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병사 삼십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대형 막사.
서달이 출입문으로 쓰는 천막을 걷으며 내부로 들어섰다.
“주군. 그들을 데려왔습니다.”
마른 비 일행이 서달의 뒤를 따라 들어섰을 때, 내부는 굉장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한 명 한 명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지닌 사내들이 진지한 얼굴로 커다란 지도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회의 중인가?’
여규의 생각이 맞았다.
자단목으로 짠 탁자 위에는 강소성 전역이 상세하게 그려진 전술 지도가 놓여 있었고, 군을 이끄는 장수들이 병사와 말, 배, 수레 따위의 형상을 한 목재 조각들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탁자에서 약간 떨어진 중앙, 호화로운 의자에 앉아 회의를 지켜보던 남자가 일행을 바라봤다.
“고생 많았소, 서 장군. 자네들, 잠시 기다려주겠나?”
부드러운 말투 속에 담긴 범접할 수 없는 위엄.
왕이라는 걸 알게 돼서일까?
처음 언덕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긴장이 된다.
주원장을 알현하게 된 여규와 철중구가 저도 모르게 몸가짐을 바로 했다.
“와~ 엄청 뜨거운데, 여기?”
태연한 건 마른 비뿐이었다.
그는 회의하는 모습이 신기한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주원장은 마른 비를 보며 웃은 뒤, 장수들에게 물었다.
“놈의 움직임은 어떤가?”
그 질문에, 장수들은 토론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무장들을 총괄하며 회의를 주도하던 남자가 답했다.
“예, 전하. 놈은 서 장군께 회안(淮安)을 빼앗기고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입니다. 소주(蘇州)에 틀어박힌 채 여전히 왕 놀음을 하고 있사옵니다.”
서른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장대한 기골을 지녔는데, 지태율과 같은 핏빛의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갑주의 장식이 훨씬 정교하고 화려한 걸로 볼 때, 적색창기병을 이끄는 수장인 듯했다.
‘흡…!’
그를 본 순간, 여규와 철중구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마른 비마저 흠칫하며 사내를 자세히 살폈다.
어마어마한 무의 냄새!
놀랍게도 서달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지닌 남자였다.
‘이런 자가 또 있어?!’
존재감 자체는 서달이 위일지 몰라도, 무력이라는 측면만 놓고 보면 서달보다도 강해 보인다.
마른 비 일행이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지? 저 사람?’
일행의 의문을 해소해준 건 서달이었다.
그는 마른 비 일행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군 최강의 무장인 상우춘(常遇春) 장군이네. 임무를 수행하고 막 복귀했지. 무림에도 상십만(常十萬)의 무명은 퍼져 있지 않은가?”
“상십만이요?! 저분이 그 유명한…!”
여규가 깜짝 놀라며 상우춘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끔뻑대는 마른 비와 철중구에게 상우춘에 관련된 일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게 십만 명의 군대만 주어지면 천하를 횡행할 수 있다!’
아직 무장으로서 크게 이름을 떨치지 못했던 시절의 상우춘이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
말이 십만이지, 혼자서 그 병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건 어지간한 대장군들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수십만, 때에 따라서는 백만 단위의 병력을 운용하는 원을 상대로 십만이란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상우춘은 신들린 듯한 지휘력과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들을 섬멸하여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
장수로서의 총체적인 역량은 서달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무력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를 뛰어넘으며, 조용하고 겸손한 서달과 달리 이목을 끄는 언행으로 널리 이름을 알린 남자가 상우춘이었다.
“허……. 유명할 만해. 더럽게 셀 것 같은데?”
철중구가 감탄한 듯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군문의 장수들을 우습게 봤었다.
군대가 무서운 건 전투 장비를 갖춘 다수의 인간이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데 있지, 개개인의 힘은 별 볼 일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인은 피 튀기는 전장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며, 생존을 위한 실전 무예를 터득한 인간들이었다.
그런 집단에서 고르고 고른 무장들이 약할 리가 없다는 걸 철중구는 비로소 깨달았다.
“왕 놀음이라……. 아직도 그러고 있는가? 진우량의 연합 제의를 거절했을 때 알아봤지. 그 시점에서 놈의 운은 다했다.”
주원장의 말이 마른 비 일행의 상념을 깼다.
상우춘이 부리부리한 호목을 번뜩이며 대꾸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그때 놈이 진우량의 손을 잡았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됐을 겁니다. 대범한 척하지만, 옹졸하고 소심한 자이지요. 심지어 정세를 읽을 만한 안목도 없습니다.”
상우춘의 말에 공감하듯 무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장 역시 묵직한 음성으로 동의를 표했다.
“장사성……. 한때 진우량과 가장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던 자가 이리도 허망하게 쇠락할 줄이야. 허나 방심하지 말라. 그가 거느린 병력은 여전히 만만치 않으니.”
“그렇사옵니다, 전하. 하여 평강(平江)을 포위하고 놈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세세한 진격로만 정해지면 강남을 제패할 준비가 끝나오니 명령만 내려주시옵소서.”
상우춘의 표정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주원장은 흡족하게 웃으며 그의 용맹을 치하했다.
“상 장군의 무용이 있는데 무엇이 두렵겠나.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마침 서 장군이 왔군. 함께 회의를 진행토록 하라. 난 강 부사가 초청한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어.”
주원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막사 안에 있는 장수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마른 비 일행에게 쏠렸다.
적게는 수천부터, 많게는 수만의 군세를 이끄는 장군들이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무장들의 눈빛은 범인이 받아낼 수준이 아니었으나, 마른 비 일행 중에 평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 청년은 탐색을 겸한 무장들의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무장들의 눈에 놀라움이 어릴 때, 상우춘이 고개를 돌렸다.
‘음…!’
상십만이라 했던가.
과연 이 남자는 다르다.
뒷모습만으로도 짐작은 했지만, 작심하고 시선을 쏘아오니 엄청난 압박감이 밀려온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노출되는 듯한 감각에 여규와 철중구가 흠칫 몸을 떨었다.
멀쩡한 건 마른 비뿐이었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빛 그대로 상우춘의 눈길에 정면으로 맞섰다.
맞섰다? 아니, 이건 포용이라는 표현이 맞다.
폭우를 담아내는 도도한 강줄기처럼.
마른 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상우춘의 기세를 흡수해버렸다.
“아직 시험할 게 더 남았어? 이왕 할 거 한 번에 해버리면 안 될까?”
‘허어…!’
옆에서 지켜보던 서달이 감탄을 삼켰다.
상우춘의 눈가가 미미하게 흔들렸으며, 주원장의 눈동자에도 빛이 스쳤다 사라졌다.
강무재가 천거한 사람이라도 검증 없이 호위를 맡길 수 없는 건 당연하기에 군 최고위직에 해당하는 두 사람이 주원장의 허락하에 일행을 살폈다.
그리고 마른 비는 서달에 이은 상우춘의 시험을 훌륭히 치러낸 것이다.
“…….”
상우춘은 말없이 무장들을 돌아봤다.
일부러 회의 중인 막사로 일행을 데려온 이유.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에게 직접 확인토록 한 것이다.
주군의 호위를 맡겨도 될 자들인지를.
끄덕.
장수들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전원 찬성.
상우춘이 작심하고 쏘아낸 기세를 태연하게 받아넘긴 시점에서 이미 이야기는 끝나 있었다.
“역시 강 부사의 안목은 대단하군. 초청해놓고 이리저리 시험한 점, 미안하게 생각하네. 내가 겁이 많은 탓이니 이해해주면 좋겠군.”
주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 말을 들은 철중구는 속으로 투덜댔다.
‘겁? 호랑이 면상을 후려갈길 것 같은 인간이 겁은 얼어 죽을…….’
그가 속으로 꿍얼댄 것처럼 주원장에게선 천명을 짊어진 자만의 대범함과 군림자의 위엄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요청을 받아주어 고맙게 생각하네. 장수들이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잘 부탁하지.”
주원장이 시원하게 웃으며 일행을 막사 밖으로 이끌었다.
바람이 뺨을 스치는 언덕.
군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잠깐 사이 더욱 불어난 병력은 출진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실감케 했다.
자신의 이름 아래 집결한 대군세를 조망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천하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내가 말했다.
“장거리 이동에 난데없는 호위 요청까지. 정신이 없었을 것 같군. 내게 따로 묻고 싶은 건 없는가?”
전쟁에 돌입하면 이런 여유도 없으리라.
요컨대 이건 주원장이 자신을 지켜줄 이들에게 허락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문답이었다.
마른 비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인간이 싸움을 벌이는 거, 중원에 나오기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야. 그래서 묻고 싶어. 아저씨가 싸우는 이유는 뭐야?”
질문이 의외였던 걸까?
주원장이 이채로운 눈길로 마른 비를 돌아봤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고, 여규는 나름대로 답변을 예상했다.
‘한족을 원의 압제에서 구하겠다는 식의 답변이 나오겠지. 오왕 님은 곽자흥의 수하로 들어가는 걸로 시작했다고 했어.’
곽자흥(郭子興)은 백련교도를 주축으로 한 홍건적의 수장이었고, 그 뿌리는 반원 농민군이었다.
주원장은 그 세력을 계승했으며, 송나라 황실의 후예를 자처하는 소명왕(小明王) 한림아를 옹립하기도 했다.
그래서 여규의 추측은 충분한 타당성이 있었다.
“이유? 간단하지 않나. 나 자신을 위해서다.”
하지만 주원장은 한결 편한 말투로, 여규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을 내놓았다.
“난세는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자들에게 끔찍한 절망을 주지만, 동시에 특별한 희망도 안겨주지. 언제나 그랬어. 난 부와 명예를 원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전전하며 언제 죽을지 모를 삶을 청산하고 싶었어.”
대의. 그리고 명분.
고래로 세력을 일으킨 자들이 반드시 취해야만 하는 덕목이다.
하지만 주원장은 그런 통념을 비웃듯 개인의 입신양명을 언급했다.
“다행히도 내겐 재능이 있었지. 그걸 기반으로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위치까지 왔다. 대의? 명분?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그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무기처럼 대외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여규가 아는 서책 속의 영웅들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답변이었다.
하지만 주원장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생존에 대한 절실함과 풍요로움을 향한 욕망이 나를 키웠다. 핍박받는 한족을 구원하고 중화를 회복하는 것?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은 내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일 뿐이야.”
여규는 뜨악한 얼굴이었고, 철중구는 감명을 받았다는 표정이었다.
마른 비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주원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지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제왕적 권력! 그걸 위해 난 천하를 제패할 것이다. 진우량을 무너뜨렸듯 장사성을 짓이길 것이야. 그리고 중원으로 나아가 원을 몰아내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고야 말겠다.”
주원장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하지만 굉장한 힘을 담고 있었고, 강철 같은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건 마치 천하를 논하는 자라면 이러해야 한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 제1원칙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과 대대손손 이어질 나의 핏줄들을 위해서야. 그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며, 지금 이 순간, 내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유다.”
착각일까?
한순간 온 천하가 고요해지는 듯했다.
시끌벅적한 군영의 소음이 주원장의 목소리에 먹혀버린 듯이.
짧지만 강렬한 답을 내놓은 남자가 평온하게 웃었다.
“어떤가? 답변이 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