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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16화 (216/463)

216화

검은 그림자가 미끄러진다.

밤을 가른 어둠이 외원의 담장을 넘었다.

소리와 기척이 완전히 거세된 움직임.

그저 느껴질 뿐, 육안으로는 전혀 잡아낼 수 없는 잠입이었다.

스르륵―

그림자는 은밀했으며, 또한 고요했다.

그의 검 또한 주인을 닮아 미세한 소리도 흘리지 않았다.

침묵의 검은 담장의 벽을 따라 움직이는 경비병들의 뒤를 쫓았고, 흑색의 칼날이 긋고 지나간 곳엔 영문 모를 죽음만이 남았다.

어둠이 내린 밤, 사신의 손길을 따라 소리 없는 죽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스르륵―

담장 주변을 정리한 그림자가 외원으로 녹아들었다.

거침없이 전진하던 어둠이 멈춰선 건 목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킁! 오늘은 왠지 꺼림칙하구만. 느낌이 안 좋아.”

“꺼림칙은 무슨. 네가 언제 느낌 같은 걸 믿었다고?”

“이봐들. 밤이 시작됐어. 정신 차리자고. 예전에 침입했던 살수 놈에 대해 들었지? 절대 방심하면 안 돼!”

외원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대화였다.

원래 2인 1조였던 구성을 보강하여 지금은 어딜 가든 세 명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설렁설렁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눈은 사방을 훑고 있었고, 예리하게 끌어올린 기감으로 외원 구석구석을 살피는 중이었다.

“…….”

그림자의 눈이 주변을 훑었다.

한 달 전보다 몇 배는 강화된 경비는 섣불리 발붙일 곳이 없을 정도였다.

잠시 멈춰있던 그림자가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 건 경비병들이 움직였을 때였다.

“순식간에 어두워지는구먼. 불 밝힐게.”

외원 곳곳에는 횃불을 꽂을 수 있는 거치대가 마련돼 있었다.

원래는 없던 것인데, 지난 암습 이후 야간에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한 도구였다.

그 덕분에 지금은 주원장의 처소를 둘러싼 정원 전체에서 횃불이 타올랐고, 밤새도록 어둠이 깃들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화르륵―

경비병 중 한 명이 거치대에 횃불을 올렸다.

나머지 두 명은 자연스럽게 이동하여 서로의 등을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섰다.

세모꼴의 진형을 유지하며 서로를 살피는 동시에 둘일 때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한다.

동시에 다른 조의 위치를 항상 눈에 담는다.

치명적이었던 암습 이후, 만전을 기한 호위는 빈틈이 없었다.

분명 그래 보였다.

“…….”

그림자의 상부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사람이라면 얼굴이 있을 만한 위치.

아마도 눈을 가늘게 뜨며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했다.

그림자는 결정을 내린 듯 곧바로 어딘가로 이동했다.

아무런 기척도, 소리도 흘리지 않는 무음의 기동이었다.

그림자가 향한 곳은 횃불을 올린 경비조와 제법 떨어져 있는 또 다른 경비병들 쪽이었는데, 그쪽에도 삼각의 거치대가 보였다.

“뭐야? 저놈들은 불 안 올리나?”

횃불을 올린 경비병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댔다.

밤이 시작되었고, 어둠이 깔렸다.

각자의 판단하에 어느 한 곳에서 횃불을 켜면, 그걸 신호로 줄줄이 정원을 밝히는 게 경비대 사이의 약조이지 않나.

자신이 불을 피웠으니 옆에서도 슬슬 불이 올라올 때가 됐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저놈들, 왜 멀뚱히 있는 거야?”

어둠이 내린 정원.

사내가 바라본 쪽에는 그림자 세 개가 어른거렸다.

가장 가까이에서 경계를 서는 2조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거치대 주변에 서 있을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사내의 눈썹이 꿈틀댔다.

“……잠깐. 뭔가 이상해.”

사내가 왼손 엄지로 검을 밀어 올렸다.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한 그는 뒤를 슬쩍 돌아봤다.

따로 신호할 것도 없이 나머지 두 명은 반사적으로 이동하여 그의 등을 지키고 있었다.

딱딱 맞아 들어가는 호흡과 물 흐르듯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진형.

외원을 지키는 호위들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2조……. 세 명 모두 가만히 서 있기만 해.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이변을 감지한 사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궁금해서라도 그쪽을 쳐다볼 법도 한데, 나머지 둘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사내의 후방을 경계했다.

철저한 역할 분담.

사내는 자신의 등을 지키는 두 명의 동료를 위해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아. 2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다!”

화르륵―

그 순간, 횃불이 타올랐다.

잔뜩 긴장했던 사내가 근육을 이완시키고, 나머지 두 명도 작게 한숨을 쉬며 그쪽을 돌아봤다.

“뭐야, 저놈들? 괜히 사람 긴장시키고 있….”

스각!

날붙이가 무언가를 끊는 소리.

성대와 함께 목의 절반이 베인 사내들이 눈을 부릅떴다.

“그, 그륵…!”

고함을 지르려 했지만, 가래 끓는 소리 정도가 그들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였다.

그마저도 피거품이 차오르며 곧바로 끊겨버렸다.

목을 움켜쥔 경비병들이 무너져 내렸다.

스르륵―

그때, 사내들의 발밑에서 새카만 무언가가 다리를 타고 올랐다.

그림자? 어둠? 그도 아니면, 검은 환영?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은 쓰러지려는 사내들의 몸을 지탱했다.

축 늘어지는 경비병들을 받친 무언가는 그들의 몸을 곧추세웠고, 그대로 고정했다.

마치 경비병들이 스스로 서 있는 것처럼.

스르륵―

건너편에 서 있던 2조가 허물어진 건 그때였다.

엎어지던 경비병들은 지면에 닿기 직전에 멈췄고, 부드럽게 땅에 착지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조심스레 그들을 내려놓는 것만 같았다.

피슉―

스거걱!

짧은 시간차를 두고 외원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형체를 잡을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횃불에서 횃불로 이동하는 느낌이었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죽음이 피어났다.

침묵의 사신이 외원을 휘젓고 있었다.

“확실해! 살수가 외원에 들어왔어!”

마른 비가 여규와 철중구를 돌아보며 외쳤다.

“어느 쪽이야?! 북쪽 담장을 넘은 거야?”

“들어왔다고? 확실해?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곧바로 방향을 묻는 여규와 미심쩍어하는 철중구.

아직은 함께한 시간과 믿음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철중구도 마른 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기감을 끌어올리니 여기저기서 생명의 기운이 꺼지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해가 지자마자 치고 들어와? 염병! 성격도 급한 놈이네!”

철중구가 도를 뽑아 들며 외쳤다.

“아니야! 중구, 규랑 여기를 지켜! 내가 갈게!”

자연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려도 침입자의 위치를 잡았다가 놓치는 게 반복된다.

이 정도 은신을 구사하는 놈이라면 여규나 철중구의 능력으론 감지할 수 없다.

마른 비는 철중구를 멈춰 세우고 감각을 확장시키며 홀로 달려 나갔다.

내원을 넘어 외원에 당도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횃불들이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마른 비가 당도했을 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 어엇?! 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죽었어! 저, 저기도! 5, 6, 7조가 전멸했다!”

“살수다! 호각을 불어!”

시체를 보고 깜짝 놀란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일정 시간마다 정원을 둘러보는 순찰조가 암습을 당한 경비병들을 발견한 것이다.

마른 비가 끼어들기도 전에 살수의 침입을 알리는 호각이 울렸다.

‘반응이 굉장히 빨라!’

외원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대응은 민첩했다.

또한 그들은 경거망동하지도 않았다.

섣불리 지원을 한답시고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각자가 맡은 구역을 철저히 지키는 가운데 방어조의 투입을 기다린 것이다.

호각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 중앙과 입구에 대기하던 방어조가 신속히 달려왔고,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상황을 파악했다.

하나하나가 정련된 병사들이지만, 그들로서는 살수의 위치를 잡아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찾아야 해!’

마른 비는 야생에서 갈고 닦은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내원에 있을 때 점멸하듯 감지됐던 암기(暗氣)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어디야? 어디 있지?’

눈을 부릅뜨고 정원을 둘러보던 마른 비가 흠칫했다.

‘잠깐. 이런 놈이 외원에서 발각됐다고?’

무언가 이상하다.

한 달 전에 침투했던 살수는 외원은 물론이고 내원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주원장의 처소에 근접해서야 막강한 호위무사들을 지나칠 수 없어서 검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한 달 전보다 경비가 삼엄해졌다고 해도 그 정도의 은신술을 지닌 자가 외원에서 걸릴 리가 없었다.

마른 비의 고개가 내원 쪽으로 홱 돌아갔다.

‘이쪽은 미끼야!’

내원 쪽에 자연기를 집중시키니 그제야 끈적한 무언가가 희미하게 감지된다.

마른 비가 자연기를 눌러 담은 언령을 터뜨렸다.

『내원이야! 살수는 내원 남쪽에 있다!』

살수의 위치를 알린 마른 비가 다시 내원 쪽으로 몸을 날렸다.

스거걱!

투구와 갑주의 틈새를 노린 절묘한 암격.

목을 움켜쥔 적색창기병이 눈을 부릅뜨고 무너져 내렸다.

“언제 여기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외원에서 방금 호각이 울렸는데 어떻게 여기서 나타난단 말인가!

같은 조에 속했던 적색창기병이 검을 휘둘렀지만, 살수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 순간, 등 뒤에서 암습이 가해졌다.

푸욱!

“커헉…!”

갑주째 심장이 꿰뚫린 병사가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마치 형체가 없는 유령을 상대하는 기분이다.

내원을 지키는 적색창기병도 세 명이 한 조를 이루고 있었고, 남은 한 명이 반격에 나섰지만, 그의 눈은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으아아! 죽어! 이 새끼야!”

헛된 몸부림.

지금 휘두른 검이 인생의 마지막 한 수라는 걸 직감한 병사의 얼굴은 참담했다.

추아악―!

이변은 없었다.

땅에서부터 솟구친 검은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를 쪼개놓았고,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네놈이구나!”

세 명의 적색창기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격이 내리꽂혔다.

기마전이 아닌 걸 감안하여 짧은 단창을 소지한 지태율은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왔고, 혼신을 다한 일격을 내뻗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스아악―

어둠에 빨려들 듯 사라진 그림자는 단창이 지나가자마자 다시 나타났고, 흑색의 검을 그었다.

지태율이 병사들과 다른 점은 몸을 비틀며 즉사를 피했다는 게 전부였다.

“크학…!”

암검이란 몰래 숨어 있다가 치명적인 급소를 노려서 일격에 숨통을 끊는 게 아니었나?

무슨 놈의 암검이 철로 된 갑주를 통째로 양단한단 말이냐!

그러면서도 육안으로 잡기 힘들 만큼 빠르고, 아무런 소리도 흘리지 않는다.

‘빌어먹을. 이제야 겨우 상승의 경지를 엿볼 것 같았는데…….’

지태율이 속으로 욕을 뱉으며 쓰러졌다.

철중구에게 패하고 내부의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걸 느낀 순간, 왠지 발전이 있을 것만 같았다.

호위 임무가 끝나면 수련에 전념하려 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는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심장이 잘리는 걸 겨우 피했을 뿐, 왼쪽 가슴이 갈라진 지태율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

검이 빗나간 게 의외였던 걸까?

그림자는 잠시 멈춰 있었다.

하지만 금세 다시 움직였고, 지태율의 숨통을 확실히 끊기 위해 검을 들어올렸다.

그때, 도가 날아들었다.

쩌저저정!

“너 이 시커먼 새끼!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집어던졌던 도를 잽싸게 주워드는 사내.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서 달려온 철중구였다.

“불쌍한 애 건들지 마라. 걔 며칠 전에 나한테 처 맞아서 마음이 마이 아파.”

그의 옆에는 검을 뽑아 든 여규도 있었다.

“중구. 농담할 때가 아냐. 긴장해. 비아의 감각을 우회해서 들어온 놈이야. 우리 둘이 덤벼도 위험할 수 있어.”

“하! 웃기지 마라! 안 보이면 모를까, 눈에 담은 이상 절대 안 놓친다!”

검과 도.

점창의 검사와 야투의 싸움꾼이 어둠을 타고 온 암살자에게 나란히 무기를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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