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당한 거야? 맹주가 당하고 말았어?”
마른 비는 철중구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왠지 모를 뿌듯함에 휩싸인 철중구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니. 맹주가 있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무인 한 명이 쓰러졌어. 숨통을 죄듯 점점 가까워지던 것과 달리 완전히 엉뚱한 곳이었지.”
“뭐야, 그게? 암습이 힘들 것 같으니까 도망쳤구나?”
마른 비는 김이 샌 표정이었다.
하지만 철중구의 말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살수계의 전설이라고 했잖아. 모두가 너처럼 생각했지. 이놈이 어렵다고 느끼고 도망쳤구나, 하고. 차 한 잔 마실 시간쯤 지났을까? 긴장이 풀린 사람들이 웅성댈 때였어. 갑자기 맹주에게 암격이 날아든 거야.”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다.
일출이 기지개를 켜기 직전.
어둠이 마지막으로 힘을 뽐내는 시점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몰라. 아무도. 음살의 살법은 밝혀진 바가 없다. 아무튼 놈은 말도 안 되는 걸 해냈고, 맹주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지.”
“세상에! 상대가 천하제일검이라며? 그게 가능해?”
“그래서 전설이라니까. 이야기의 절반만 사실이어도 이미 괴물이야.”
마른 비가 입을 헤 벌리며 말했다.
“뭐야. 그럼 그 사람이 제일 강한 거네? 천하제일검을 죽였으니까?”
음살의 대단함을 이야기하던 철중구는 그 말엔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럴 리가! 천하제일검은 검 쓰는 놈들 중에 최고란 뜻일 뿐이야. 천하제일인에 근접해 있는 건 맞지만, 가장 센 건 아니라고! 맹주를 쓰러뜨렸다고 해서 제일 강할 거라는 건 섣부른 추측이다. 그리고 암습이잖아, 암습. 정면 대결이 아니라.”
“정면? 자기 힘으로 맹주를 죽인 거 아냐? 그럼 그냥 그 사람이 더 강한….”
철중구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눈썹을 찌그러뜨렸다.
“강하긴? 살수 놈은 아무리 세도 인정할 수 없어. 비열하게 숨어서 칼이나 꽂는 것들이 무슨.”
“흠. 그래? 난 은신이나 암습도 싸움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돈 받고 사람을 죽이는 것만 아니라면야.”
마른 비는 자연스럽게 수리의 눈 전사들을 떠올렸다.
그믐이 특이할 뿐, 수리의 눈 전사들은 기본적으로 살수와 비슷한 방식으로 싸운다.
하지만 와족은 그들을 어엿한 전사로 인정한다.
힘을 사용하는 이유와 목적이 중요하지,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어떻게 싸우느냐는 자질과 선택의 문제라고 마른 비는 생각했다.
그즈음 조용히 있던 여규가 끼어들었다.
“음살은 전대 맹주님을 암습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도 무사하진 않았어. 맹주님의 반격에 치명상을 입었거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긴 것도 아냐.”
“어? 그럼 그 사람도 거기서 죽은 거야?”
여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호위무사들과 맹주님의 반격에 음살은 오른쪽 가슴이 꿰뚫렸어. 하지만 그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지. 마치 어둠에 녹아버리듯이.”
여규가 음살의 일화를 꺼낸 이유였다.
신출귀몰한 은신술과 살법의 유사성.
주원장을 노리는 암살자에 대해 듣자 자연스레 그자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맹주님이 쓰러지자 구심점을 잃은 정도맹은 흔들렸어. 심지어 음살마저 놓치고 말았지. 그들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 천마가 이끄는 마교의 돌격대가 들이쳤어.”
“이런! 위험했겠는데?”
“응.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아니었다면 정도맹은 그 자리에서 전멸했을 거야. 그들의 분투와 희생으로 간신히 후퇴할 수 있었지. 천마와 맞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었지만, 고수의 숫자는 정파 연합군이 여전히 우위에 있었거든.”
가장 최근에 벌어졌던 정마대전의 전말이었다.
음살은 그 이후 천하제일살수라 불리게 됐지만, 다시는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거라고 여겨지는 이유였다.
“그런데 실은 그자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주원장이란 아저씨를 노리는 것 같다, 이거지?”
마른 비의 말에 여규와 철중구는 침묵했다.
지금까지 줄줄이 떠들던 둘이 조용해진 것에 마른 비가 의아함을 느낄 때쯤, 여규가 말했다.
“정황상 의심은 가는데 내가 선뜻 믿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철중구, 이 사람이 너무 간 거 아니냐고 한 이유가 있어.”
모르겠다는 얼굴로, 여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거, 수십 년 전의 이야기거든.”
마른 비 일행은 막사를 나와 걷고 있었다.
호위 임무를 맡기로 했으니 우선은 주원장의 주변을 돌아보고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점검할 생각이었다.
기존의 호위들과 안면을 트는 일도 중요했다.
자신들 때문에 마찰이 생기거나 그들이 구성한 호위진에 방해가 되면 안 되니까.
앞만 보며 걷던 여규가 문득 말했다.
“이상한 게 있어.”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철중구는 기다렸다는 듯 재깍 대꾸했다.
“무력.”
“역시! 당신도 이상하게 느꼈구나.”
또 못 알아듣는 건 마른 비뿐이었다.
“우씨. 맨날 나만 몰라.”
여규는 울상을 짓는 마른 비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중원 무림의 이야기인데 비아 네가 모르는 게 당연하지. 기록대로라면, 마교의 인물답게 음살은 무력도 강했거든. 정면 대결로도 어지간한 대문파의 문주를 쓰러뜨릴 정도였어. 그런 인간이 절정의 살법까지 구사하니 당할 사람이 없었던 거야.”
“맞다. 표적이 천하제일검이었으니 양패구상한 거지, 오왕이란 사람은 강하지 않잖아. 서달이란 장군은 굉장하지만, 진짜 음살이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실패했다.
그래서 음살이 아닌가 싶었지만, 어둠에 녹아들 듯 사라지는 은신술은 그자 외엔 떠올릴 수 없다.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에이! 모르겠다. 맞닥뜨려 보면 알겠지. 진짜 음살이라고 해도 까짓거 때려잡으면 그만 아니겠어?!”
철중구는 이 이상 머리를 굴리는 게 버거워 보였다.
반면 여규는 강무재가 자신들을 데려온 이유를 추측했다.
“비아가 핵심이야. 당신과 나는 만약을 대비한 패일 거고.”
여규의 추측은 정확했다.
강무재가 기대를 거는 건 마른 비의 예민한 감각이었고, 여규와 철중구는 그저 예비 전력일 뿐이다.
그 짐작을 확인하듯 저 멀리 있는 주원장의 막사로 가는 길은 삼엄한 호위가 물샐틈없이 펼쳐져 있었다.
“왕궁에 있을 때는 여기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을 거 아냐? 이런 걸 뚫다니…… 미친놈이네.”
철중구가 기가 질린 듯 중얼댔다.
돌발 상황이 벌어진 건 그때였다.
“진짜다! 진짜 철중구야!”
“허어. 저 골 때리는 놈이 정말로 왔네? 부사님께선 무슨 생각으로….”
“아냐. 그래도 저놈이 실력 하나는 확실하지. 야투 최고의 투사 중 하나였으니까.”
난데없는 소란이 일었다.
고개를 돌린 곳엔 갑주를 걸친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중 하나가 투구를 벗으며 앞으로 나왔다.
“오랜만이군, 중구. 날 기억하나?”
사내의 어조는 신기하다는 느낌 반, 반갑다는 느낌 반이었다.
반면 철중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뭐야, 너? 나 알아?”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끄응. 기억 못 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서운하군. 예전에 야투에 출전했다가 너한테 두들겨 맞고 기절했던 곽포삼이다.”
“야투? 네가 야투에 나왔다고? 그런 놈이 왜 여기에? 아…!”
철중구가 뒤늦게 탄성을 터뜨렸다.
인재를 구하기 위해 야투에 침투했었다는 강무재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눈치로 보아 곽포삼이라는 사내 옆에 있는 병사들도 야투 출신인 듯했다.
“뭐야, 니들 다 투사로 나왔던 놈들이냐? 형씨한테 영입 제의받고 여기로 온 거야?”
“그래. 네가 왔다는 말을 듣고 구경 왔다. 장사에서 넌 유명한 놈이었으니까. 신기해서 말이지.”
얻어맞고 기절한 것치곤 곽포삼에게선 아무런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척이나 반가운 눈치였다.
그리고 그는 진심으로 축하를 건넸다.
“소식은 들었다. 사호 중 하나를 꺾었다면서?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투도라는 별호까지 붙었다고? 축하한다. 길바닥 출신 무지렁이가 강호에서 명성을 떨치게 됐구나!”
철중구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곽포삼은 무척이나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상.
재밌는 건 마른 비에게도 말을 건네 왔다는 점이다.
“야투가 박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마교가 개입했다는 소문부터, 투주가 투기장 밑에서 괴물을 키우고 있었다는 황당한 괴담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건, 엄청난 신성이 출현했다는 것이었어. 떡실신한 중구를 구했다는 남자가 너냐?”
“떠, 떡실…?! 너 이 새끼! 지금 실실 웃으면서 시비 거는 거지?”
철중구의 얼굴은 찌그러졌고, 마른 비는 깔깔대며 웃었다.
“하하! 떡실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런 소문이 났어? 아마 맞는 것 같은데?”
“아, 씨바. 쪽팔리게…….”
“오?! 정말인가 본데? 이 친구가 중구, 널 구한 거냐?”
야투 출신의 병사들은 놀라워했다.
그리고 철중구가 창피해하는 걸 즐기는 듯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만큼 마른 비에 대한 관심은 증폭됐다.
“어디 출신이냐? 남쪽에서 올라온 거야?”
“와, 이 친구 이거, 근육 좀 보게? 칼도 안 들어가겠는데?”
“싸움은 누구한테 배운 거냐? 스무 살도 안 된 거 같은데 어떻게 중구보다 강할 수 있지?”
철중구의 발작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강하긴 누가 강해! 붙어봐야 아는 거지! 내가 이런 코흘리개한테 질 것 같으냐? 감을 잃었나 본데, 나 철중구…!”
“붙어봐, 그럼.”
병사 하나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동료들한테 네 이야기를 많이 했다. 철중구라는 또라이가 하나 있는데 무지막지하게 세다고. 길바닥에서 큰 놈인데도 난다 긴다 하는 무인들을 씹어 먹는다고. 아무도 안 믿더군. 실력을 한 번 보여주는 게 어떠냐?”
어느새 그들의 주변엔 병사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게 마른 비 일행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당황한 건 철중구였다.
“어… 음…. 그게 말이지. 우리가 곧 저기 있는 왕한테 가봐야 하거든. 그래! 지금은 좀 바쁘다 이 말이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야투 출신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얼레? 이것 봐라? 천하의 철중구가 싸움을 피해? 강한 놈이다 싶으면 장사 반대편 끝까지 쫓아가서 시비를 걸던 놈이?”
“그러게? 눈알 흰자를 까뒤집고 혼자서 수십 명을 때려눕히던 놈인데?”
“야! 너 철중구 맞아? 가만, 이놈 이거, 겁먹었는데?”
‘……우라질. 이게 난데없이 뭔 상황이냐.’
조금 전까지 진지하게 음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호위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놈들이 싸움을 붙인다.
이놈들 말처럼 자신은 단 한 번도 싸움을 피한 적이 없다.
그런데… 눈을 껌뻑이며 웃고 있는 이놈과는 싸우기 싫다.
철중구는 울고 싶어졌다.
‘아… 좟 같네.’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희한하게 마른 비에게는 투지가 일지 않는다.
구명지은? 마음에 드는 놈?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지만, 누구보다 잘 안다.
도저히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라는 걸.
아니, 그런 건 상관없다.
자신이 언제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했었나.
그러면 투도라는 별호가 붙지도 않았겠지.
그냥 싸우기가 싫은 거다, 마른 비와는.
“야야! 중구! 널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한 우리가 뭐가 되냐!”
“한 번 붙어봐!”
‘아, 씨바. 몇 놈이 모여든 거야, 대체?’
지랄 맞게도 제대로 기세를 탔다.
물러나면 평생 겁쟁이 소리를 들을 상황이었다.
철중구가 깨지더라도 화끈하게 붙어버릴지를 고민할 때, 그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듣고 귀를 의심했는데, 진짜로군. 진짜 철중구야. 너 같은 망나니를 데려오다니, 부사님의 안목도 흐려진 모양이야.”
기가 질릴 정도로 장대한 전투마.
핏빛의 갑주를 걸치고 장창을 꼬나든 사내가 철중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