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호위를 맡아 달라고?”
생각지도 못한 부탁이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청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른 비 일행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비아에게 호위를 맡긴다고요? 왜죠? 지금의 방비로도 차고 넘치잖아요. 아까 옆에 계신 분, 서달 장군님 아닌가요? 오왕(吳王) 님을 노리는 게 특급 살수라 해도 그분의 무력이면 충분할 텐데….”
여규의 말에 철중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오왕이라고? 아까 그 사람, 왕이었어? 시벌, 어쩐지 분위기가 장난 아니더라니……. 그럼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이잖아? 비아의 뭘 믿고 호위를 맡긴다는 거야? 형씨, 얘 야투에서 처음 만난 거 아냐?”
여규와 철중구가 제각각 떠들어댔다.
강무재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네.”
“세 가지? 뭐가 그렇게 많아. 역시 피곤한 형씨구만.”
입은 툴툴대지만 철중구는 또렷한 눈으로 강무재를 바라봤다.
그 역시 슬슬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우선 걸출한 무력. 중구 너와 여 소협도 대단하지만, 우 소협은 정말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지. 이의 있나?”
“염병. 나한테는 너, 너 거리면서 얘들은 소협이야? 좟 같구만?”
철중구가 투덜댔지만, 반론은 없었다.
그도 인정하는 것이다.
마른 비가 출중하다는 것을.
“힘도 힘이지만 내가 우 소협을 점찍은 건 감각 때문이다.”
“감각? 무슨 감각?”
“투기장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누구도 괴생물체를 감지하지 못했지. 오직 우 소협만이 그걸 느끼고 공격까지 했어. 주군을 노리는 암살자를 방비하려면 그 예민한 감각이 필요해.”
살수의 접근을 알아챌 능력.
강무재가 주원장에게 마른 비를 추천한 가장 큰 이유였다.
“둘째는 여 소협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겠군. 서 장군님께선 곧 주군의 곁을 비울 수밖에 없네. 나도 마찬가지고.”
“두 분 다요? 왜…? 아, 설마 전쟁이…!”
막대한 병력의 집결.
그건 곧 시작될 전쟁의 전조였다.
최전선에서 군단을 지휘해야 할 서달은 주원장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고, 그 빈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십좌에 필적하는 무력을 지닌 사람이 흔할 리 없었다.
마른 비의 무력은 서달에 미치지 못하지만, 강무재는 그가 별비를 부린다는 걸 알고 있다.
거기에 여규와 철중구가 가세하고 기존의 호위무사들까지 더하면 탄탄한 경호가 완성되는 것이다.
“중구 너는 의아할지 몰라도 우 소협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게 세 번째 이유다.”
“얠 믿는단 말이야? 왕의 호위를 맡길 만큼? 뭘 보고?”
“그는 단 형과 같은 부족 출신이다. 난 단 형을 무척이나 신뢰하지. 소협이 널 구하기 위해 원의 첩보대와 야투의 병력에 맞선 것을 떠올려봐라. 이런 남자를 믿지 못하면 누굴 믿을 수 있겠나.”
강무재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그 눈빛 그대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난 내 눈을 믿네. 자네만큼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은 없어. 대업을 이루려는 주군께서 무사히 전쟁을 마칠 수 있도록 그분의 곁을 지켜주게나.”
마른 비는 강무재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노년에 가까운 나이가 되도록 올곧은 눈빛을 간직한 사내를 들여다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너무도 간단한 승낙에 여규와 철중구가 깜짝 놀랐다.
“비아야! 그렇게 간단히 수락할 일이 아냐!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래, 인마! 자고로 골치 아픈 일엔 엮이는 게 아니랬다! 왕씩이나 되는 인간을 호위할 사람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너 아니어도 지켜줄 인간이 선박으로 세 척은 나올 거다! 거절해!”
둘의 염려에 마른 비는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충분히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야. 일단 내가 하고 싶어.”
“하고 싶다고?”
“응. 아까 그 사람,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어. 힘이 센 것도 아니면서 그런 존재감을 뿜어내다니. 그 사람, 지금 세상을 바꾸려는 거지? 그가 보는 풍경이 어떤지 알고 싶어.”
“풍경이라니…….”
마른 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같은 걸 고민하고 짊어지지 않는 한 그건 어렵겠네. 취소! 그냥 그 사람이 궁금해.”
‘궁금하다.’
그건 지금껏 마른 비를 움직여 온 원동력이었다.
동물들이 궁금했고, 사람이 궁금했다.
청죽림 밖이 궁금했으며, 운남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다.
맛보지 못한 음식이, 새로운 풍경이,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이 궁금하여 중원으로 나왔다.
호기심.
새로운 것,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갈구가 소년을 키웠다.
그리고 지금, 마른 비는 주원장이란 사내가 궁금했다.
“운남을 나와서 본 중원은 너무 크고 복잡해.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과 목표를 지니고 살아가. 그 사람은 이 거대한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거잖아? 그 사람이 만들 세상이 궁금해졌어.”
“…….”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다.
여규는 물론이고 강무재까지도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철중구는 중얼댔다.
“뭐야, 말 잘하네? 나만큼이나 무식한 놈인 줄 알았는데……. 얘 원래 이렇게 똑똑했냐? 무지하게 복잡한 놈이었네?”
마른 비는 웃으며 말했다.
“복잡하지 않아. 그냥 궁금한 거라니까. 그리고… 지금 중원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
“잘못됐다고? 뭐가?”
“황실의 첩보대라는 사람들. 제멋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억압했잖아. 당신도 하마터면 누명을 쓰고 죽을 뻔했고. 아니라고 하는데 들을 생각도 없었어. 힘이 있단 이유로 그렇게 하는 건 잘못한 거야.”
“야, 그건…!”
물론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허나 인류 역사에서 힘을 가진 자들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은 경우가 있긴 하던가.
힘을 가진 자가 곧 법이다.
권력이든 재물이든 무력이든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찍어 누르는 건 끝없이 되풀이된 굴레일 뿐이었다.
한족이 중원을 차지했을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같은 핏줄임에도 계층을 나누고, 귀한 자와 천한 자를 구분한다.
당장 그들이 몸담은 무림은 다른가?
거긴 더더욱 노골적인 세계다.
원초적인 힘에 근거한 약육강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
과연 새로운 제국이 들어선다고 다를 것인가.
철중구는 아니라고 확신하지만, 그게 옳지 않다는 마른 비의 말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억울하게 당할 뻔했듯이 잘못된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주원장이란 사람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는 몰라. 하지만 보고 싶고, 기대할 뿐이야. 내가 목격한 건 현재 힘을 가진 자들의 전횡이었으니까. 그걸 바로잡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힘을 빌려주겠어.”
마른 비의 행보가 새롭게 뻗어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함께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나.
여규가 저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너랑 다니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들에 휘말리네. 첫 중원행에 평생 할 이야기를 다 겪겠다. 좋아. 나도 가담하겠어. 휴우… 나중에 전장에서 아버지랑 만나게 되는 건 아니겠지?”
설령 그렇다 해도 여휘는 아들의 선택을 흡족해하리라.
시기가 맞물리고 인연의 끈이 닿았다면 여휘가 몸담은 곳은 원 황실이 아니라 이곳이 될 확률이 높았을 테니까.
삐딱선을 탄 건 역시나 철중구였다.
“죄다 미쳤구만. 어떤 놈이 죽이러 올지 모르는데 지켜준다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그게 돈이 되냐, 쌀이 되냐? 돌아가는 꼴을 보니 전장에도 나가게 될 것 같은데, 난 빠진다.”
손을 휘휘 젓는 철중구를 돌려세운 건 강무재였다.
“이봐, 중구. 겁나나?”
“뭐라고?”
빤히 보이는 수작이다.
강무재의 도발은 지극히 일차원적이었다.
하지만 철중구는 이런 종류의 도발을 참지 못했다.
그가 울컥해서 욕을 쏟아내려는 찰나, 강무재가 선수를 쳤다.
“지금 장사에서 네 명성이 하늘을 찌른다더군.”
“으엉? 갑자기 뭔 소리를…!”
“사호. 길바닥 싸움꾼이 악교익을 꺾었다고 난리가 난 모양이야. 중원 전체에 소문이 퍼지고 있더군. 새로 사호의 자리에 오른 철중구라는 사내가 누구냐고. 아, 별호도 붙었어. 네가 싸우는 모습을 본 야투의 관객들이 널 ‘투도(鬪刀)’라고 부르고 있다.”
“커, 커험!”
철중구의 입꼬리가 씰룩대고 있었다.
미친 듯이 웃어 젖히고 싶지만, 가까스로 참는 모양새였다.
강무재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야투의 영웅! 장사 최고의 쾌남! 패군의 뒤를 잇는 싸움의 천재! 모든 이들이 중구 너를 칭송하고 있다.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도 첩보대의 수장 넷에게 한꺼번에 덤비라고 한 배짱은 가히 전설로 남을 지경이야.”
“크흠! 내가 한 일이지만, 솔직히 그건 정말 대단했지.”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난 네가 당연히 팔 걷고 나설 줄 알았지. 원 황실에 한 방 먹일 기회나 마찬가지니까.”
“음…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아쉽게 됐군. 무림을 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길 기회인데. 모두가 기억하는 영웅 말이다.”
“역사에 이름…. 영웅….”
철중구가 무언가에 취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직접 봐서 알겠지만 우린 모든 준비가 끝났고, 이제 승리할 일만 남았다. 거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이름을 남길 수 있지. 그리고 널 위해 굉장한 보수를 준비했는데 네 생각이 그렇다니 아쉽게 됐….”
“한다!”
철중구가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나 역시 한족이 아니냔 말이야! 인공 대머리처럼 품위 없게 머리나 밀고 다니는 오랑캐 놈들에게 한 방 먹여줘야지! 호위건 전쟁이건 필요한 걸 말하라고! 내가 왜 투도라고 불리는지 놈들에게 알려주겠어!”
“아, 일단은 동쪽에 남은 놈이 먼저지만……. 그래, 잘 부탁한다, 중구.”
가뿐히 철중구를 구워삶은 강무재가 마른 비와 여규를 보며 씩 웃었다.
마주 웃어준 마른 비가 말했다.
“결정됐네. 그럼 이제 암살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아저씨.”
* * *
“헉, 헉…!”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검에 베인 어깨가 찢어질 듯 아팠다.
이틀간 한숨도 못 잔 것도 문제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눈앞이 가물가물하다.
가을 수리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타아앗!”
하지만 쓰러질 수 없다.
식구들을 공격한 적을 막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빨리 움직이다니…!’
검은 바탕에 흰 뱀이 그려진 가면.
야전단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치고 들어왔다.
당연히 예상은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하오문이 개입했다는 걸 모를 리 없었고, 심지어 상대는 마교의 장로였다.
상황이 수습되면 자신들을 찾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식구들을 숨기거나 대피시키고 있었는데…….
‘전투가 끝나자마자 움직인 건가…!’
이토록 신속하게 복수에 나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소교주가 이끄는 타격대에게 박살이 나고 지리멸렬했다고 들었는데, 남은 병력을 모조리 투입하여 자신들을 잡으러 올 줄이야.
심지어 놈들은 식구들의 소재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가을 수리의 얼굴이 암담함에 물들었다.
“컥!”
“아아악…!”
기루, 마방, 도박장, 장원…….
대응할 무력을 갖추지 못한 하오문도들이 빗질에 걷히는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당신들 누구야! 컥!”
“왜, 왜…?”
야전단은 작심한 듯 손을 썼고, 하오문과 상관없는 이들마저 무차별적으로 도륙했다.
장사에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분타주는 어디 있나.”
스물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검을 휘둘러서 피를 털어냈다.
가을 수리의 눈이 커졌다.
“악교익…!”
“날 아나? 아, 야투에 침투했으니 모를 리가 없겠군. 그날은 정말이지, 최악의 날이었어.”
입술을 짓씹은 악교익이 되물었다.
“분타주의 위치를 말해라. 그러면 곱게 죽여주마.”
“흐흐. 아마 지금쯤이면 동정호 어딘가를 지나고 계시겠지.”
사실이었다.
이번 사건 때문에 문주의 소환 명령을 받은 백강은 총타로 향하는 중이었다.
가을 수리는 자신을 믿고 떠난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너를 썰다 보면 알게 되겠지.”
검이 휘둘러지고, 피가 튀었다.
간신히 검을 흘렸지만, 무릎이 꺾인 가을 수리는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었다.
악교익의 눈짓에 야전단 무인들이 다가왔다.
‘끝인가…….’
자신을 제외하면 이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하오문도는 없었고, 소교주도 부상을 입고 몸을 숨겼다고 했다.
어떤 기적도 바랄 수 없는 상황.
가을 수리는 죽음을 각오했다.
‘분타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오. 부디 길의 끝을 보시길.’
가을 수리가 눈을 부릅뜨며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려 할 때였다.
“삐이익―!”
맹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새카만 그림자가 하늘을 덮었다.
슈욱― 퍽! 퍼버버벅!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가면을 쓴 자들이 허물어지고, 그림자가 허리를 세운다.
“이십 년만인데 여전히 허약하구나. 그러게 힘을 키우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남쪽에서 날아온 노전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해후일지니.
강철 같은 뒷모습을 목격한 가을 수리가 온몸을 떨었다.
“순서를 정해라. 어떤 놈부터 죽고 싶으냐?”
장사에 강림한 와족의 전설이 야전단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