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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12화 (212/463)

212화

‘네 차례야, 비아야.’

안 그래도 나설지를 고민하던 마른 비는 즉각 반응했다.

철중구가 저만치 날아간 도를 움켜쥐고 다 덤비라고 고래고래 외칠 때였다.

적색창기병의 대원들이 소원대로 꼬치를 만들어서 죽여주겠다며 기마의 고삐를 잡아당기기 직전이었다.

『그만해. 거기까지.』

웅혼한 자연기를 담은 언령이 군영에 휘몰아쳤다.

거부할 수 없는 야수 제어의 숨결이 기병들을 내리눌렀다.

기병들은 일시적으로 육신이 마비되는 듯한 감각에 소스라쳤지만, 금세 회복했다.

무릎을 꺾은 건 기마들이었다.

“히, 히히히힝…….”

완전한 굴복.

기마들은 마른 비의 앞에서 마치 인간처럼 무릎을 꺾고 고개를 숙였다.

항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앞에 엎드리는 모양새였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고르고 고른 명마를 훈련시켜 길러낸 전투마인데.

아무리 고삐를 당기고 채근해도 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창칼과 화살이 날아드는 전장에서도 주인의 명을 따르던 말들이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만들어낸 당사자.

병사들의 이목이 한꺼번에 마른 비에게 집중됐다.

“싸움은 이쯤 했으면 싶은데.”

마른 비는 부드러운 눈길로 기병들을 둘러봤다.

적개심이나 전의 따윈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눈이었다.

하지만 그와 시선이 마주친 자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동시에 싸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하게 인다.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에 기병들이 당황할 때, 그중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우, 웃기지 마라! 지 부장을 저 꼴로 만들어 놓고서 그만하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저항하듯 장창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속박에서 헤어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내는 용기를 얻었고, 거세게 외쳤다.

“피에는 피를! 그것이 적색창기병의 신조다! 우리는 너희를…!”

“그래서, 기어이 싸우자고?”

마른 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저 한 걸음을 다가섰을 뿐이지만, 사내는 자신을 짓누르는 압력이 곱절로 배가된 느낌이었다.

“저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건 거야. 중구는 받아쳤을 뿐이고.”

‘중구? 저게 은근슬쩍 말을 까네?’

철중구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이 상황에서 발작하진 않았다.

“그, 그걸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이 많은 인원이 둘러싸고 있고, 아무도 말리질 않았잖아! 동료가 엉망으로 당한 이상, 우린 물러설 수 없다!”

사내는 힘겨운 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도 마른 비의 기세에 저항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마른 비가 말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최선을 다하도록 해. 나도 그렇게 할 테니까.”

마른 비는 사내에게 눈을 맞춘 채로 입술을 열었다.

“별비야.”

풍경이 갈라지며 백색 거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새하얀 포식자가 벗의 옆에 자리하니, 안 그래도 안절부절못하던 전투마들이 공포에 질려서 누런 오줌을 지렸다.

혼으로 이어진 일인일수의 자연기가 하나로 포개지는 순간, 강대한 기의 폭풍이 군영에 휘몰아쳤다.

“큭! 으음…….”

별비의 위용에 입을 떡 벌렸던 병사들은 갑자기 온몸을 짓누르는 무형의 기운에 저항하느라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중원으로 나온 지 수개월.

해를 넘기고 열아홉이 된 마른 비는 그 나이의 청년들이 지닐 수 있는 상식적인 힘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봐주지 않을 거야. 준비됐어?”

푸른 불꽃이 두 눈에 담긴다.

마른 비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지만, 괴의 화통달에게 받은 야생초는 거듭된 전투를 거치며 완전히 녹아서 그의 일부가 돼 있었다.

애뢰산 수직 동굴에서 얻은 자연기의 정수 또한 실타래에서 실이 풀리듯 올올이 풀려나가며 흡수되는 중이었다.

그걸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날, 마른 비가 어디까지 진화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해? 싸우자며? 자세 잡아.”

자세를 잡으라고?

손이 떨려서 창도 제대로 쥐고 있기가 힘든데?

햇빛을 희미하게 만드는 두 쌍의 푸른 광망.

마른 비와 별비의 눈빛은 대낮에 피어오른 귀화와 같았다.

삼십 명의 적색창기병들은 이를 악물었지만, 기세에 밀려 주춤주춤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저도 모르게 죽음을 떠올릴 때, 마른 비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만. 최정예를 자부하는 이들에게 너무 창피를 주면 곤란하네. 이쯤 하도록 하지.”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진 곳엔 화려한 갑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상황을 지켜본 듯했다.

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사내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그를 알아본 병사들은 절대 평온할 수 없었다.

“서, 서달 장군님?!”

화들짝 놀란 병사들이 일제히 물러나며 군례를 취했다.

바짝 얼어붙은 그들의 표정에서 ‘대체 언제부터 여기에?’라는 당혹감을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황하지 않은 건 여규뿐이었다.

‘역시 그랬나. 저기 계셨구나.’

지태율 혼자 난리를 피울 수는 있지만, 소란이 벌어졌는데 지휘자급이 나서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정식으로 호위에 임명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자신들은 강무재가 특별히 초청한 손님들이 아닌가.

심지어 기병 수십이 군영을 가로지르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는 건, 윗선에서 가만히 놔두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확률이 높다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시험.’

강무재가 데려왔다고는 하나 마른 비 일행은 일반 장병에 편입되는 게 아니다.

주원장의 지근거리에 머물며, 그를 지키는 호위.

언제든 왕에게 칼을 꽂을 수 있는 위치에 아무나 들일 리 없었다.

강무재가 추천했으니 사람은 믿는다고 쳐도, 실력이 모자란 이들을 옆에 두는 건 위급한 상황에서 혼란만 가중될 우려가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실력을 검증하는 과정을 거칠 거라고 예상했는데 돌발적으로 벌어진 지태율의 시비로 자신들의 실력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서달은 가타부타 설명 없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눈썰미가 좋군. 눈치도 빠르고. 자네가 일행의 두뇌 역할인가?”

서달과 여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화였다.

여규는 빙긋 웃으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대꾸했다.

“검 솜씨도 나쁘지 않습니다. 최소 중구 이상일 테니까요. 검증이 필요하시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서달이 있건 말건 철중구는 발작했다.

“으엉? 누구 이상이라고?! 이것들이 죄다 날 물로 보네? 나 중원 무림이 인증한 호랑이야, 인마! 그리고 너 이 코찔찔이 새끼! 올해로 열여덟 아냐? 어디 여덟 살이나 많은 형님 이름을 맘대로 부르고 지랄이야, 지랄이!”

철중구가 뭐라고 하건 여규의 시선은 서달에게 고정돼 있었다.

무시당하자 더 열이 뻗친 철중구가 한 판 붙자고 길길이 날뛸 때, 서달이 그에게 물었다.

“그리고 자네. 마음만 먹으면 지 부장을 훨씬 쉽게 이길 수 있었지. 왜 내가중수법을 쓰지 않은 건가? 주먹이 상하는데 왜 투구를 두드린 거지?”

철중구는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으엉? 그걸 질문이라고 하쇼? 그러면 얘 죽잖아. 깐족대서 다른 데 때리긴 싫고, 무조건 얼굴을 뭉개야겠는데 내공을 쓰면 골로 갈 거 아냐. 그러니 맨주먹으로 후드려 패야지 뭐.”

하는 행동부터 말투까지, 이놈은 정말 걸작이다.

서달은 여규와 철중구가 마음에 들었는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자네는…… 사실 자네가 가장 궁금했네.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도 정확히 가늠이 안 되더군. 직접 본 소감은… 놀라움을 넘어 경악이 일 지경이야.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힘을…….”

서달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경탄이 서려 있었다.

마른 비가 주먹 한 번 휘두르지 않고 모든 병사의 뇌리에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순간이었다.

밝은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의 반려수까지도.

“워낙 중대한 일이라 미리 허락을 구하지 않고 시험한 점, 양해를 구하네. 내가 떠나있는 동안 주군의 안위를 부탁하지. 부디 자네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주군을 암수로부터 지켜주기 바라네.”

정중한 사과와 진심이 담긴 요청이다.

손짓 하나로 수십만을 부리는 장군임에도 야인이나 다름없는 청년들에게 예를 다하는 모습에서 그의 됨됨이를 엿볼 수 있었다.

마른 비에게서 시선을 뗀 서달이 황망히 서 있는 적색창기병들에게 말했다.

“못난 놈들. 군의 최정예라는 놈들이 상대의 기세에 압도되어 주춤거리는 꼴이라니. 현 시각, 주군을 호위하는 인원을 제외한 전원, 기마 없이 군장을 완비하여 연무장으로 집합해라. 너희는 내일까지 잠잘 생각하지 말도록.”

“조, 존명!”

기병들이 널브러진 지태율을 들쳐 업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사방을 빽빽하게 메운 보병들은 마른 비를 보며 감탄했다.

“대, 대단하군.”

“칭찬에 인색하신 서 장군님께서 저런 평가를…….”

“아까 느꼈어? 난 손가락까지 마비된 것 같더라. 대체 뭐였지? 그게 투기라는 건가?”

병사들은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

목숨이 걸린 전장을 거니는 자들이라 뜬구름 같은 명성보다는 확실한 실력을 보이길 원한다.

마른 비 일행의 앳된 얼굴을 보고 반신반의하던 자들도 이번 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서달은 마른 비 일행을 시험하는 동시에 그들의 실력이 진짜라면 모두에게 인정받을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딱 한 명뿐이었다.

“아니, 씨발…? 피 터지게 싸운 건 난데, 저 새끼는 자세만 잡고 주목은 지가 다 받네? 내가 광대여, 뭐여?”

철중구가 툴툴댈 때, 마른 비가 다가왔다.

그리고 해맑게 웃으며 오른 주먹을 내밀었다.

“고생했어, 중구. 진짜 멋졌어.”

“어? 어어? 어… 뭐, 그래… 고맙다.”

툭-.

얼떨결에 팔을 들어 올린 철중구가 주먹을 맞부딪혔다.

고된 싸움을 치른 철중구와 기세만으로 기병들을 압도한 마른 비.

두 사내가 주먹을 맞대는 광경은 이색적이지만, 인상적이었다.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동작에 매료된 병사들이 너도나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와족식 간이 인사법이 중원의 남부에 유행하게 된 순간이었다.

“만약에 우리 이야기가 책으로 쓰인다면 말야.”

슬그머니 다가온 여규가 고생했다는 듯 철중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중구, 너는 절대 주인공은 되지 못할 것 같아.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주변 인물. 딱 그 정도?”

그 말만 남기고 여규는 마른 비를 따라서 가버렸다.

“그라라랑.”

별비 또한 수긍의 울음을 남기고 철중구를 지나쳤다.

혼자 남겨진 철중구는 눈만 껌뻑이다가 뒤늦게 의미를 이해하고 울컥했다.

“이… 조막만 한 새끼가! 니들이 뭘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이래 봬도 야투에서…! 야, 이 시발, 안 듣냐?!”

슬프게도 마른 비와 다닐수록 점점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장사의 쾌남, 중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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