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한 달 전의 일, 들었지? 정신 똑바로 차려라! 지금이 주군에 대한 방비가 가장 허술한 시기다!”
핏빛 갑옷을 걸친 남자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시퍼런 멍이 빠지지 않아 푸르뎅뎅했고, 이빨도 몇 개나 나가 있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했고, 내뿜는 기세는 전보다 더욱 단단했다.
단지 심각하게 모양이 빠질 뿐.
그는 철중구에게 호되게 얻어맞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지태율이었다.
“지 부장,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네.”
“그러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좌절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실력만큼 정신력도 나쁘지 않구만.”
지태율이 지나가자 적색창기병의 정예들이 수군댔다.
그들은 왕궁 외원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병사들이 장사성과의 전쟁을 위해 출진하자 상대적으로 허술해진 주원장의 호위 임무에 투입된 자들이었다.
엉망이 된 지태율은 참전하지 못했고, 그 바람에 이곳에 남게 됐다.
그리고 그는 모두의 우려와 달리 눈을 뜨자마자 만신창이가 된 얼굴 그대로 달려와서 경계에 임하는 중이었다.
‘나의 부족함 때문이다. 스스로의 실력을 과신한 데다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당해도 싸지.’
커다란 계기를 통해 사람은 변한다.
그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때도 많지만, 사람에 따라 긍정적인 쪽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경우도 있는 법이었다.
다행히도 지태율은 후자였다.
그는 철중구에게 처참하게 깨진 후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봤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우쳤다.
‘이번 일을 통해 거듭난다.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고, 겸손해야 해. 더욱 실력을 쌓아 나를 성장시킨다!’
지태율은 주위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임무에 집중하며 스스로를 다잡고 있었다.
“지 부장……. 창피할 텐데 대단하구만. 나 같으면 죽고 싶었을 거야. 이렇게 된 이상 그자와 마주치지만 않았으면…… 엇?!”
역시 ‘그자’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도를 어깨에 걸친 사내가 외원의 입구를 지나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었다.
자칭 장사의 쾌남이자, 타칭 중원이 인정한 호랑이, 중구였다.
“으엉?”
“으음…….”
얄궂은 일이다.
하필이면 여기서 마주치다니.
철중구와 지태율은 서로를 보는 순간 멈춰 섰다.
그리고 말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주변에서 둘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 짧은 침묵이 못 견디게 불안했다.
“여어~ 깼냐?”
철중구가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렇게 끝낼 인간이 아닌 게 문제였다.
“얼굴이 개판이네. 그러게 적당히 까불지 그랬냐. 왜 주제 파악을 못 해서 매를 버는 거야?”
침을 삼키며 지켜보던 사람들이 속으로 욕을 뱉었다.
저건 다시 한판 붙자는 도발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역시나 지태율의 얼굴은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성장, 성장…. 평정심, 평정…!’
찰나 만에 마음속으로 ‘참을 인’ 자를 수백 번 새긴 지태율이 겨우 인상을 폈다.
“일전에는 미안했다.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내 잘못이었어. 손에 사정을 둔 것, 고맙게 생각한다.”
지태율은 고개까지 꾸벅 숙였다.
철중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엇? 왜 이래, 이거? 죽다 살아나더니 부처라도 된 거냐?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찜찜하게 왜 이래?”
“아니. 진심으로 고맙다. 네 덕분에 눈이 뜨였어. 그럼 난 근무 중이니 먼저 가보마.”
지태율은 당당한 걸음으로 철중구를 지나쳤다.
얼굴은 엉망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가 승리자인 것만 같았다.
지켜보던 이들이 감탄을 뱉었다.
“지 부장, 갑자기 어른이 된 느낌인데?”
“패배하고 뭔가를 깨달았나 봐. 멋진데?”
철중구는 자신의 주먹과 지태율을 번갈아보더니 중얼댔다.
“갑자기 왜 저래, 저거? 역시 매가 약인가? 두들겨 패니 사람이 되는구만. 가만, 혹시 내 호랑이 기운을 나눠 받기라도 했나?”
철중구는 지태율이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소리를 태연히 늘어놓으며 내원으로 진입했다.
“나 왔다.”
“오, 왔어, 중구? 고생했어!”
여규가 손을 흔들며 철중구를 반겼다.
철중구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쥐똥만 한 새끼가 자꾸 중구, 중구 거리네? 너 인마, 언젠가 살풀이 한번 해야 쓰겄다.”
“나이 신경 안 쓴다면서? 그리고 비아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럼 친구 하기로 한 거 아냐?”
철중구는 더욱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놈은…! 아, 됐다. 몰라! 아무튼 걔랑 친구 먹었다고 해도 넌 왜 말을 놓는데? 난 너 인정한 적 없거든?”
여규가 저 멀리서 별비를 쓰다듬고 있는 마른 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이번엔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랑 비아는 친구. 너랑 비아도 친구. 그럼 너랑 나랑도 친구. 인정?”
철중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인정은 개뿔이? 내가 인마, 위대한 사파의 신성 아니냐. 너 정파지? 네가 칠룡이나 구파일방, 오대세가의 적전제자쯤 되면 내가 고려를 해보마. 그 정도가 아니고서야 이 몸과는 급이 안 맞는….”
“그래? 나 점창파 제자인데?”
철중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규의 입을 막기 위해 되는 대로 내뱉은 것인데 지가 점창파 제자란다.
철중구는 문득 꽤 오랜 시간을 지냈는데도 서로에 대해 물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규는 자신의 배경을 들먹이는 사람이 아니었고, 철중구도 그런 걸 궁금해하는 인간이 아니었기에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철중구를 보며 여규가 악동처럼 웃었다.
“장사의 쾌남은 한입으로 두말 안 하지? 아무렴, 사파의 신성이자 네 마리 호랑이 중 하난데 그러겠어?”
“그, 그거야 물론….”
“그럼 친구다?”
“…….”
제 무덤을 판 꼴이다.
어쩐지 코딱지만 한 게 검을 기막히게 쓴다 했더니 점창의 제자였나!
철중구는 이마를 짚으며 중얼댔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거든? 근데 이상하게 너희 두 놈을 만난 이후로 뭔가 죄다 말리는 기분이야. 그냥 느낌이 그런 건가?”
“응. 느낌만 그런 거야. 느낌 같은 느낌. 뭐, 그런 거? 중구, 넌 항상 잘하고 있어.”
칭찬인데 칭찬이 아닌 거 같은 오묘한 기분.
어느 순간 마른 비와 여규의 손바닥 위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철중구였다.
“돌아보고 오느라 고생 많았어. 바깥은 어때?”
만담은 여기까지.
여규가 낯빛을 바꾸며 진지하게 물었다.
군부의 무장들이 전선에 나간 지금, 시시각각 들어오는 보고를 취합하여 예기치 못한 일에 대응해야 하는 주원장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의 처소엔 밤에도 항상 횃불이 타올랐는데, 잠도 거의 자지 않는 듯했다.
그만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마른 비가 호위를 위해 주원장의 처소에 머무는 사이, 여규는 내원을, 철중구는 외원을 둘러봤다.
주원장의 처소로 침입할 수 있는 길을 특정해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여규의 예상대로, 철중구는 고개를 저었다.
“어렵다. 왕궁이라더니 징글징글하게 넓어. 외원에서 차단할 생각은 접는 게 낫겠어. 경비들이 빽빽하게 포진하고 있지만, 놈이 음살로 의심될 정도의 암살자인 이상 아무 의미 없다. 적색창기병과 엄선한 호위들이 있는 내원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여규도 같은 생각이었고, 그래서 동의를 표했다.
“맞아. 내원을 살피기도 벅차. 어차피 비아는 처소에서 벗어나지 않을 거고, 우리는 만약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비아를 보조하는 역할로 충분해. 단순한 무력이라면 우리 이상인 사람들도 꽤 되니까.”
구파일방의 기대주와 사파에서 손꼽히는 후기지수.
무림에 나간다면 어딜 가든 주목받을 만한 구성이다.
하지만 천하를 노리는 군왕의 진영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이 즐비했다.
호위들은 겉으로 보기에 간간이 대화도 나누며 여유롭게 경계를 서는 것 같지만, 기감을 사방에 퍼뜨려 물샐 틈 없는 방비를 펼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긴장의 완급을 조절하는 데 능숙한 고수들.
어딜 가든 실력으로는 밀리지 않으리라 자부했던 여규와 철중구는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맞다. 여긴 말 그대로 범의 아가리나 다름없어. 이런 곳을 비집고 들어온 놈이 있다는 게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호위무사 한 명 한 명의 실력도 상당하지만, 그보다 무서운 건 내원 전체에 걸친 호위진이다.
발을 디딜 모든 공간에 수 겹으로 중첩된 기의 그물이 침입자를 탐지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엔 평범한 정원이지만, 허락받지 않은 존재가 발을 들이는 순간 사방에서 날아든 검이 침입자를 분쇄하리라.
다시 한번 호위진을 면밀히 살핀 철중구가 작게 혀를 찼다.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비밀 호위도 일곱 명이나 있다면서? 이런 걸 뚫고 들어올 정도의 살수라면 그냥 목을 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경이롭구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해는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그때, 별비를 쓰다듬던 마른 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여규조차 떠올리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어. 별비랑 있다가 갑자기 든 생각인데, 아저씨를 노리는 암살자, 누가 보낸 걸까?”
“그거야….”
여규와 철중구는 대꾸하려다가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역천을 꿈꾸는 거대 세력의 수장이니까 당연히 표적이 되리라 여겼고, 암살자가 있다니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아니, 의문을 떠올리긴 했지만 막연하게 장사성의 진영이나 원 황실에서 보냈을 거라고 짐작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현재 그들이 의심하는 건 음살이었으며, 그는 마교의 일원이 아닌가.
듣고 보니 절대 가볍게 지나칠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게. 왜 그걸 그냥 넘어갔지?”
여규는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는 표정이었다.
철중구는 놀랍다는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너는 겁나 멍청하게 생긴 놈이 항상 핵심을 찌르더라?”
장사성이든 원 황실이든 마교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자신들은 현재의 천하 정세를 모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만약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 문제였다.
강호 역사상 마교가 엮여서 골치가 아프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물론 살수가 그들의 예상대로 음살이나 그와 연관된 누군가라는 가정이 맞을 때의 이야기지만, 여규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삼엄한 경비를 뚫을 만한 실력과 서달 정도의 고수가 코앞에서 놓칠 신법, 무엇보다 유령처럼 사라지는 은신술은 음살 외에는 떠올릴 수 없었으니까.
“모든 게 오리무중이야. 아무것도 예측할 수가 없네. 직접 잡아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나.”
여규가 중얼거리자 철중구가 면박을 줬다.
“아니지, 멍청아. 그런 놈이라면 만나지 않는 게 최선이야.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편하게 놀고먹다가 돌아가게.”
마른 비가 고개를 돌리며 하늘을 바라봤다.
해가 순식간에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게. 아무도 죽지 않고 끝났으면 좋겠어. 나도 오지 않길 바라.”
그 순간, 마른 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내원을 넘어,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는 외원의 북쪽 담장 부근이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철퍼덕 주저앉아 있던 철중구가 마른 비를 올려다봤다.
여규도 마른 비와 외원의 담장 쪽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무슨 일이야, 비아야? 뭔가 있는 것 같아?”
눈을 가늘게 좁힌 채 침묵을 지키던 마른 비가 한참 만에 입술을 열었다.
“……제길. 왔어. 놈이야!”
여규와 철중구가 기겁하며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