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칠흑 같은 사내였다.
새카만 광택을 띤 잠행복과 복면도 그렇지만, 흘러나오는 분위기는 더욱 그랬다.
밤보다도 짙은 어둠이 인간 형상으로 응축된 느낌.
내원을 비추는 횃불의 빛이 사내에게 닿는 순간 소멸해버리는 듯했다.
“음살은 아니야.”
여규가 딱 잘라 말했다.
“그렇겠지. 음살이라면 꼬부랑 할배일 텐데 이놈은 젊잖아?”
철중구도 동의했다.
“…….”
칠흑의 살수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음살의 이름을 듣는 순간, 미세하게 고개를 기울였을 뿐.
“아주 그냥 죄다 새까맣구만! 음침해! 우울해! 졸라게 어두운 놈이야! 야, 인마! 너 친구 없지?”
어떻게 하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철중구는 그렇게 물었다.
당연하게도, 살수가 그런 아무 말 대잔치에 반응할 리 없었다.
“입이 없나, 혀가 없나. 말이 없어, 자식이?”
철중구는 저 혼자 툴툴대며 도를 고쳐 잡았다.
실없는 말을 늘어놓은 이유?
긴장을 풀기 위해서다.
직접 마주하고 보니 엄청나게 위험한 놈이란 확신이 들었으니까.
도를 쥔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내가 먼저 간다, 꼬맹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평소처럼 휘적대며 걸어가서 발차기나 날렸다간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이 날아가리란걸.
하지만 철중구는 철중구였다.
복잡하게 계산하거나 시간 따위 끌지 않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도를 휘두른다.
도에 내공을 있는 대로 때려 부으니, 적색의 도기가 어둠 속에서 솟구쳤다.
“이게 바로! 지상 최강의 남자! 태호천의 적사자도(赤獅子刀)다!”
“뭐라고?!”
철중구가 번개처럼 튀어 나가고, 깜짝 놀란 여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름은 사도련의 하늘, 패군의 본명이었으니까.
‘패군의 제자였어?!’
그럴 리가.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그 남자는 제자 같은 거 안 키운다.
장사 출신이고, 야투의 투사였다고 했으니 과거에 작은 인연이 닿았겠지.
철중구의 강함과, 그가 패군을 존경하는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익! 그런 걸 왜 지금 말하냐고!”
놀라는 바람에 따라붙는 게 한 박자 늦었다.
여규가 발을 뗐을 때, 철중구는 이미 살수와 부딪히고 있었다.
“카아아압!”
패력이 담긴 일도.
본인 말처럼 천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재력이 큰 것만은 확실하다.
철중구의 도기는 야투에서 악교익과 부딪혔을 때보다 한층 밀도 있고 단단해져 있었다.
붉은 살의가 살수를 집어삼킬 듯이 덮쳤다.
그그그긍― 푹!
“어?!”
하지만 살수의 경지는 그 이상이었다.
어둠을 두른 듯한 검날은 철중구의 도를 어렵지 않게 흘렸고, 그대로 찔러왔다.
악교익에게 베였던 힘줄 부위.
살수가 노린 건 철중구가 부상을 입은 곳이었다.
“아윽…!”
겨우 아문 상처에 또다시 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스악―
찌르고, 벤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동작인데 피하기가 힘들다.
철중구는 뒤로 벌렁 나자빠질 정도로 허리를 꺾고서야 간신히 검을 피할 수 있었다.
“……?”
살수의 눈에 순간적으로 의문이 스쳤다.
적중을 확신한 검이 빗나간 데에 대한 의아함.
철중구가 보기에 그건 ‘이런 놈이 어떻게 내 검을 피했지?’라는 뜻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반응은 뭐야? 건방지게…!”
그리고 그건 너무나 당연하게도 야투의 싸움꾼에게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잘 봐라! 피할 만하니까 피한 거다! 이 졸라게 음침한 새끼야!”
검권에서 몸을 빼내려던 철중구는 덜컥 멈췄고, 그대로 살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안 돼! 중구! 물러나!”
뒤쫓아 온 여규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철중구는 이미 눈이 돌아간 뒤였다.
후퇴? 그게 뭔데? 먹는 거냐?
이따위 반응을 보고도 물러나면 사내가 아니다.
철중구는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었고, 필살의 참격이 대기를 그었다.
“……!”
두 번째로 살수의 눈에 떠오른 건 놀라움이었다.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전부 내던지는 공격엔 너 죽고 나 죽자는 기세가 담겨 있었다.
받아내는 건 가능하지만, 그 후가 문제다.
뒤에 따라온 또 한 명의 청년.
이 저돌적인 사내에 못지않은 자였고,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우우욱―
살수가 택한 건 각개격파였다.
“아니?!”
사일검을 뻗으려던 여규가 주춤거리며 멈췄다.
철중구의 앞에 있던 살수가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규가 적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철중구의 참격이 허공을 그었을 때, 살수가 나타났다.
“어? 어엇…!”
그 자리 그대로였다.
살수는 철중구의 도가 지나간 후에 원래 있던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훅 꺼지듯 사라졌다가 어둠이 뭉치듯 나타난 살수를 보며, 철중구가 중얼거렸다.
“씨바. 좆 됐네.”
피피피핏―!
“크윽…!”
철중구가 할 수 있는 건 몸을 웅크리며 치명적인 급소를 막는 것뿐이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진다.
천만다행인 건 살수도 회피 기동 직후여서인지 큰 공격을 쏟아내진 못했다는 점이다.
아니, 그보다는 뒤에 있는 여규 때문이리라.
고개를 돌렸던 그는 살수가 나타나자마자 사일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만해!”
사일검의 엄청난 검속이 철중구를 살렸다.
살수는 공격을 멈추고 뒤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개…!”
그 와중에도 욕을 뱉을 힘은 있는가.
철중구는 엉망진창이었다.
급소를 피했을 뿐 검을 막은 팔다리가 너덜너덜했다.
하지만 그는 어이가 없어서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새끼,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코앞에서 사라지는 기묘한 회피술이야 그렇다 치자.
철중구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검을 맞은 부위가 전부 얼마 전에 부상을 입었던 곳이라는 점이었다,
‘악교익에게 당했던 상처들!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전부 그런 곳만 노렸어! 이게 말이 되나?’
힘줄이 잘렸던 부위도 그렇지만, 상처들은 당연히 옷에 덮여 있었다.
치열한 공방의 와중에 약해진 곳만을 골라서 노린다?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다고?
하지만 살수는 그렇게 했고, 그건 철중구의 이해 범주를 벗어난 것이었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할 때, 여규는 살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중구, 움직일 수 있어?”
철중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뒤늦게 몰려오는 통증에 신음했다.
“윽…! 움직일 순 있는데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다. 팔다리가 마음대로 안 움직여. 망할 놈이 누가 살수 아니랄까 봐 검 한번 기막히게 쓰네.”
필살의 일격이 빗나갔음에도 목숨을 건진 게 천운이다.
하지만 싸움을 지속하는 건 어려웠다.
이 정도 고수에게 근성만 가지고 덤볐다간 동료에게 방해가 될 테니까.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거면 됐어.”
여규가 사일검 특유의 자세를 취한 채 살수를 노려봤다.
승산? 조금 전의 상황을 보건대 솔직히 어렵다.
무공 자체도 밀리지만, 그보다는 형체를 잡을 수 없는 회피술이 문제였다.
어둠에 녹아들 듯 훅 꺼지는 기술은 상상해본 적도 없을 정도로 신묘막측했고, 가동 원리를 모르는 이상 잡을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수한 무공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여규는 검을 움켜쥔 채 살수에게 돌진했다.
극속의 찌르기가 쇄도하자 살수는 방어에 치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위를 점한 것 같지만, 여규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실낱같은 빈틈이 생기는 순간, 곧바로 무너지리라는걸.
‘지금이야!’
그렇다면 피하게 만든다.
어차피 회피술을 쓸 거라면 예측할 수 있는 시점에 쓰도록 유도한다.
속도가 아닌 파괴력에 집중한 일식.
사양무광 회천식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
노림수가 먹혀들었다.
살수의 눈에 경각심이 떠오른 순간, 놈은 회피를 시도했다.
빛이 명멸하듯 어둠이 껌뻑이고, 살수의 몸이 훅 사라진다.
찌르기가 빗나가자마자 측면에 나타난 적!
여규는 준비했던 후속타를 터뜨렸다.
“걸렸어! 이거나 먹어라!”
콰아아앙!
찌르기에 뒤따르는 내력의 폭발이 공간을 휩쓸었다.
예상하지 못했는가.
살수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여규의 검을 바라봤다.
‘잡았어!’
여규가 확신한 순간,
후우욱―
살수의 몸이 또 한번 사라졌다.
‘……?! 빌어먹을! 설마…!’
촤아아악!
아래에서부터 가슴을 가로지르는 검.
힘없이 공중에 떠오른 여규는 분한 얼굴이었다.
‘……연속 시전이 가능할 줄이야. 이런 건… 사기잖아!’
살수는 곧바로 따라붙었다.
검이 여규를 양단하려는 순간,
스르르륵―
풍경이 갈라지며 내원의 북쪽을 방비하던 아군이 도착했다.
“크허허헝!”
부아아악!
푸른 발톱은 적을 분쇄할 철퇴와 같았다.
기습을 당한 살수가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외치는 듯한 눈을 보며, 철중구는 대리만족을 느꼈다.
“봤냐! 이 어둑어둑한 새끼야! 그분이 우리 두목이시다!”
촤아아악!
처음으로 들어간 일격이다.
별비는 여규와 철중구가 건드리지도 못한 살수에게 부상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핑그르르 회전한 살수가 저 멀리 툭 떨어져 내렸다.
“키야아~! 오졌다! 흰둥 형님, 멋져부러!”
철중구는 희한한 언어들을 남발하며 환호했다.
가만히 놔두면 별비의 아우로 들어갈 기세였다.
끝났다고 생각한 그때, 살수가 벌떡 일어섰다.
“으엉? 뭐야? 그걸 맞고 살았다고?”
철중구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댔고, 별비는 앞발을 혀로 핥았다.
흰 털로 덮인 앞발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검치호와의 일전 이후 처음으로 보는 피였다.
“세상에……. 그사이에 반격까지? 저 새끼, 인간 맞아?”
칠흑의 암살자는 왼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발톱이 훑고 간 곳엔 다섯 줄기의 상처가 남았는데 생각보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복면 사이로 보이는 눈에 살의가 담기고, 어금니를 깨문 듯 천 부위가 일그러졌다.
그가 흑색의 검을 들어 별비를 겨눴다.
후우욱―
골치 아픈 회피술.
당연히 그건 기습용으로도 적합한 기예였다.
후방에 나타난 암살자가 검을 찔렀지만, 별비가 그걸 맞아줄 리 없었다.
“크하항!”
반전한 별비가 까불지 말라는 듯 앞발을 그었고, 파괴력에서 밀리는 살수는 이를 악물며 검을 회수했다.
후욱― 팟! 후욱― 파팟!
밤공기를 가르며 어둠이 명멸하고, 어둠과 대조되는 백색의 짐승이 적을 줄기차게 따라붙었다.
그제야 둘러본 내원엔 적색창기병의 시체가 열 구 가까이 널려 있었다.
자신들이 달려오는 잠깐 사이에 정예병들을 도살한 괴물.
고개를 저은 철중구가 부상당한 여규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지태율을 챙겼다.
“별비가… 이길 것 같아?”
여규가 힘겹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철중구는 둘을 보호하듯 앞을 막아선 채 답했다.
“엉. 우세해. 우리보단 세지만 흰둥이와는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다. 문제는 은신술과 살법이야.”
무지막지한 놈이지만, 음살이 아니란 것만은 확실하다.
그자라면 정면 대결로도 별비를 이겼을 테니까.
하지만 철중구는 뭔가 찜찜했다.
“유리해. 유리한데…… 왠지 저놈 저거, 여력이 있는 것 같은….”
그 시점에, 별비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제대로 걸리기만 하면 걸레 조각처럼 찢어놓을 텐데 맞추기가 힘들다.
별비는 공방의 와중에 자연기를 끌어올렸고, 회심의 한 방을 준비했다.
다리에 집중시킨 자연기가 극속의 기동을 시전하려는 순간, 암살자의 눈이 번뜩였다.
슈르르륵―
“크항?!”
새카만 어둠이 대지에서 기어올라 별비의 다리를 감쌌다.
별비의 몸이 덜컥 멈추고, 육중한 거체가 요동치듯 흔들렸다.
큰 기술은 실패했을 때의 반동도 큰 법이며, 그건 별비조차 어쩔 수 없는 섭리였다.
후우우욱―
흑색의 검에 어둠이 빨려들 듯 집약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강대한 기가 휘몰아쳤다.
스가가가각!
어둠이 빛을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