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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11화 (211/463)

211화

“음……. 지 부장…!”

곽포삼이 인상을 굳히며 말을 흐렸다.

그리고 철중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지태율. 마찬가지로 야투의 투사였다. 나는 몰라도 저자는 기억하겠지?”

곽포삼은 오만한 표정의 기병을 흘깃거리며 빠르게 말했다.

“그는 우리와 달리 뛰어난 힘을 인정받아 적색창기병에 편입됐어. 적색창기병은 원의 기병대를 제압하기 위해 창설한 최정예 부대다. 그는 거기에서도 대장의 눈에 들어서 부장에 임명됐지.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말이야.”

같은 야투 출신이라면 친밀감을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곽포삼의 어조에선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쁜 놈은 아닌데… 좀 재수 없어.”

그리고 또 한마디 덧붙였다.

“야투에서 제대로 붙었다면서? 짐작하겠지만, 중구 널 별로 안 좋아해.”

곽포삼은 철중구를 염려해서 열심히 설명했지만, 철중구는 듣고 있지 않았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꼼짝없이 마른 비와 한판 붙을 상황이었는데, 이상한 게 끼어들어서 끊어준 것이다.

철중구는 눈앞의 뻘건 놈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중구. 왜 말이 없나. 생각지도 못한 재회가 당혹스러운가? 하긴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지.”

지태율이 장창으로 철중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날은 모든 게 너에게 유리했어. 관객은 전부 너의 편이었지. 난 야투가 처음이었고, 넌 익숙했다. 그때의 난, 너처럼 저열한 도발을 일삼는 놈에 대한 면역이 없었지. 긴장과 흥분……. 난 평정심을 잃었다.”

안 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건지 지태율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모든 게 네 계획대로였어. 무공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저잣거리 막싸움에 쓰러질 줄이야……. 너 같은 놈은 무인이 아니다. 사호? 웃기지도 않는 소리! 또 잔머리를 굴려서 얻은 승리겠지.”

지태율이 열심히 떠들었지만, 철중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었다.

망신을 당하지 않아도 되겠단 생각에 그저 기분이 좋을 뿐이다.

그는 헤벌쭉 웃으며 지태율에게 말했다.

“아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아아주 고맙다.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야! 아는 척을 하는 걸 보니 만났던 모양이네? 너도 야투에서 왔냐?”

정적이 흘렀다.

무시당했다고 여긴 걸까?

장창을 겨눈 지태율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후, 후후후……. 또 잔머리를 굴리는 거냐? 네 몸에 검상을 남긴 나를 모른다고? 그런 어쭙잖은 도발은 더 이상….”

“응? 네가 내 몸에 줄을 그었다고? 나랑 싸웠었나 보네?”

철중구는 도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상의를 들췄다.

“어느 거? 이 중에 어느 게 네 거냐?

철중구의 상체엔 온갖 날붙이에 베인 상처가 가득했다.

거미줄처럼 종횡으로 파인 상흔은 그가 걸어온 역사이며, 철중구가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증명하는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익…!”

찾을 수 있을 리 없다.

기가 질릴 정도의 흉터를 보고 나니 자신이 남긴 상처는 별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철중구에게 아깝게 패했으며, 그도 자신을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친 강적으로 기억할 거라고 떠들고 다닌 게 떠오르자, 지태율의 얼굴은 갑주의 색만큼이나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 무인이 적에게 공격을 허용한 걸 부끄러워하진 못할망정 자랑처럼…!”

마른 비와 붙어야 할지를 고민하며 정신이 딴 데 팔려있던 철중구도 슬슬 상대의 적의를 눈치챘다.

말문이 막힌 지태율이 괜한 걸로 트집을 잡기 시작했지만, 철중구는 말발로 밀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개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네. 무인? 그런 건 너나 해라. 난 싸움꾼이지 무인 같은 거 할 생각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그리고 너, 창 안 내리냐? 기억에 없는 거 보니 최약체 새끼인 거 같은데, 뒤지게 처 맞을래?”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어디나 그렇듯이 주원장의 진영에도 기병과 보병 사이의 차별은 존재했고, 두 병과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있어 오늘 처음 본 마른 비보다 평소 으스대던 적색창기병의 젊은 부장이 곤욕을 치르는 게 백배는 재밌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어디나 그렇듯이 여기에도 싸움 붙이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자들은 존재했다.

“으엥? 지 부장! 저 친구한테 한칼 제대로 먹였다는 게 허풍이었소?”

“그러게! 난 그 말만 믿고 지 부장이 사호급인 줄 알았지 뭐야?”

“한판 붙어보쇼! 적색창기병의 촉망받는 부장 대 사파의 신성! 아, 물론 난 후자에 걸겠지만.”

‘이 땅강아지 새끼들이…!’

보병들이 작심하고 등을 떠미는 걸 모르지 않지만, 해놓은 말이 있는 데다 사실상 먼저 도발한 것도 자신이다.

철중구를 다시 보게 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뭉개서 자신이 받은 치욕을 곱절로 돌려주리라 이를 갈지 않았던가.

당연히 이길 자신도 있었다.

‘흥분하면 안 돼. 침착해라. 평정심, 평정….’

지태율의 치명적인 실수는 철중구와 눈이 마주쳤단 점이었다.

그는 헤벌쭉 웃고 있었는데, 지태율만 알아들을 수 있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크칵칵! 이런 등신. 너 잘 걸렸다, 이 새끼야.’

지태율의 이마에 푸른 핏줄이 솟았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그대로 기마에서 솟구치며 철중구에게 창을 휘둘렀다.

“으아아아! 죽어라, 이 새끼야!”

서슬 퍼런 장창이 내리꽂히는데도 철중구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응. 그런 걸로 나 못 죽여.”

부장이란 놈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날뛰는 꼴이라니.

몸놀림은 상당하지만, 싸움의 기본도 안된 놈이다.

자신이 야투에서 지태율을 얼마나 처참하게 두들겨 팼는지 기억 못 하는 철중구로서는 눈앞의 사내가 그저 한심했다.

“형이 싸우는 법을 알려줄게. 자, 봐봐? 피하고.”

부드러운 발놀림.

지태율의 창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기냥 냅다 까는 거야! 카하하하!”

쩌어엉!

사선으로 솟구친 발차기가 지태율의 가슴을 걷어찼다.

깔끔하게 들어갔지만, 철중구는 얼굴을 찌푸렸다.

“쩌어엉? 소리가 왜 이래? 설마 그거 통짜 철이냐?”

사방에 가득 찬 환호를 뚫고, 곽포삼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원의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한 특수 부대라니까! 기병은 물론이고, 말까지 전부 철갑을 입혀 놓은 애들이야!”

이래서 군대를 상대하기 힘든 거다.

갑옷을 걸친 것만으로 전신에 내공을 둘러친 것과 비슷한 효과를 얻는다.

내공의 소모 없이 무한정 유지되는 철포삼(鐵布衫)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달라질 건 없다.

이런 놈들이 진형을 짜고 달려든다면 답이 없겠지만, 하나라면 어려울 게 무엇이랴.

안면이나 관절의 가동 부위처럼 칼이 박힐 빈틈을 쑤시거나,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내부 장기를 흔들면 그만이다.

철중구는 손쉽게 이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크윽…!”

허공으로 튕긴 지태율은 몸을 뒤집은 끝에 가까스로 기마의 안장에 착지할 수 있었다.

한 대 얻어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철중구가 자신의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걸 깨달았다.

허나 죽었으면 죽었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그는 고삐를 휘어잡으며 전투마를 움직였다.

“하아앗!”

“히히히히힝―!”

주인의 명을 받은 말이 앞발을 들었다.

뒷발로 버티고 선 기마는 지태율의 몸을 더욱 높이 들어 올렸고, 그건 그에게 장창을 내리꽂을 최적의 거리를 제공했다.

인마일체(人馬一體)의 기병이 쏟아지는 햇빛을 가렸다.

“용쓴다, 용 써. 별 지랄을 다 하는….”

비웃으며 다가가던 철중구가 흠칫 멈췄다.

예상치 못한 위압감이 덮쳐왔기 때문이다.

기병을 상대한 적 없는 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

눈앞에 버티고 선 기마는 철중구의 예상보다 훨씬 장대했다.

“어? 야, 잠깐만. 씨벌, 뭐가 이렇게 높아?”

손발은 물론이고 칼도 닿지 않는다.

고개를 꺾어야 겨우 눈에 담을 수 있는 상대는 심리적 위축을 불러왔다.

‘기병이란 게… 원래 이렇게 큰 거야?’

철중구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킬 때, 전투마가 들어 올렸던 앞발을 내리찍었다.

장정의 열 배에 달하는 체중.

무인의 진각과 같은 발 디딤과 함께 하늘에서부터 장창이 내리꽂혔다.

“이런 우라질…!”

쩌저저정!

묵직하다.

아니, 묵직한 정도가 아니라 몸이 땅속으로 파묻힐 것 같은 강격이다.

기마의 체중에 철갑의 무게, 그리고 내공까지 더해진 일격은 철중구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망할…!”

정면으로 받은 게 실수였다.

악교익의 검에 잘렸던 힘줄 부위가 겨우 아물고 있었는데, 도로 터져 버렸다.

이건 무조건 흘렸어야 했다.

“멍청하구나! 철기병의 일격을 정면으로 받다니! 선 채로 죽어라!”

철중구의 표정을 본 지태율은 신이 났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할 뻔했는데, 이 한 방으로 승기가 기울었다.

창을 있는 대로 끌어당긴 그가 힘차게 외쳤다.

“차앗! 적창천공갑(赤槍穿孔鉀)!”

패애애액―!

갑주를 통째로 꿰뚫을 일격.

패력을 담은 찌르기가 철중구를 덮쳤다.

“염병! 최약체 새끼가 아주 신났구만?!”

치지지징―!

모로 세운 도가 창날을 흘린다.

기를 때려 부었음에도 지태율의 찌르기는 비켜내기가 쉽지 않았다.

철중구는 미련 없이 도를 놔버리고, 철창의 창대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띄웠다.

“무인이란 새끼들은…….”

마상으로 엄습하는 신형.

지태율의 눈이 커졌다.

“도통 무기를 안 놓더라고?”

빠아악!

무식하다.

철중구는 정말 무식했다.

통짜 철로 된 투구를 이마로 들이받은 것이다.

얻어맞은 지태율이 휘청했지만, 큰 타격은 없었다.

“이익! 이 무식한 놈이…!”

지태율이 고개를 돌렸을 때, 철중구는 눈앞에서 씨익 웃고 있었다.

“너 큰일 났다. 이 새끼야.”

빠아악!

안면이 드러난 투구의 틈.

철중구의 이마가 또 한번 작렬했다.

“크아~ 하하하하! 처 맞을 시간이다!”

철중구는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마구잡이로 보이는 주먹질은 한 방도 빗나가지 않고 지태율의 머리를 두드렸다.

철중구는 투구고 안면이고 가리지 않고 후려쳤고, 지태율이 낙마하자 그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까지 쫓아가며 구타를 계속했다.

피가 튀고, 주먹 위로 허연 뼈가 드러났음에도 철중구는 광소를 터뜨리며 때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투구가 완전히 우그러져서 지태율의 얼굴을 감쌀 지경이 되어서야 그는 멈췄다.

“뭐야? 기절했네? 역시 최약체구만?”

주위는 완전히 조용해져 있었다.

전장을 거친 백전연마의 병사들조차 기가 질린 표정으로 철중구를 바라봤다.

누가 봐도 저건 미친놈이었기 때문이다.

“비켜! 거기 비켜라! 당장 비키지 못할까!”

그때, 말발굽 소리와 함께 일단의 기병들이 당도했다.

지태율과 같은 핏빛의 갑주를 걸친 그들은 엉망이 된 동료를 보고 눈이 뒤집혔다.

“지, 지 부장!”

“이 새끼가 감히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부장을…!”

뒤늦게 당도한 그들은 상황을 알지 못했다.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빙 둘러싼 보병들 안에 홀로 쓰러져 있는 붉은 갑옷.

소란을 듣고 달려온 기병들이 오해하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차차차창!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

“감히 적색창기병대의 부장을 건드려?!”

삼십에 가까운 기병대가 검과 창을 빼들었다.

복식으로 미루어 볼 때, 호위를 위해 강 부사가 데려왔다는 외부인인 모양인데 아직 정식으로 임명된 건 아니다.

그리고 손님이건 나발이건 이건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마른 비 일행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한 달 전, 위험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그건 자신들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주군의 곁을 비웠을 때였고, 자신들이 복귀한 이상 상황은 달라질 터였다.

그래서 그들은 지태율을 상하게 한 철중구를 응징할 생각이었다.

그때, 무언가를 찾듯 눈살을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여규가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마른 비에게 눈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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