….”

깊게 내쉬는 숨을 따라 뒤틀린 육신이 제자리를 찾는다.

굽은 허리가 곧게 펴지고, 어긋난 어깨가 맞춰졌다.

임무를 위해 강제로 비틀었던 육체를 바로잡으니, 칠 척 장신의 사내가 당당한 위용을 드러냈다.

“축, 축골공(縮骨功)!”

여규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곡예단(曲藝團)에서 유래한 축골공은 뼈의 위치를 뒤바꾸어 몸을 축소하는 기예다.

명인의 경지에 이른 자는 자신의 신체를 삼 분의 일까지 압축할 수 있으며, 몸을 접어서 작은 상자에 넣는 게 가능하다고 했다.

묘기를 부리고 돈을 버는 곡예사들의 기술이라 천대받지만, 그 효과까지 천하진 않았다.

첩자나 밀정, 또는 살수처럼 남의 이목을 속여야 하는 자들이라면 천금을 들여서라도 배우려는 기술.

사내의 경지는 높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도 모두를 속여 넘기는 데는 충분했다.

“후우……. 오랜만에 제 몸으로 돌아오니 뼈 마디마디가 쑤시는군. 이게 내 본래의 모습이다, 중구.”

사내는 항상 올려다보던 철중구와 동등한 위치에서 눈을 맞췄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대도독부부사(大都督府副使) 강무재(康茂才). 내 직급과 이름이다.”

* * *

장사 외곽의 허름한 사당.

관성대제(關聖大帝)를 모시는 사당이지만, 이곳은 손오(孫吳)의 영웅들이 웅거했던 지역이다.

돌보는 이 없는 관제묘(關帝廟)에는 쓸쓸한 세월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컥! 크헉…!”

아니다.

오늘은 방문객이 있었다.

향불을 태우는 경건함 대신 피 묻은 분노를 쏟아내는 게 문제였지만.

“소교주! 그 어린 것이 언제 그렇게…!”

사지환의 부축을 받은 환마가 소리쳤다.

내부가 진탕된 바람에 숨을 쉬는 것도 벅차다.

하지만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기에 그는 울분을 여과 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사지환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무사히 빠져나와서 다행입니다. 권마는 그렇다 쳐도 소교주의 그 힘……. 정말 무시무시하더군요. 천마의 진전을 제대로 이은 모양입니다.”

숨을 몰아쉬던 환마가 겨우 울분을 가라앉혔다.

들끓는 내기를 진정시킨 그가 주변을 둘러봤다.

“야전단은 얼마나 남았나?”

“삼십칠 명……. 현재 확인되는 전력입니다.”

왼팔이 날아간 야전단주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천으로 대충 묶은 절단 부위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처참하군. 공들여 키운 전투부대가 통째로 날아간 건가……. 아니, 소교주가 이끄는 타격대에게 뒤를 잡힌 것치곤 양호하다고 해야 할지……. 단주. 여긴 안전하니 마음을 놓아도 된다. 상처부터 돌보도록.”

“네. 장로님.”

야전단주가 물러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환마가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그 낯짝을 들이밀 염치가 있더냐? 멍청한 놈. 믿고 맡겨 달라고? 고작 들개에게 물려 죽을 실력으로 그런 소릴 지껄였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장로님.”

악교익이었다.

가을 수리의 추측대로 철중구를 쳐내기 위해 그를 끌어들인 건 환마였다.

애초부터 그의 수하였으니 끌어들였단 표현이 적절하진 않았지만.

“중원에서 놀더니 감을 잃은 거냐? 사호? 그따위 애들 장난 같은 허명에 안주하니 발전이 없는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고개 숙인 악교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환마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사지환에게 말했다.

“불완전했다곤 해도 마라의 사기(死氣)를 억누르다니……. 허나 소교주도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야. 뒤를 쫓을 병력이 없는 게 천추의 한이구나.”

“기관이 파손되지 않았다면……. 아니, 야전단이 뒤를 잡히지만 않았어도 장원이 소교주의 무덤이 됐을 겁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것들 때문에…….”

마른 비와 별비를 떠올린 사지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화를 억눌렀던 환마의 눈에도 다시 분노가 이글거렸다.

“추단이라고 했던가? 묘하게 신경을 긁던 야만인 놈. 분명 무언가가 있는데 도무지 덜미를 잡을 수가 없었지. 부단주까지 붙여놔도 마찬가지였어. 확실해. 그놈과 짐승을 데리고 다니는 야만인 놈은 한패였다. 처음부터 작심하고 야투에 온 거였어.”

환마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리고 오늘 큰 손해를 봤지만, 그도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장원 밖에 심어놓은 눈들이 가을 수리의 뒤를 쫓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헛된 꿈을 꾸는 놈들 말고도 다른 것들이 있으리라 짐작했지만, 설마 하오문이라니.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는 쓰레기들이 감히…….”

“원 황실에 정보를 흘리는 것으로 야투에 침투한 놈들을 쓸어버리고, 허융의 짓으로 꾸며 철중구를 없애면 깔끔하게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내부의 첩자들을 일소하고, 야투의 배당금과 장사의 상권까지 모두 손에 넣을 기회였는데…….”

“그 후 마라를 완성하고 소교주까지 잡으면 ‘그분’의 곁에 설 준비가 끝났을 거다. 하오문과 야만인. 그놈들이 모든 걸 망쳤어.”

모든 게 박살 나버린 밤을 복기한 환마가 이를 깨물었다.

“제조소가 초토화된 이상… 장사에 머물 이유가 없다. 철수한다. 단, 살아남은 야전단을 전부 풀어라. 하오문으로 의심되는 것들은 개 한 마리까지 쓸어버리라고 해.”

“장로님! 제게 그 일을 맡겨주십시오!”

“……?”

돌아본 곳엔, 어제까지 사호의 한자리를 차지했던 남자가 눈을 빛내며 서 있었다.

* * *

마른 비 일행은 강무재를 따라 걸었다.

저 멀리 보이는 성벽은 그 뒤에 항구와 인접한 도시가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고, 그는 거기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라면 탁 트인 들판이 오랫동안 배를 타느라 지친 일행의 마음을 달래주었으리라.

하지만 마른 비 일행은 들판은커녕 내달릴 공간도 찾기가 힘들었다.

강가에서부터 성벽 아래까지 거대한 천막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성벽 외부에 세워진 군영은 또 하나의 도시와 같았다.

도시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초과한 병력.

마른 비는 이렇게 많은 인간이 바글거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충!”

강무재가 지날 때마다 병사들은 정중히 군례를 올렸다.

무게를 잡으며 인사를 받는 강무재를 보고 있자니 철중구는 왠지 모르게 배알이 뒤틀렸다.

“어이, 형씨. 대단한 사람인가 봐?”

“음?”

강무재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이었다.

“높은 사람. 뭐 그런 거냐고.”

병사들이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동안 속고 있었다는 생각에 심술이 날 뿐.

강무재는 웃었지만, 철중구의 태도를 넘길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공손한 자세로 강무재의 뒤를 따르던 자.

불만스럽게 철중구를 힐끗거리던 사내가 화를 버럭 냈다.

“네 이놈! 도저히 못 봐주겠구나! 부사님께 예의를 지키지 못하겠나! 그 값어치 없는 목이 날아가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철중구 또래로 보이는 사내가 벌게진 얼굴로 씩씩댔다.

그리고 철중구는 이죽댔다.

“부사? 그게 뭔데? 먹는 거냐? 형씨가 너한테는 윗사람일지 몰라도 나한텐 아냐. 난 여기 소속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뭐? 목이 날아가? 그럴 실력은 있고? 내 목이 네 하찮은 모가지보다 백배는 비쌀 거다, 이 새끼야.”

작심하고 쏟아내는 빈정거림이다.

강무재는 그동안 정체를 숨겨왔고, 아무런 언급도 없이 이곳으로 끌고 왔다.

눈치로 보건대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알고도 남는다.

위험을 모면하게 해준 건 고맙지만, 철중구는 이런 자들과 엮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도를 뽑을 듯 눈을 부라리는 철중구를 말린 건 마른 비였다.

“그만해. 아저씨는 우릴 도와줬잖아. 일단 따라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여기 머물든, 화를 내며 돌아가든 그 후에 결정해.”

“엉? 지금 나한테 명령하는 거냐?”

마른 비는 차분하게 말했지만, 철중구는 말투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는 지금 모든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아니. 권유하는 거야.”

마른 비는 그렇게만 말하고 철중구와 가만히 눈을 마주쳤다.

‘……큭! 이놈은 대체…!’

철중구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른 비의 눈에는 투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

기 싸움부터 피 튀기는 실전까지, 싸움에 이골이 난 철중구가 그걸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위축된다.

마른 비의 존재 자체가 커지며 자신을 뒤덮는 느낌.

철중구는 투기장에 이어 또 한번 전의가 꺾이는 걸 경험해야만 했다.

“……그렇게 보지 마라. 너랑은 싸울 생각 없으니까. 이 철중구, 생명의 은인한테 칼 뽑을 만큼 막사는 놈 아니다. 저 형씨한테도 마찬가지야. 너랑 달리 저 형씨는 마음에 안 들지만.”

“싸우다니? 왜 싸워? 나도 당신이랑 싸울 생각 없어. 나, 당신 진짜 맘에 들거든.”

순수한 건지, 모자란 건지.

마른 비가 배시시 웃는 걸 보고 있자니 혼자 툴툴댔던 게 바보 같이 느껴진다.

철중구는 맥이 탁 풀려서 고개를 흔들었다.

“하아……. 형씨, 미안하우. 갑자기 이런 델 끌려와서 내가 좀 예민해진 거 같네. 장사에 놓고 온 아우들 생각도 나고. 미안. 사과하겠소.”

강무재는 개의치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괜찮아. 뭘 그런 걸 가지고. 충분히 이해한다. 그보다 준비들 하게. 다 왔으니.”

“응? 다 왔다고?”

도시까진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뭘 준비하냐는 질문에 답하지도 않고, 강무재는 군영 중앙에 자리한 언덕으로 걸어 올라갔다.

야트막한 지형이지만 평야에 홀로 솟은 언덕은 군영 전체를 내려다보기에 좋았다.

경사를 오를수록 점점 뚜렷해지는 기운.

마른 비의 눈이 커졌다.

‘강해!’

단단하게 갈무리된 막강한 내공.

어마어마한 강자가 언덕 위에 있었다.

여규와 철중구도 기운을 감지했는지 긴장하기 시작했다.

‘누구지?’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확인이….

‘아…!’

마른 비가 언덕에 올랐을 때, 사내 한 명이 이쪽을 돌아봤다.

서른 중반쯤 되었을까?

척 보기에도 고위직이나 입을 법한 갑주를 걸친 사내의 눈매는 날카로웠다.

무인이나 전사가 아니다.

군인. 단단하게 정련된 기세는 그가 뼛속까지 군인임을 깨닫게 했다.

여휘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무의 냄새를 풍기는 남자였다.

하지만 마른 비가 놀란 건 그자 때문이 아니었다.

갑주를 입은 사내의 옆에는 뒷짐을 진 남자가 군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마른 비의 눈길은 그자의 등에 고정돼 있었다.

‘왜 이러지? 엄청난 강자가 있는데 왜 자꾸 저 사람에게 시선이….’

무를 수련한 흔적은 있지만 경지는 미미한 자.

하지만 일신에 지닌 능력의 고하를 떠나 존재 자체로 시선을 붙들어두는 자였다.

뒷짐을 진 사내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들인가?”

사내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 안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네, 주군. 바로 이자들이옵니다.”

강무재가 무릎을 꿇으며 극진한 예를 올렸다.

‘주군?’

사내와 눈을 마주친 순간, 마른 비의 온몸에 전율이 스쳤다.

착각일까?

사내의 눈길을 따라 대기가 흐르는 느낌마저 든다.

광대하게 펼친 하늘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반갑네.”

하늘이 부여한 운명의 길을 걷는 자.

비천하게 태어났으나 난세의 호걸로 발돋움한 자.

고난의 구렁텅이에서 기어올라 천명을 자신의 손으로 붙든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나, 주원장일세.”

시대를 움켜쥘 남자와의 만남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