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이 사람… 힘이 강한 건 아니야. 한데 이 느낌은…!’
압도.
그 말 외에 주원장이란 사내에게서 받는 느낌을 표현할 단어는 없었다.
그러나 우위에 선 힘을 바탕으로 강자가 약자를 찍어 누르는 것과는 다르다.
건드릴 수 없고, 훼손해선 안 될 무언가.
천명을 짊어진 사내는 수만의 군세를 발아래 둔 채 절대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냥 이 사람 자체가 거대한 거야!’
시대를 움직이고, 세상을 뒤엎을 야망은 특별한 존재를 만드는가.
싸운다면 주먹질 한 번에 목숨을 앗을 수 있지만, 왠지 성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옆에서 그를 지키는 무장이 아니더라도 초월적인 가호가 그를 지켜줄 것만 같은 느낌.
실제 그럴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해 운명을 개척해온 남자는 마른 비에게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주원장? 주원장이라고?!’
순수하게 사람 자체에 집중한 마른 비와 달리, 천하 정세를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는 여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원의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강남 이남을 사분한 세력들! 한림아(韓林兒), 주원장(朱元璋), 진우량(陳友諒), 장사성(張士誠)! 얼마 전 파양호(鄱陽湖)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로 진우량이 다른 한 명에게 패하고 죽었다고 했어. 분명 그자를 무너뜨린 자의 이름이…!’
이자다.
이자가 현재 강남의 패권을 쥐리라 예상되는 자다.
장강의 물길을 따라와 대규모 군세를 목격한 순간, 짐작은 했다.
저항군 세력 중 하나에 도착한 것이라고.
한데 그게 주원장의 진영이었다니!
여규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돌아봤다.
‘강무재! 왜 떠올리지 못했지? 요 몇 년간 가장 유명한 사람이잖아!’
주원장의 명령을 받고 거짓으로 투항하여 남쪽의 진우량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자.
파양호 대전에서도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주원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다고 했다.
워낙에 신출귀몰하여 명성에 비해 그 얼굴을 아는 사람이 드문 남자.
야투의 문지기로 위장했던 자가 설마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사내였다니!
너무나 큰 괴리감 때문에 그 둘을 같은 사람으로 연결 짓는 게 어려웠다.
강무재를 멍하게 바라보던 여규가 무언가를 깨닫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럼 설마 저 남자가…?’
처음 언덕을 올라올 때 일행에게 긴장감을 선사했던 사내.
주원장의 존재감에 가려져 잠시 잊었지만, 엄청난 무의 냄새를 풍기는 남자가 있었다.
여규는 여휘에게 들었던 하나의 이름을 떠올렸다.
‘서달(徐達)…!’
농민 출신임에도 큰 뜻을 품고 천하의 소용돌이에 기꺼이 뛰어든 자.
떠돌이 소작농의 막내아들에서 승려로, 비렁뱅이나 다름없는 탁발승에서 세상을 뒤엎자는 홍건적(紅巾賊)으로 변모한 주원장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남자였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군문에서 연마한 무예만으로 십좌에 필적하는 경지에 이른 자.
군인이다 보니 무림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휘는 그를 두고 저항군 세력 중 가장 조심해야 할 남자라고 했었다.
‘비아를 따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중원행을 나왔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된 거야? 여긴 그야말로….’
시대의 한복판이다.
무림 세력 간에 지지고 볶는 수준이 아니라 천하를 휩쓰는 태풍의 중심에 들어온 격이었다.
점점 아득해지는 여규에 반해 마른 비는 금세 평정을 찾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어. 아저씨들이 엄청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거. 그래서 묻고 싶어.”
야만인 청년이 구사하는 유창한 한어.
예의나 격식 따윈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었지만, 주원장이나 서달이나 밑바닥부터 올라온 남자들이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담긴 내용이지 사소한 존칭 따위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었다.
‘재미있군.’
주원장이 주의 깊게 본 건 말투 따위가 아니었다.
평온하고 담담한 저 신색.
난다 긴다 하는 군웅들도 자신 앞에 서면 움츠러드는데, 이 청년은 조금도 그런 기색이 없다.
마른 비만큼이나 주원장도 상대에게 커다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우릴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야?”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이었다.
야투에서 스친 게 전부인 인연.
가을 수리의 청이 있었다지만, 장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주어도 될 일이었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더라도 군영 어딘가에서 머물게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굳이 마른 비 일행을 이 엄청난 군세의 정점에 선 남자에게 소개할 이유가 없단 뜻이었다.
마른 비의 질문을 이해한 주원장이 천천히 입을 뗐다.
“자네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 그렇지. 그게 가장 궁금하겠군. 그건 내게 제법 곤란한 일이 생겨서 그렇다네.”
“……?”
의아해하는 마른 비를 보며, 주원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자네들이 날 좀 도와주길 바라네.”
“십 년.”
“……?”
주원장을 알현한 강무재는 마른 비 일행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군영을 걸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주원장이 병력을 정비해야 하는 까닭에 그로 하여금 상세한 내용을 전하길 명했기 때문이었다.
“주군께서 강남을 제패하기 위해 웅크렸던 시간이다. 병력, 자금, 구체적인 계획과 제도의 정비, 적들의 힘을 갉아먹기 위한 공작……. 정말 많은 준비를 했지. 그런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뭐였을 거 같나?”
마른 비나 철중구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여규가 답했다.
“인재겠군요.”
“맞다. 우리는 인재가 필요했다. 너무나 절실하게. 장사성은 재정이 풍부하고, 진우량은 병력이 강했지. 특출 난 게 없는 우린 인재를 충원하여 긴 안목으로 힘을 축적할 수밖에 없었어.”
강무재의 눈이 아련해졌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안했던 과거의 어느 때를 돌이키는 듯했다.
“다행히도 주군께선 눈에 보이는 힘만 중시하는 둘에 비해 말과 글이 갖는 힘을 일찍 깨달으셨지. 그 결과 송렴, 유기, 장일, 섭침 등 ‘4대 선생’을 비롯한 선비들이 우리에게 왔다. 그 후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어. 섣불리 북벌에 동참하지 말고 강남을 먼저 제패하라는 조언도 그들이 해주었지. 십 년의 인내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의 눈빛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과거를 훑던 기억이 현재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재는 부족했다. 문인이 아닌 무인들. 다른 군벌들이 그렇듯 싸울 줄 아는 자들을 대거 영입할 필요가 있었어.”
“그럼… 야투에 계셨던 이유가?”
강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투만이 아니다. 천하 각지의 이름 있는 투기장과 비무 대회에 요원들을 침투시켰지. 다년간 쓸 만한 자들을 추리고 영입했다. 진우량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상당 부분 그 노력 덕분이었어.”
“가을 수리 아저씨와도 야투에서 만난 거야?”
마른 비가 강무재에게 물었다.
그는 감시의 눈길을 떼어내기 위해 술과 도박에 찌든 폐인인 척 행세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투주가 감시를 붙인 건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어서고, 그건 가을 수리가 야투에 드나든 이후여야 성립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역시나 강무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가 먼저 나에게 접근했네. 정확히는 하오문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그들 덕분에 야투에 침투할 수 있었어. 그리고 우리와 공조한 까닭에 투주가 낌새를 챈 거겠지. 그 이후에 단 형이 본격적으로 야투에 드나들게 된 걸세.”
강무재는 잠시 입술을 축이고 다시 여규를 돌아봤다.
“야투는 좋은 인재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이지만, 침투하기가 쉽지 않았지. 받아들이는 인원을 상당히 까다롭게 선별했거든. 이번 일이 터지고 나니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는군. 아무튼 우리 쪽 인원을 넣을 수 있도록 협력한 게 하오문이었어. 정보 조작과 은폐, 침투 같은 게 그들의 전문 분야니까. 뿐만 아니라 장사에 있는 뛰어난 젊은이들을 많이 소개해줬지.”
“강남 이남에 예전처럼 원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다 해도 하오문이 상당히 위험한 일에 끼어들었군요. 저항군 세력과 연관이 있는 게 밝혀지면 곤란한 일을 겪게 될 텐데요.”
여규의 말에 강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백 분타주께 고마운 이유지. 우리의 고민을 파악하고 먼저 손을 내민 게 그였어. 한의 나라를 재건하고 민초들을 돕겠다는 대의로 발 벗고 나서준 거지. 아마 하오문 총단의 제지도 뿌리치고 우릴 도운 걸 거야.”
강무재는 장사가 있는 서쪽을 바라봤다.
“이번에 원의 첩보대가 움직인 건 우리 측 인원들 때문이겠지. 투주가 낌새를 채고 그들을 이용한 걸 테니까. 그 때문에 덩달아 하오문의 식구들까지 피해를 입었어. 백 분타주와 단 형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빚을 졌군.”
강무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쪽에 시선을 두었다.
백강과 가을 수리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에게, 여규가 내내 궁금했던 부분을 물었다.
“이건 조금 벗어난 이야기지만, 야투의 내원에 있는 자들은 환마가 이끄는 마교의 무리였잖아요? 장원에 계시는 동안 그들의 마기를 못 느끼셨나요? 소교주의 타격대도 마기를 숨기지 못해서 먼 곳에 있다가 전력으로 달려와 들이치는 방식을 선택한 거 같던데요.”
“느끼지 못했다. 지금 와서 짐작건대 환마의 수하들은 마기를 숨기는 방법을 개발한 것 같아.”
“마기를 숨긴다고요?”
여규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마교의 주력이 중원에 침투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마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도 눈에 띄기 때문에 그들은 기본적으로 습격이나 암살, 침투 공작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마공을 익히지 않은 인물을 섭외하거나 매수하지만, 그걸로 큰일을 준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절정의 경지에 이른 마인들은 마기를 감출 수 있지만, 그 정도의 실력자들이 많은 게 아니니 마교는 중원 침공 때마다 항상 정면으로 힘을 겨뤄야만 했다.
한데 마기를 숨기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구파일방의 일원으로 마교의 엄청난 힘을 듣고 자란 여규에게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틀림없다. 아마 그들이 착용한 가면이 마기를 숨기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원래 그건 투주만이 쓰던 물건이라고 했어. 정체를 감추고 신비함을 불어넣기 위해서였지. 근데 그게 어느 순간 내원의 인물들에게 지급됐다. 아마도 그 시점에 야투가 환마에게 먹힌 게 아닐까 싶은데.”
“가면이라……. 그걸 착용해야만 마기를 숨길 수 있는 거라면 한시름 놓아도 되겠네요. 언제 어디서나 그런 걸 쓰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요.”
또한 그런 건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닐 터였다.
기묘한 조화를 부린다는 환마가 개인적으로 제작한 물품이 틀림없으리라.
여규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또다시 본론을 짚은 건 마른 비였다.
“어우, 머리 아파. 한족들의 이야기는 너무 어려워. 왜 그렇게 배배 꼬고 복잡하게 뭔가를 준비하는 거야?”
한동안 조용히 있던 철중구가 말을 거들었다.
“동감이다. 머리 좋은 것들은 이래서 문제야. 맨날 뒤에서 뭘 졸라게 꾸며대요. 한족들이 복잡한 게 아니라 머리 굴리는 놈들이 복잡한 거다. 상황을 짜증 나게 만드는 건 항상 그런 놈들이라고.”
죽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이었다.
‘맞아, 맞아.’하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 마른 비가 강무재에게 물었다.
“그래서 주원장이란 아저씨가 우리에게 부탁하려는 게 뭐야? 당신들 싸움을 거들어 달라고?”
“그렇게 해주길 바란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네. 자네들 하나하나가 중원 전체를 뒤져도 찾기 힘들 만큼 뛰어난 이들이니까. 하지만 정말 부탁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닐세.”
“그럼?”
강무재의 눈이 정광을 담고 또렷이 빛났다.
과거부터 최근의 일까지를 되짚은 후, 이제는 완전히 현재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길은 정확히 마른 비를 향해 있었다.
“암살. 주군을 노리는 암살자가 있네. 난 당분간 자네가 주군의 호위를 맡아주었으면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