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뭐냐, 이 야만인은?”
악교익은 짜증이 치밀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노인은 새를 타고 하늘에서 날아왔다.
그리고 기습으로 야전단원 넷을 쓰러뜨렸다.
팔다리를 놀리는 꼴이 제법 무를 수련한 것 같지만, 형과 식이 배제된 마구잡이 공격이었다.
저런 싸움법, 어디선가 본 형태가 아닌가!
철중구의 이죽거림이 떠오른 악교익은 화가 났고, 살의가 끓어올랐다.
“새를 타고 날아와? 별 희한한 것들이 다 있구나!”
철중구에게 두들겨 맞고 기절했던 그는 마른 비와 별비의 활약을 보지 못했다.
당연히 와족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고, 자신의 일을 방해한 노인이 짜증 날 뿐이었다.
반면 마른 비의 힘을 지켜봤던 야전단원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 잠깐! 조심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건….”
그 신중한 말이 악교익의 짜증을 부채질했다.
“저따위 야만인에게 기가 죽기라도 한 거냐? 네가 그러고도 영광스런 신교의 후예란 말인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처리해라!”
척 봐도 별거 아닌 노인네다.
흘러나오는 기운이 볼품없지 않은가.
악교익은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고, 야전단원들을 시켜 정리하게 했다.
“여전하군. 여긴.”
야만인 운운하며 다른 민족을 눈 아래로 보는 저 오만함.
이십 년간 중원을 오가며 질리도록 경험한 차별이다.
그것만으로도 불쾌한데 이놈들은 간신히 찾은 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믐이 뒤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내내 마음에 걸렸다. 너에게 이걸 전수한 건 네가 성년식을 떠나기 전이었지. 그땐 다듬는 중이라 미진한 부분이 많았어. 잘 봐라. 이것이….”
진형을 갖춘 야전단원 다섯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믐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진짜 올빼미 사냥이니라.”
쾌애애액―!
섬전처럼 쏘아진 수격.
대기를 가르는 올빼미의 발톱은 황홀했으며, 또한 표홀했다.
“커헉!”
“크아악!”
몸통이 꿰뚫린 적들이 허물어지기도 전에.
그믐은 전진했다.
쾅!
번갯불.
노장의 기동은 눈부셨다.
또한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사냥의 기본은 짐승의 머리를 치는 것이며, 그것은 인간끼리의 싸움에서도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환영처럼 눈앞에 나타난 그믐 때문에 악교익은 기겁했다.
“허헉!”
철중구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했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중원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다.
또한 환마가 차기 야전단주로 쓰기 위해 직접 벼린 검이었다.
반사적으로 끌어 올린 내공이 검에 담기고, 그믐의 공격을 막아섰다.
쩌저정!
“호오, 막아? 제법이군.”
나이에 비해 상당한 놈이다.
허둥지둥 거리를 벌리는 악교익을 보며 그믐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이럴 수가! 어디서 이런 괴물이…?!’
공격 직전까지 기운을 숨긴 것인가!
강렬한 충격에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악교익은 식은땀을 흘렸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 허세를 부렸다.
“이래 봬도 사호의 하나였던 몸이다! 만만히 보지 마라! 늙은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혼자선 죽었다 깨도 당할 수 없다.
악교익이 눈짓하자 남아 있던 야전단원들이 그믐을 둘러쌌다.
바로 들어올 줄 알았던 노인은 멈춰 서서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호? 사파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네가 그거냐?”
“그렇… 아, 아니, 그랬다! 그러니 계속 덤비면 목숨을 내놔야 할 것이야!”
전흠이 언급했던 녀석들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과연 유명할 만하다.
이 정도면 산이나 걸음이와도 자웅을 겨뤄볼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가소롭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그런 거지, 그랬다는 또 뭐야? 목숨을 내놔야 할 거라고? 허허, 이것 참. 여휘, 그 친구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은 못 할 터인데.”
기가 찬 그믐이 헛웃음을 흘렸다.
칠룡? 사호?
그게 어쨌단 말이냐.
그래 봤자 애들 중에 조금 잘 치는 수준이 아닌가.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겠지만, 세월이 뒷받침되지 않은 재능은 그 한계가 명확한 법이었다.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라. 부를 놈이 있다면 전부 부르고. 무슨 짓을 하든 너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할 것이니.”
뭉클뭉클 번지는 기파.
잎의 노래를 잃은 이후, 그믐은 피나는 고련을 거듭해왔다.
그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다시는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전성기의 기량을 찾은 노인은 뭐가 오든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이런 게 튀어나올 줄 알았다면 야전단을 흩어놓지 않았을 텐데…!’
악교익은 죽을 맛이었다.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서 있는 야만인 늙은이.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투지가 바닥을 친다.
환마가 이 자리에 있다고 해도 도저히 이길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근방에 있는 야전단을 부르려 할 때, 그믐이 움직였다.
“더 올 놈이 없나 보군. 시작하자.”
“자, 잠깐…! 아직 다 온 게 아니야!”
“기다리기 귀찮다. 난 이십 년 만에 만난 아들놈과 대화를 해야겠어.”
“부, 부르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냥 죽어라.”
야만인의 모습을 한 사신이 다가온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악교익이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으아아아아! 난, 난 언젠가 교의 정점에 설 남자…!”
“안 됐지만 네가 그 정돈 아니다, 애송아.”
뻐어어억!
경쾌하게 내친 일격에 악교익이 허물어졌다.
목젖이 뚫린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진형을 짠 야전단원들조차 그믐의 한 수를 받아내는 자가 없었다.
절정에 이른 무력.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금 전성기를 열어젖힌 남자가 몸을 돌렸다.
“…….”
입이 있으나 떨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그리워한 얼굴이지만 막상 마주하니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들은 그저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건 이십 년간 이 순간을 기다린 아비였다.
“보고 싶었다.”
마음을 보인다는 건 왜 이리 어려울까.
남들에겐 쉽게 하는 말도 내 자식에겐 꺼내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 다른 아비들도 같은 심정일까?
모르겠다.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꼭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러지 못해서 지난 이십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후회하지 않았던가.
그믐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용기를 냈다.
“……널 찾아 헤맸다. 이십 년간 끊임없이 중원으로 나와 너의 흔적을 찾았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초조해지더구나. 세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지만, 널 보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날 너무도 두렵게 했다.”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다.
지금 솔직하지 못하면 눈 감는 순간까지 한으로 남으리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후회한다. 네게 모질게 대한 것을. 너의 꿈을 헤아리지 못한 것을. 떠나는 널 붙잡지 않은 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슬퍼하고 마음 아파했다. 내 무지와 독선 때문에 너와 그녀가 생이별 한 것이, 그녀가 끝내 널 보지 못하고 눈감은 것이…… 너무나 죄스러웠다.”
꼭 전하고 싶었던 말.
어느덧 죽을 날이 살날보다 가까워진 아비가 세상 하나뿐인 아들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날 용서해주겠니.”
항상 엄하기만 했던 아비다.
서글프도록 늙어버린 아버지가 내보인 진심에, 아들은 눈물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호위
막사의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오후의 한때.
강무재는 마른 비 일행을 불러 모았다.
마른 비가 중원의 요리에 관심이 많다는 걸 듣고 주원장이 즐기는 음식을 준비할 정도로 그는 일행에게 깊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응천부(應天府)의 명물 고압(烤鴨)이네.”
특수하게 키워진 오리의 살과 껍질 사이에 대롱을 꽂아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고, 달콤한 양념을 발라 장작불에 훈제한 요리다.
막사를 메운 훈제 향이 마른 비 일행의 식욕을 자극했다.
“응천부로 개명하기 전, 집경(集慶)을 점령한 주군께서 가장 만족스러워하신 것 중에 하나지. 서민들도 널리 먹는 음식이지만, 이건 말 그대로 천하 진미나 다름없어. 들어보게.”
발라낸 고기를 오이채와 함께 밀전병에 싸서 입에 넣는다.
입안 가득 퍼지는 육즙과 껍질에 베인 훈제 향, 그리고 감칠맛을 내는 양념이 어우러져 기가 막힌 조화를 이뤘다.
마른 비는 감탄할 시간도 없이 오리고기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와… 이런 음식이! 진짜 맛있어요!”
어지간해선 식탐을 부리지 않는 여규조차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오리고기는 훌륭했다.
이런 음식이 있는 줄도 몰랐던 둘과 달리 호광성 출신인 철중구는 고압에 대해 들어본 모양이었다.
“캬아! 죽이네, 이거! 소문 이상이구만! 형씨, 어디 꿍쳐놓은 술 좀 없수?”
이런 걸 술 없이 먹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군영 한복판에서 술을 찾는 게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지만, 강무재는 유연한 남자였다.
그가 품에서 오량액(五粮液)을 꺼내자, 이번엔 철중구의 눈이 돌아갔다.
“취하면 안 돼. 딱 즐길 정도만. 아직 정식으로 임무에 투입되기 전이고, 손님으로 초청한 것이니 오늘만 허락하는 사치다.”
“빡빡한 꼰대인 줄 알았는데, 뭘 좀 아는 형씨구만! 걱정 말라고! 이 투도가 다 해결해 줄 테니까! 카하하!”
별비를 위한 음식도 준비돼 있었다.
병사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아예 대형 막사 하나를 준비한 강무재가 그 안에 싱싱한 생고기를 쌓아둔 것이다.
모두가 포만감에 배를 두드릴 때쯤, 강무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충분히 즐겼나? 그럼 슬슬 이야기를 시작하지. 대략 한 달 전쯤 주군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네.”
“앞으로 올 게 아니라 이미 왔었다고요?”
여규는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암살이란 당연히 기습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비밀의 유지가 관건이다.
자신을 노리는 살수가 있다는 걸 표적이 눈치챈 순간, 성공 가능성은 희박해지는 것이다.
왕을 노릴 정도의 암살자라면 사전에 계획을 노출할 리가 없지 않은가.
강무재가 살수의 존재를 확신하는 근거가 궁금했는데, 그게 이미 한 차례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중요한 건 아직도 그자를 경계하는 이유였다.
“뭐가 궁금한지 안다. 이미 한 번 막아냈고, 존재를 눈치챈 암살자를 왜 걱정하느냐고?”
강무재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천천히 말했다.
“서 장군님이 없다면 다시 막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이야.”
“……?!”
놀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주원장의 신변을 지키는 자들이 절대 녹록할 리 없다.
당장 막사 주위로 느껴지는 기운만 해도 여규 자신보다 윗줄인 자가 한둘이 아니지 않나.
몸을 숨긴 호위들은 훨씬 많을 터.
이미 존재가 알려진 마당에, 용담호혈(龍潭虎穴)이나 다름없는 이곳을 뚫고 주원장을 위협할 만한 살수라니.
여규는 도무지 믿기가 힘들었다.
“특급 살수를 본 적이 있어요. 살막의 간판이라는 사편 갈우영. 그자가 살막의 정예를 이끌고 암살을 시도한다고 가정하면…… 어림도 없어요. 오왕 님께 접근하기도 전에 몰살할걸요.”
나름의 결론을 내린 여규가 물었다.
“뭔가 상상할 수 없는 작전을 짰겠네요. 숫자도 굉장히 많을 테고. 가령 오왕께서 야지를 시찰할 때 미리 매복해 있다가 급습을 했다던가….”
강무재의 답변은 여규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하나였다. 주군을 공격한 살수는. 위치는 왕궁. 호위에 만전을 기한 상태였지. 작전? 놈은 야간에 ‘그냥’ 들어왔어. 구획마다 배치된 경계병을 무시하고 제집처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