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커헝…!”
흩날리는 털.
비산하는 피.
고통에 찬 별비의 울음이 메아리쳤다.
“별비야…!”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여규가 소리쳤다.
억지로 일어나려는 그를, 철중구가 말렸다.
“괜찮아! 어깨에 한칼 맞은 것뿐이야! 생명에는 지장 없다!”
그 말처럼, 별비는 몸을 비틀어서 살수의 검을 비켜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기운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완전히 흘리지 못했을 뿐.
“대체… 저게 뭐지?”
철중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별비의 다리를 붙든 것을 살폈다.
“……그림자?”
그 이상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
내원을 비추는 횃불이 드리운 음영.
일렁이는 그림자에서 솟은 어둠이 별비의 발을 묶어놓고 있었다.
“괴상한 사술을…!”
갑자기 사라지는 회피술도 저것과 연관된 것이리라.
요술? 주술? 또는 새로운 마공의 일종인가?
살수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르륵―
살수는 별비가 벗어날 틈을 주지 않았다.
정면으로 달려들기에는 부담스러웠는지 우측으로 기동한 그가 급소를 노렸다.
별비의 부상은 가볍지 않았다.
검을 깊숙이 허용하는 바람에 쩍 벌어진 상처 사이로 허연 뼈가 보였다.
“크하앙!”
고개를 돌려 위협해보지만, 이빨이 닿지 않는다.
별비는 다리를 묶은 그림자를 힘으로 뿌리치려 했다.
뿌드드득―!
별비의 힘은 엄청났다.
몸을 속박한 그림자는 물론이고, 지면이 통째로 뜯어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살수는 놀랐는지 달려들다 말고 재깍 멈췄다.
“크르르앙!”
별비가 그림자를 뿌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살수는 황급히 손바닥을 펼쳐서 앞으로 내밀었고, 별비의 몸이 다시 지면으로 덜컥 끌렸다.
눈치로 보아 구속하는 힘을 배가시킨 모양이었다.
그는 위험해지기 전에 마무리 지으려는 듯 검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커허허헝!〕
그 순간, 별비의 포효가 터졌다.
언령과 유사한 울부짖음!
자연기를 꾹꾹 눌러 담은 포효가 터지자 별비의 몸을 중심으로 거센 충격파가 뿜어졌다.
살수는 누가 목덜미를 잡아챈 것처럼 허공으로 튕겨 나갔는데, 놀라운 건 징글징글하게 달라붙던 그림자가 눈 녹듯이 소멸했다는 점이다.
“크앙?!”
그림자를 부리는 당사자에게 타격을 줘서?
아니면 상단전과 중단전을 활용하는 와족의 언령처럼, 각성한 야수의 울음에는 특별한 힘이 담겨 있는 걸까?
당장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별비는 기회를 잡았고,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크아아앙!”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봐라.
푸른 눈 일족 고유의 기술.
지면에서부터 폭발한 섬광이 하늘로 솟구친다.
그건 마치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우 수십 개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포효에 휘말려 허공으로 떠올랐던 살수는 별비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됐고, 새하얀 빛이 어둠을 가르는 순간, 핏물이 터져 나왔다.
“됐어! 맞았다! 적중했어!”
철중구가 주먹을 꽉 쥐며 외쳤다.
별비가 선보인 기술은 철중구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강력했다.
그는 끝났다고 확신했지만, 살수는 징그러울 정도로 질겼다.
후아아악―!
살수는 피를 흩뿌리며 추락했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질 줄만 알았던 살수는 지면에 닿는 순간 어둠에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땅에 남은 혈흔으로 그가 부상을 입었다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허?! 저 새끼, 아직도 살아 있는 거냐? 뭐 저런 끈질긴 놈이…!”
쿠웅―!
철중구가 입을 다문 건 별비가 땅에 착지했을 때였다.
별비는 지쳤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는데, 원래 다쳤던 어깨의 반대편에도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당장 큰 움직임은 힘들 정도의 부상이었다.
‘미친…! 그 와중에 또 반격을 했다고?!’
상상을 초월하는 놈이었다.
이러니 한 달 전에 삼엄한 경비를 뚫고 주원장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었겠지.
더 큰 문제는 놈의 위치를 놓쳤다는 점이었다.
“별비야!”
그때, 최고의 아군이 도착했다.
북쪽 외원에서 시작해 정원을 가로지른 마른 비가 남쪽의 내원에 당도했다.
그는 곧바로 상황을 살폈고, 굳은 얼굴로 외쳤다.
“중구? 규까지! 그새 당한 거야?!”
살수의 경지는 호위를 담당한 자들은 물론이고, 마른 비의 예상조차 뛰어넘었다.
저번의 암습을 토대로 철저히 대비했는데 이런 피해라니!
지난 한 달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놈은 더욱 강해져 돌아온 게 틀림없었다.
“왔구만……. 잠깐인데 백만 년처럼 느껴졌다. 이제 쟤 좀 잡아봐.”
마른 비를 본 철중구가 안도한 얼굴로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여규와 지태율의 앞에 버티고 있던 그는 상당한 무리를 하고 있었다.
“걱정 마. 이제 안 놓쳐.”
일행을 확인한 마른 비가 살수를 찾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불안정하게 휘청이는 암기.
이 정도 거리라면 절대 놓치지 않는다.
마른 비는 횃불이 드리운 음영 어딘가를 노려봤고,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
동요가 느껴진다.
살수는 위치를 발각당한 걸 깨닫고 당황한 모양이었다.
마른 비가 거리를 좁히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비수 세 자루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 어?!”
마른 비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비수는 부상당한 일행을 노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걸 막을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철중구조차 탈진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른 비는 방향을 꺾어 비수를 앞질렀고, 튕겨냈다.
‘이놈, 설마…!
“소협!”
붉은 갑옷을 걸친 적색창기병이 칼을 뽑아 들고 달려왔다.
그를 필두로 수십 명의 병력이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외원과 내원의 수비를 담당한 자들이 포위를 위한 원진을 형성한 채 달려온 것이다.
판단과 시도는 좋았으나 적이 그들의 역량으로 잡을 수 없는 자라는 게 문제였다.
갑자기 기척이 늘어나니 그들은 마른 비의 감각에 혼란만 더해주고 있었다.
“아! 이런…!”
예상대로 살수는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일행을 공격한 거였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지만 두고 볼 수 없었고, 적의 위치를 놓쳐버린 마른 비는 탄식했다.
“미안해, 비아야.”
여규가 들것에 누운 채로 말했다.
마른 비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저었다.
“들었던 것보다 훨씬 엄청난 놈이야. 나랑 별비가 같이 있는데도 위치를 잡기가 힘들다니……. 어스름 아저씨보다 은신이 뛰어난 사람은 처음 봤어. 더 다치지 않고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야.”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던 철중구가 말을 보탰다.
“그러게 말이다. 이건 뭐 귀신 새끼도 아니고……. 살수란 놈들이 다 이런 건 아니겠지? 심지어 무공도 엄청나. 어디서 보낸 놈인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내, 외원을 통틀어 습격을 받은 사람 중 살아남은 건 여규와 철중구, 지태율 셋뿐이었다.
위중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방치할 순 없었고, 그들은 주원장의 처소에 딸린 간이 의원으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거기엔 쉴 곳과 만약을 대비한 어의들까지 대기 중이었으니까.
무엇보다 내, 외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호위무사들이 포진하고 있으니 안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저 안은 상대적으로 안전할 거야. 뒤는 맡기고 들어가서 쉬어.”
마른 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여규의 상처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가슴을 길게 베이는 바람에 지혈을 했음에도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목숨이 위급할 정도는 아니지만 더 이상 싸우는 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응……. 조금 쉬고 있을게. 조심해야 해, 비아야. 정말 위험한 놈이야.”
지금보다 훨씬 약했을 때, 와족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별다른 부상을 입지 않았던 여규다.
고작 살수 하나에게 이런 중상을 입을 줄이야.
여규는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마른 비를 걱정했다.
“걱정 마. 살수도 부상을 입었다며? 지금 병사들이 경계 범위를 좁히고 있어. 오늘은 그냥 지나갈지도 몰라.”
살수가 내원까지 침투한 이상 인원을 흩어놓는 건 의미가 없다.
적색창기병의 지휘 아래, 내, 외원에 포진한 경비병들은 주원장의 처소를 향해 모여드는 중이었다.
어차피 상대는 한 명이며, 서로 간의 거리를 바짝 당겨서 습격에 대비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여규와 철중구를 안으로 들여보낸 마른 비가 상처를 핥고 있는 별비를 쓰다듬을 때였다.
“큭! 적이다!”
“아악! 지, 지원을…!”
내원의 동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벌써 왔다고?!’
마른 비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별비의 기술이 적중했고, 바닥에 남은 혈흔으로 볼 때 놈은 작지 않은 부상을 입은 게 분명하다.
한데 그사이에 또 치고 들어왔다고?
별비도 콧잔등을 찡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를 지켜, 별비야! 나 혼자 갈게!”
마른 비는 같이 가려고 일어선 별비를 도로 앉혔다.
양쪽 어깨를 베여 거동이 불편한 이상, 놈을 쫓는 데 별비의 기동력을 기대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별비를 조금이라도 쉬게 하고, 이쪽에 머무르게 해서 놈이 움직일 공간을 한정시키는 게 나았다.
마른 비가 동쪽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어둠이 휩쓸고 간 뒤였다.
“윽…! 내, 내 팔…….”
“으으… 아파…!”
“그, 그림자가…! 어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당했어…!”
동쪽 내원에 포진했던 경비병들이 땅바닥을 뒹굴며 신음하고 있었다.
간격을 촘촘하게 좁혔음에도 당한 것이다.
지원 온 병사들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상처를 입었다면서 어떻게…!”
“이, 이놈은 불사신인가…….”
“……우리 힘으로는 주군을 지킬 수 없는 거야?”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목숨을 걸고 싸워보련만.
마치 형체가 없는 어둠에 사냥당하는 기분이었다.
전군에서 엄선한 호위병들의 사기가 꺾이고 있었다.
“아냐. 놈은 약해졌어.”
기가 죽지 않은 건 딱 한 명뿐이었다.
팔이 잘린 병사의 상처를 지혈하던 마른 비가 그들을 돌아봤다.
“생각해봐. 한 달 전에 놈에게 습격을 받은 사람 중엔 살아남은 자가 없다면서? 내원 남쪽의 싸움부터 놈이 표적을 죽이지 못하는 경우가 늘고 있어. 그게 뭘 의미하는 거 같아?”
병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내원 남쪽에서 살수와 부딪힌 건 자신들보다 월등히 강한 세 명이었으니 그렇다 치자.
조금 전의 습격 때는 살수와 검을 부딪칠 만큼 특출한 고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자가 많다는 것.
살수가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적이 강한 건 맞아. 하지만 절대 불사신 같은 건 아냐. 놈이 흘린 피를 봤잖아.”
마른 비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병사들을 넓게 훑었다.
“당신들은 차고 넘칠 정도로 잘하고 있어. 한 달 전에는 왕의 코앞까지 무혈로 침투했던 놈이 지금은 내원에서 막혀 있잖아. 당신들이 놈을 막고 있는 거야. 당신들이 있어서 왕이 무사한 거라고. 그러니 용기를 내. 같이 아저씨를 지키자.”
달변이라고는 하기 힘든 말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의 격려에는 묘한 힘이 깃들어 있었고, 그의 눈빛에선 용기를 북돋는 신뢰가 묻어났다.
마른 비와 눈이 마주친 병사들은 저도 모르게 무기를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이것 역시 야수 친화의 영향일까?
거기까진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마른 비는 어느덧 많은 이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동료에게 등을 맡기고 각자의 위치를 지켜. 놈은 약해졌고, 더 이상 전처럼 날뛰지 못할 거야. 부족한 무력은 내가 메꿀게. 놈이 침입하는 것만 막아줘.”
이 순간, 마른 비는 이곳의 실질적인 지휘자나 다름없었다.
병사들은 무기를 들어 올리며 자신들을 일으켜 세운 청년에게 소리 없는 군례를 올렸다.
표정이 완전히 달라진 병사들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 이후 몇 번의 암습이 있었지만, 살수는 더 이상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내원이 뚫린 건 모두의 허를 찌른 한 수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