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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09화 (209/463)

209화

강무재가 이빨을 뿌드득 갈았다.

아마도 그는 야투에 있었을 테고, 서신으로 상황을 전달받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현장에 있던 사람처럼 상세히 설명했다.

수차례에 걸쳐 상황을 보고받고 복기한 게 틀림없었다.

“놈은 주군의 처소에 가까워지자 손을 쓰기 시작했지. 아마 무공 수위가 높은 자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야. 허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놈이 지나간 경로에 있는 호위들이 죽어 나가는데 아무도!”

정녕 믿기 힘든 일이었다.

겹겹이 둘러친 호위를 뚫고 유유히 왕의 목을 노릴 수 있는 암살자?

그 정도의 살수가 세 명만 있어도 세상에 남아나는 요인이 없을 거다.

현 무림 최강의 살수로 꼽히는 자들도 그 정도는 아닐 거라는 데에 여규는 목을 걸 수 있었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삼대 살수 집단의 수장들이 연합이라도 한 거야? 아냐. 흉수는 한 명이라고 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정도의 살수는…… 아?!’

여규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래전에 들어서 가물가물한 별호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듣도 보도 못한 경지에 이른 살법.

강무재의 말이 사실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건 그자뿐이었다.

“주군과 서 장군님은 호형호제할 만큼 가까운 사이지. 그날 마침 장군님께서 술이나 한잔하자며 주군을 찾지 않았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거야.”

여규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도 강무재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직접 봐서 알겠지만, 장군님께선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대단히 강한 분이다. 물론 군문의 특성상 일대일 결투에 특화된 무림인들에 비해 일 대 다수에 좀 더 능하시지. 하지만 살수를 잡는 데 유리한 점도 있다.”

강무재는 암살자의 능력을 상세히 전하기 위해 서달을 평하고 있었다.

“살기의 감지. 평생을 전장에서 사는 만큼 군문의 정예들은 살기에 민감해. 한데 장군님께서 코앞에 있는 놈을 놓쳤다. 그 살수 놈이 장군님 이상으로 강해서? 아니야. 주군을 해하려고 암습을 가하던 놈은 장군님의 검에 큰 부상을 입었어.”

“그런데… 놓쳤다고요?”

여규는 강무재의 말을 들을수록 점점 그자의 특징에 근접하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 석연치 않은 부분만 빼면.

“그래. 마무리를 지으려는 순간, 놈은 말 그대로 사라졌다고 한다.”

“사라졌다고? 눈앞에서? 부상까지 입은 놈이? 하! 그 살수 놈, 유령이나 귀신쯤 되나 봐? 잘 나가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집중해서 듣던 철중구가 김이 팍 샌 표정으로 투덜댔다.

인간이 갑자기 사라진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절정에 이른 경공이나 보법이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고, 서달이란 장군의 경지라면 절대 그걸 놓칠 리 없다.

순간적인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더라도 존재까지 놓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철중구가 강무재의 말을 거짓이라고 단정 지으려 할 때였다.

“아냐……. 진짜일 수도 있어.”

얼굴을 심각하게 굳힌 여규가 모두를 돌아봤다.

“마지막으로 활동한 게 너무 오래전이라 살아 있다고는 믿기 힘들지만… 비슷한 선례를 남긴 살수가 있어.”

“선례? 무슨 선례? 갑자기 사라지는 거 말이냐?”

“응.”

침을 꿀꺽 삼킨 여규의 입에서 마교의 전설적인 살수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음살(陰殺). 마교 유일 살수이자 무림 역사상 최고의 암살자라고 불린 자. 그자에 대한 일화의 절반만 사실이어도 그런 짓을 벌이는 게 가능해.”

* * *

그믐과 가을 수리는 야전단과 전투를 벌인 장소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가을 수리가 주체할 수 없는 격정에 휩싸여 오열했기 때문이다.

그가 땅에 엎드린 채 이십 년간 쌓인 눈물을 쏟아내는 동안, 그믐은 벌게진 눈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을 수리는 벌떡 일어나 하나뿐인 아비의 손을 잡았다.

‘안다, 이해한다, 죄송하다, 감사하다…….’

감정의 교류에 한없이 둔한 게 사내들이지만, 때론 뜨거운 눈빛만으로 가슴에 담긴 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가을 수리는 입술이 경련하는 통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그 눈빛이면 충분했다.

아들의 손을 힘주어 잡은 그믐이 말했다.

“얼굴을 보니 좋구나.”

오길 잘했다.

지난 이십 년간 끝없이 중원으로 나오길 잘했다.

포기하지 않으니 이처럼 얼굴을 맞댈 수 있지 않은가.

가을 수리도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저도 그래요, 아버지.”

굵은 주름이 파인 눈가를 들여다보던 가을 수리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렸다.

담장의 일부가 변하고, 제 벗처럼 고향을 떠나 이국으로 건너온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외피를 환경에 맞게 변화시키는 생물.

커다란 도마뱀은 그믐으로서도 처음 보는 종이었다.

“다색이라고 합니다. 제 가장 소중한 친구에요. 아버지의 기준엔 못 미치겠지만, 저도 이젠 반려수를….”

어린 시절, 부모의 매몰찬 반응은 자식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리라.

그믐은 가을 수리의 말이 아팠다.

꾹 쑤시는 가슴을 누르며, 그믐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하나뿐인 네 벗이 아니냐. 누가 봐도 훌륭한 반려수다. 누구도 저런 진귀한 녀석과 이어진 경우는 없었을 거야.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가을 수리는 변모한 그믐의 모습이 생소했다.

허나 굳이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다.

핏줄의 따스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뿐.

가을 수리는 눈물 섞인 눈으로 웃었다.

‘왜 그때는 이러지 못했을까. 수리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너무도 미안하구려.’

그믐이 먼저 간 잎의 노래를 떠올렸다.

그리고 요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거면 충분하다.

오랜 시간을 건넌 부자간의 해후는.

깊고도 긴 그리움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은.

이젠 다시 현실에 눈 돌릴 시간이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듯한데……. 괜찮은 게냐.”

그 말에, 가을 수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식구들! 식구들이…!”

‘식구라…….’

분명 식구라고 했다.

중원에 나온 아들은 다행히도 머무를 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어디든, 무엇이든 좋다.

아들이 선택한 곳이라면.

그믐이 그렇게 생각할 때, 가을 수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버지! 식구들이 위험합니다! 힘을 빌려주세요! 그들을 한 명이라도 살려야 합니다!”

가을 수리에게선 소중한 이들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이십 년 동안 찾지 않은 아비에게 서슴없이 도움을 요청한다?

누군가는 염치없다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집단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수십 년을 살아온 그믐이 보기엔 지극히 옳은 판단이었다.

아들의 눈엔 진심 어린 염려와 묵직한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잘 컸구나.’

대략적인 상황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물리적인 위협이라면 자신이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분야가 아닌가.

그믐은 주저 없이 나섰다.

“앞장서라. 모조리 정리해줄 테니.”

어느덧 자신보다 커버린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아비가 말했다.

* * *

“음살이라니. 너무 간 거 아니냐?”

철중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역시 무림에 몸담은 사내고, 천하에 위명을 떨친 인물들을 듣고 자랐다.

활동한 시기가 너무 벌어져서 떠올리지 못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상황에 부합하는 살수는 음살밖에 없다는 심증을 굳혀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내용과 달리 그의 말투에선 희미한 긍정이 묻어났다.

“음살이란 사람이 누구야? 유명한 살수?”

강무재가 군영을 시찰하러 먼저 일어선 상황.

막사에 남은 사람 중 음살을 모르는 건 마른 비뿐이었다.

“응. 마교의 인물인데 말 그대로 전설적인 살수야. 그가 죽이기로 마음먹은 자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전해지는. 그는 활동할 시기에도 천산(天山) 밖으로 나오는 일이 드물었다고 해. 오직 마교를 넘보는 자들을 처단하기만 했지. 하지만 그가 죽인 사람들이 너무 거물들이라 그는 몇 번의 살행만으로 천하제일살수의 자리에 올랐어.”

잠시 숨을 고른 여규가 말했다.

“더 무서운 건 누구도 그를 잡을 수 없었다는 점이야. 내가 오왕 님을 노린 살수의 이야기를 듣고 그자를 떠올린 건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대목 때문이야. 음살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런 내용이 적혀 있거든.”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지.”

오랜만에 아는 게 나왔는지 철중구가 끼어들었다.

“보통은 마교 놈들이 중원을 침범했지만, 아주 드물게 중원 무림에서 마교 정벌에 나선 경우도 있다. 당대 천하제일검이라 불린 전(前) 정도맹주가 대표적인 경우지.”

“천하제일검……. 전대 맹주란 사람이 마교에 쳐들어갔어?”

“그래. 그가 있을 때의 정도맹은 사도련을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렀거든. 그러자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 거지.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위업을 남기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마교 정벌에 나섰다.”

철중구의 말을 듣던 여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파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구나.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냐. 전대 맹주님이 명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개인의 욕심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만큼 어리석은 분은 아니었어. 그분이 신강을 넘은 건 마교의 준동 때문에….”

“정파에선 그렇게 이야기하겠지. 지들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인데 까내리기는 싫을 테니까. 너도 인정하지 않냐. 명성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고. 그거 때문에 천산에 쳐들어간 거다. 순진하긴.”

여규가 울컥했지만, 철중구는 못 본 척하고 말을 이었다.

“세속적인 인간이지만, 전대 맹주가 대단한 건 사실이었어. 그는 최전선에서 정도맹 타격대를 이끌며 마교의 방어선을 쳐부쉈다. 사파에게 속물적이라 욕하면서도 지들 이익에는 고리눈을 뜨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그의 검 아래 처음으로 똘똘 뭉쳤지. 그렇게 되자 단일 최강이라는 마교도 물러나기 급급했어.”

서책으로만 접한 정마대전을, 철중구는 직접 본 것처럼 풀어놓고 있었다.

본인은 단순한 싸움꾼이다, 자신의 일 외엔 관심 없다 말하지만, 그도 역시 어쩔 수 없는 강호인인 모양이었다.

당시의 일을 이토록 세세하게 꿰고 있는 걸 보면.

“천마와 칠대 장로가 천산을 내려올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던 시점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살수 하나가 정도맹의 본진을 헤집어놨지. 하룻밤 새 대주급 삼십 명의 목이 날아갔다. 다음 날엔 여섯 명의 장로가 목숨을 내놨어. 심지어 셋째 날엔… 한 명의 문주와 두 명의 가주가 숨을 거뒀지.”

지휘부가 마비될 정도의 타격이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정도맹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횃불을 밝혔다.

사신이 진영 내부를 거닐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살수의 최종 목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외곽에서부터 진영의 중심으로 다가오는 사신. 그의 목표는 정도맹주였던 거야.”

마른 비는 철중구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예상외로 그는 이야기에 소질이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재능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넷째 날 밤, 정도맹 무인들은 모두가 눈을 부릅뜬 채 경계를 섰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 초조한 시간만이 느리게 흘렀어. 검을 쥔 손에 경련이 일만큼 긴장이 극에 달했을 때, 멀리 민가에서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그러는 걸까.

철중구는 딱딱해진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마른 비도 덩달아 침을 삼켰다.

그런 둘을 보며, 여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어느덧 동이 틀 무렵이 된 거지. 무사히 밤을 보냈단 걸 깨달은 정도맹 무인들의 긴장이 스르륵 풀어졌어. 바로 그때!”

“……때!”

철중구가 주먹을 꽉 쥔 마른 비를 응시하며 천천히 말했다.

“진영 어딘가에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포착하기도 힘든 비명이 흘러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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