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14화 (214/463)

214화

“응. 충분히.”

마른 비가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주원장이 마른 비에게 물었다.

“답변을 듣고도 호위를 수행할 마음이 드나?”

마른 비는 잠시 침묵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한동안 묵묵히 서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난 복잡한 건 몰라. 그저 내가 아는 건 지금 힘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을 힘들게 한다는 거야. 그들은 상대의 의견을 듣지도 않은 채 목숨을 빼앗고 억압했어. 그건 분명 잘못된 거야.”

중원 태생이 아닌 이족의 아이.

중원에 진입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열아홉 청년이 난마로 얽힌 천하 정세를 온전히 읽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게 있다.

옳고 그름.

마른 비가 보기에 현재의 지배층인 원의 처사는 옳다고 보기 힘들었다.

“자네는 순수하군.”

마른 비의 올곧은 눈빛을 확인한 주원장이 말했다.

“그 나이에 마땅히 가져야 할 덕목이야. 난 그러지 못했지만,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다네. 그리고 난 거짓된 말로 자네의 순수함을 이용할 마음이 들지 않는군.”

주원장은 잠시 말을 끊고 입술을 축였다.

“솔직히 말하지. 내가 만들 세상은 다를 것 같은가?”

답변을 기대하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고, 주원장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아니.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난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보고, 듣고, 경험했지. 내가 느낀 인간의 속성은 지극히 단순해. 약육강식.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집어삼키고, 희생시켜서 번영하지. 자신의 생존과 욕망을 위해서. 장담컨대, 그건 결코 변하지 않을 인간의 본능이야.”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그건…!”

여규가 울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렇다면 인간이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인가.

수천 년에 걸쳐 쌓아 올린 찬란한 문명.

그 안에는 법, 제도, 사상, 종교 등이 포함되며, 그것들은 인간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태초에 짐승과 다를 바 없었던 인간이 그것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이유.

여규가 느끼기에 주원장의 말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원장은 가만히 손을 들어 여규를 제지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네. 난 인간이 오랜 세월에 걸쳐 얻어낸 결실을 부정하는 게 아냐. 그것들로도 가릴 수 없는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이야기하는 거지. 난 그게 현실이라고 보네. 그리고 난 달콤한 이상보단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는 게 보다 나은 답을 내놓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지.”

거기까지 말한 주원장은 다시 마른 비를 바라봤다.

“힘, 재물, 권력, 핏줄, 지식……. 가진 자가 그렇지 못한 자를 착취하고 지배하는 구조는 쉽게 변하지 않을 거야. 좀 더 세련되고 정교한 방식으로 진화할 뿐이지. 약자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억누르기 위해서. 지금 우리의 존재가 증명하듯 노골적인 억압과 착취는 약자들의 단결과 저항을 불러오니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주원장의 말을 경청하던 마른 비가 물었다.

“다를 게 없다……. 정말 솔직한 말이네. 그럼 아저씨는 아저씨가 세울 나라에서 힘을 가진 자들이 약자들을 입맛대로 다루는 걸 두고 볼 생각인 거야? 그게 인간의 본능이고 현실이니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주원장의 답변 여하에 따라 그를 지키는 일에 회의가 들 수도 있는 물음이었다.

주원장은 순수함을 간직한 눈을 직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를 거다.”

“……?”

“인간의 본능이 그러한 이상, 내가 만들 세상에서도 같은 일들은 여전히 벌어지겠지. 하지만 지금과는 분명히 다를 거야.”

“왜?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

“내가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이 역시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여규가 눈을 크게 뜨는 사이, 주원장의 말은 이어졌다.

“법과 제도의 개혁. 기강과 질서를 세우기 위한 규율. 치안의 확립과 윤리의 반포…….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단행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길 경우 가해지는 엄격한 단죄. 그것은 위에 선 자들이 밑에 깔린 이들을 짓밟는 걸 막는 안전장치가 되겠지.”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법률과 제도를 통한 개선은 역대 모든 왕조가 시도했던 방식이었다.

중요한 건 법제가 추구하는 방향과 그걸 시행하는 자들의 부패 여부, 그리고 통치자의 의지였다.

주원장은 여규의 우려를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다. 나의 자식들이 제왕적 지위를 누리길 바란다. 내가 세울 제국이 영원하길 원한다. 그러려면 나라의 근간이 되는 민초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지. 즉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 나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뜻이다.”

주원장은 고개를 돌려 발아래 펼친 군영을 내려다봤다.

“나는 나의 지위를 위협하는 자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그 대상은 먹고사는데 급급한 민초들이 아니야. 그들을 살찌우고, 그럼으로써 제국에 대한 지지를 굳건히 다진다. 그렇기에 다르리라 확신하는 것이야.”

자신을 향한,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대한 투철한 믿음.

길바닥의 비렁뱅이로 시작한 인생이다.

난세를 겪으며 군웅으로 성장한 사내는 천하를 다스릴 통치자로서 나름의 답을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현실을 모르는 이상은 허황되고,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꿈은 공허하다. 난 참혹한 현실을 알며,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인내했지. 지난 십 년, 나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견디며 웅크린 채 때를 기다렸어. 그리고 지금, 비로소 ‘나의’ 제국을 건설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오랜 세월, 천하를 노려온 사내가 비상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이름 아래 수만의 군세를 집결시킨 남자가 하늘을 움켜쥘 듯 주먹을 그러쥐며 말했다.

“나는 황제가 될 것이다.”

다른 이가 뱉었다면 코웃음 쳤을 말이지만, 곧 현실이 될 것만 같은 예감에 전율이 일어난다.

그 말이 지니는 무게에 압도된 청년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후아……. 뭔가 엄청난 순간을 목격한 것 같은 기분인걸.”

대화를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

여규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철중구는 여운이 남는 듯 자꾸 뒤를 돌아봤다.

“저런 남자가 있다니……. 솔직히 처음엔 약해 보여서 실망했거든. 근데 볼수록 커지더니 아까는 말도 제대로 못 붙이겠더라. 힘이니 뭐니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뭐랄까, 인간으로서의 그릇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왕이란 건 다 저런 인간들인 건가.”

철중구는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었다.

그는 주원장을 본 소감을 그다운 말투로 짤막하게 표현했다.

“존나 멋있네.”

반면 여규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주원장의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 그러기 힘들다.

철저하게 현실에 발 디딘 욕망의 발현.

주원장은 어정쩡하게 대의를 외치는 이상론자들보다 훨씬 탄탄한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범접 불가능한 힘과 절대적인 권력을 기반으로, 나 자신을 위해 무법이 판치는 걸 막는다.’

그것은 곧 민초들의 삶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흐를 터였다.

지극히 원초적인 접근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현실성이 높은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어떤 이론과 사상보다 그럴듯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근원적인 거부감 때문에 여규가 고민할 때, 마른 비가 말했다.

“무서울 정도로 솔직한 사람이네.”

그리고 솔직할 수 있는 자신감과 그를 뒷받침할 힘을 지닌 남자였다.

여규가 마른 비에게 물었다.

“어때? 원하는 답을 얻었어?”

필연인지, 우연인지.

연속된 일련의 사건들 끝에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하필 도착한 곳이 천하를 진동시킬 태풍의 진원지였다.

그 태풍을 일으킨 당사자와의 대담.

여규는 소중한 친구의 호기심이 충족됐길 바랐다.

“글쎄. 잘 모르겠어.”

마른 비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굉장히 인상적인 사람이라는 점이야. 감탄하기도 했어. 같은 순간을 살아가지만, 각자가 보는 풍경은 정말 다르구나, 하고.”

천하를 논하고, 시대를 움켜쥐려 하는 위정자로서의 삶.

사내로서 절로 가슴이 뛸 만큼 멋진 일이지만, 그게 자신의 길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마른 비는 주원장의 본심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그가 내보인 진심에 응답하기로 했다.

“저 사람이 만들 세상이 어떨지는 누구도 몰라. 그저 지금보다 나아질 거란 기대로 나아가는 거겠지. 나는 어려운 건 잘 모르지만, 역사란 건 그렇게 조금씩 발전해온 게 아닐까? 여기 모인 사람들도 그런 기대로 저 사람을 따라온 걸 거야.”

마침 출정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회의를 마친 장수들이 주원장의 곁에 자리하고, 난세의 군웅이 그의 이름 아래 집결한 이들을 둘러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만의 병사들 앞에 선 남자가 역사에 기록될 행보를 시작했다.

“중화를 회복하기 위한 여정을 재개한다. 그대들의 칼이 새 역사를 쓸 붓이 될 것이며, 우리의 걸음이 창대한 제국의 초석이 되리라.”

대기를 녹여버릴 듯한 열기.

남자는 열망과 기대로 뒤엉킨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전군. 출진하라.”

하늘과 땅을 뒤엎을 함성이 터졌다.

주원장은 흔들림 없이 서서 열화와 같은 성원을 온전히 감당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른 비가 말했다.

“규, 중구. 저 사람, 지켜주자.”

“처음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주군.”

수만의 군세가 꿈틀대고 있었다.

동쪽을 향해 나아가는 군대를 바라보는 주원장에게 목소리가 들렸다.

“굳이 본심을 내비치지 않으셔도 될 일이었습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런 형체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목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주원장은 진군하는 병사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수만 군세의 정점에 선 위치.

어느 순간부터 진심을 드러내는 일은 금기로 여겨졌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청년에게 본심을 내보인 것은.

“건우라고 했던가? 그 이족 청년. 그 친구의 눈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말이 술술 흘러나오더군. 묘한 매력을 지닌 사내야.”

“…….”

사람을 옆에 두기보다 아래에 두고 다스려야 하는 군주의 입장.

어쩌면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웅대한 포부를 위해 달려왔지만, 그럴수록 타인과의 관계는 삭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보고 모여든 자는 헤아릴 수 없지만, 진심을 터놓을 이는 서달이 유일했다.

허나 군신 관계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달에게도 점점 말을 아끼게 됐다.

그리고 패업에 가까워질수록 그건 더욱 심해질 터였다.

‘어쩌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군.’

언제 또 이렇게 가감 없이 진심을 터놓을 수 있을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올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이르면 달라질까?

마른 비 일행의 생각과 달리 주원장은 솔직해선 안 되는 삶을 살아가는 이였다.

“실력은 어떤 것 같던가?”

상념을 삼킨 주원장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지키는 호위무사에게 물었다.

“믿기지 않는 수준입니다. 저를 포함한 칠영(七影)의 위치를 모조리 눈치채더군요. 실제 무력은 두 명의 장군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만은 두 분 이상입니다.”

“대단하군.”

여규와 철중구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마른 비는 주원장과 대화를 나누며 주변에 숨어 있는 비밀 호위들을 감지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음을 은밀히 내비쳤다.

칠영의 수장은 경악을 삼키면서도 그가 호위를 수락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주군을 노리는 암살자는 단 한 번의 습격으로 십이영이었던 그들을 칠영으로 줄여버릴 만큼 가공했으니까.

“상 장군이 적색창기병의 정예들을 남겼고, 호위들도 엄선한 자들로 배치했습니다. 전과는 다를 겁니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암살자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일이 편해지겠지.”

칠영의 수장은 장사성과의 전쟁이 무사히 끝나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바람을 비웃듯 병사들이 출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칼날이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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