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크, 크훅…!”
옆구리가 길게 갈라진 적색창기병이 힘겹게 숨을 토했다.
그가 속한 조는 살수의 암습을 받았고, 셋 중 한 명이 숨을 거뒀지만, 둘은 살아남았다.
적색창기병의 지휘자였던 그는 별비 이후 처음으로 살수의 다리에 한칼을 먹이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삐져나오려는 내장을 손으로 움켜쥐고 있음에도 그가 웃을 수 있는 이유였다.
“소, 소협! 그놈, 확실히 약해졌소.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아. 손에 묵직한 손맛이 남았지. 크흐흐… 내 칼에도 맞을 정도니 소협과 마주치면 끝장날 거요. 쿨럭, 쿨럭…! 부, 부디 주군을….”
“말하지 마, 아저씨! 살 수 있어! 아…!”
죽지 않을 것 같았던 사내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다가 눈을 감았다.
상처를 들여다보니 검이 갑주를 통째로 가르고 옆구리를 찢어 놨다.
생각보다 훨씬 위중한 상처였던 것이다.
연이은 죽음 앞에서, 마른 비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루 밤새 몇 명이 죽어 나가는 거야? 뚫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질 않아. 이렇게 집요하게 아저씨를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뭐지?”
예전에 봤던 살수들처럼 돈 때문일까?
느낌일 뿐이지만, 그건 아닐 것 같다.
제대로 본 게 아니라 확신할 순 없지만, 놈에게선 그런 음험하고 지저분한 피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장사성이나 원 황실처럼, 주원장과 대치하는 세력에 속한 자일까?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살행에 나선 살수.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마른 비는 그것도 아닐 것 같았다.
이런 자가 양지에 드러난 세력에 속해 있을 것 같진 않았고, 대의를 위해 움직였다고는 더욱 믿기 힘들었다.
그 역시 아무런 근거도 없는 느낌일 뿐이지만.
마른 비가 죽은 병사의 머리를 받친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신음소리가 들렸다.
“으음…….”
‘아!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지!’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렸을 때, 공격을 받은 조의 살아남은 적색창기병 한 명이 격하게 기침을 토했다.
“쿨룩, 쿨럭…!”
“괜찮습니까!”
마른 비가 일어나기도 전에 갑옷을 입지 않은 경비병 한 명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아마 외원을 지키다가 수비 범위를 좁힐 때 내원으로 가담한 병사인 모양이었다.
살아남은 적색창기병이 힘겹게 말했다.
“괘, 괜찮소……. 버틸 만해.”
그는 다행히 목숨이 오갈 만큼의 상처는 입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부터 시작해서 팔다리에 피가 흥건했고, 특히 허벅지는 갑주가 쩍 갈라질 정도로 당해서 걷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를 부축한 병사가 마른 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적색창기병의 부상을 훑어본 마른 비가 말했다.
“안으로 들여보내야 할 거 같아. 더 이상 싸우긴 힘들 거야.”
“그럼 조장님이 오시면 허락을 받고 제가 옮기겠습니다. 저희 조가 곧 도착할 겁니다.”
사내가 자신이 달려온 방향을 보며 말했다.
환하게 밝힌 횃불은 내원 곳곳을 비추고 있었고, 저 멀리서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시체가 널브러진 살풍경한 광경.
내원을 메웠던 병사들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마른 비는 가까스로 침음을 삼켰다.
‘너무 많이 당했어…….’
주원장을 호위하기 위해 정원에 들인 병사들은 실력은 물론이고 신분 내력이 확실한 자들이었다.
살수가 섞여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이상 그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넉넉하다 못해 넘칠 정도의 인원을 배치했지만, 밤사이 꽤 많은 인원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경비병들을 재배치해야겠어.’
내원만으로도 상당한 넓이였기에 빈틈을 메우려면 남은 자들의 간격을 더욱 당겨서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그러면 외원이 텅텅 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하지?’
정원 밖에서 대기 중인 외부의 병사들을 외원으로 들이는 걸 고려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들의 신원을 일일이 확인하지 못한 게 걸리지만, 살수는 이미 침투해 있는 상황이 아닌가.
지금은 내원을 탄탄히 조이고 넘쳐나는 일반 병사들로 외원을 채워서 살수를 압박하는 유연한 조치가 필요할 때였다.
어느덧 정원 전체를 조망하게 된 마른 비는 어떻게 하면 살수를 저지할 수 있을지에 골몰했다.
‘저기 오고 있는 사람이 조장이라고 했지? 저 사람에게 말해줘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마른 비는 부상자를 부축한 채 기다리고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상세가 심각해지기 전에 그 사람을 옮겨줘. 당신네 조장에게는 내가 말할 테니까. 그 사람을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사내는 부상당한 적색창기병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무게가 실리는 순간 움찔하는 걸 본 마른 비가 물었다.
“당신도 다친 것 같은데? 괜찮겠어?”
“음……. 서쪽 내원과 외원의 경계가 공격받았을 때 근처의 조를 돕다가 다쳤습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서쪽 내원과 외원의 경계.
얼마 전에 공격을 받았지만, 마른 비가 일찍 당도해서 죽은 자가 적었던 곳이다.
고맙다는 의미인지 사내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헛! 여, 여기! 살수가…!”
이쪽으로 다가오던 경비병들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마른 비가 고개를 홱 돌리고, 달려 나가며 외쳤다.
“그 사람을 부탁해! 당신도 들어간 김에 상처를 좀 살피고!”
사내는 또 한번 고개를 꾸벅이고 적색창기병을 부축해서 내원 안쪽으로 향했다.
마른 비가 비명을 지른 자들에게 당도한 건 순식간이었다.
발밑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에 붙잡힌 채 허둥대는 병사들.
마른 비가 자연기를 담은 언령을 토했다.
『긴장해! 살수가 근처에 있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별비에게 들은 대로 살수의 기술을 분쇄하는 데 언령은 효과가 있었다.
꿈틀대던 그림자들이 소멸하고, 병사들이 풀려났다.
마른 비가 곧바로 달려온 덕분인지 살수는 이들을 해하지 않고 멀어진 모양이었다.
참으로 끈질기고, 진저리쳐질 만큼 위치를 잡기 힘든 놈이었다.
“후우… 무사해서 다행이야. 당신이 조장이지? 지휘자에게 알려서 남은 경비병들을 전부 내원으로 들여보내. 내원을 믿을 만한 병사들로 굳히고, 외원을 외부 병력으로 채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해줘. 그리고 먼저 온 당신 조원은 부상자를 수습해서 처소로 갔어.”
“알겠습니다, 소협. 그런데….”
그때, 근처에서 또다시 살수의 출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속 터지겠네!’
언제까지 이렇게 끌려 다녀야 하는가.
놈의 기상천외한 이동술을 사전에 차단할 방법은 없는 걸까?
처소에 접근시키지 않고 내원에서 놈의 진입을 막고 있으니 주원장을 보호한다는 목적은 훌륭하게 달성하고 있지만, 병사들의 피해가 막심했다.
서달이나 강무재라면 이것만으로도 흡족해할 것이다.
하지만 마른 비는 암습이 벌어진 후에 뒤를 쫓아야 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기력을 아끼지 않고 동분서주한 덕분에 병사들의 피해는 극적으로 줄었지만, 그만큼 마른 비는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없어져!』
이쪽도 그림자였다.
어둠에서 솟아나 병사들을 붙든 그림자는 언령에 노출되자 소멸해버렸다.
마른 비가 병사들의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며 숨을 고르던 때였다.
그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세 명? 방금 세 명이었지?’
여기로 오기 전에 도왔던 자들은 분명 세 명이었다.
부상당한 적색창기병을 부축했던 병사는 자신이 그 조에 속해 있다고 했다.
그럼 세 명이 한 조니까, 두 명이어야 숫자가 맞지 않나?
‘경공이 빨라서 먼저 도착한 게…….’
아니, 잠깐만. 그것부터 이상하다.
그자는 일전의 습격으로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부상자를 부축할 때 비틀거린 것과 피가 밴 부위로 보아 다친 곳은 다리가 분명하다.
한데 멀쩡한 조원들보다 빠르게 달려왔다?
“…….”
옷에 피가 밴 부위가 또 어디였지?
다리뿐이었나?
아니다. 다리와…… 팔!
별비가 살수에게 부상을 입힌 부위가 팔이었다고 했다.
하늘로 띄워 올린 놈에게 이차 피해를 입힌 곳도 상체, 정확히는 팔 부근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방금 급하게 떠나오기 전, 경비조의 조장은 의아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었다!
‘맙소사! 설마…!’
마른 비가 주원장의 처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장이 말하려던 건 자신의 조원 중 먼저 간 사람 따윈 없다는 내용이 틀림없으리라.
언제 경비병의 옷으로 갈아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심스러운 부분들을 종합해볼 때 단서는 전부 그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부상자…! 부상자의 출입을 막아!』
전력을 다해서 언령을 터뜨렸지만, 내원은 넓다.
처소를 지키는 호위무사들이 들었더라도 그 정도 내용만 가지고 암살자를 판별하는 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놈은 이미 안으로 진입했을 가능성이 컸다.
“빌어먹을! 젠장…!”
마른 비는 쉴 틈도 없이 주원장의 처소로 내달렸다.
‘왜 느끼지 못했지?’
정신없이 달리며 마른 비는 상황을 돌이켰다.
병사들의 배치를 고민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것도 있겠지만 놈의 기만술이 뛰어났던 거다.
가을 수리가 여규의 평정심을 흩뜨려놓고 과할 정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잠입이나 첩보, 암살에 특화된 자들은 모종의 방법으로 상대의 감정이나 감각을 기만하는 게 틀림없었다.
심지어 상대는 초일류라는 말로도 부족한 희대의 살수였다.
모습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놈이 눈앞에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온전히 집중해도 알아챌까 말까인데 주의는 다른 데 쏠려 있었다.
더군다나 그림자를 이용하는 기술로 멀리 있는 경비병들을 붙들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제대로 허를 찌른 기가 막힌 한 수였다.
“소협! 무슨 일입니까!”
주원장의 처소로 들어가는 정문은 막혀 있었다.
마른 비의 외침을 들은 경비병들이 의원에 가려는 부상자들을 제지했지만, 그중에 살수로 의심되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들어갔구나!’
자신의 감각을 속일 정도의 기만술을 지닌 자다.
경비병들이 처소로 진입하는 자들을 일일이 확인했겠지만, 그들의 역량으로 살수를 판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무슨 수로든 속여 넘겼겠지.
아무튼 지금은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들어갔어! 살수가 부상자로 위장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고!”
마른 비는 다급하게 외쳤지만, 경비병들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소협. 내원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다고 들었소. 실로 탄복할 만한 일이오이다. 허나 주군의 처소는 우리가 지키고 있고, 아직 별다른 이상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소. 부상자들은 우리가 철저하게 검문하여 들여보내고 있으니 안심해도 될 것이오.”
경비대장의 얼굴엔 불쾌함마저 묻어났다.
네 말대로라면 우리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수를 들여보냈다는 뜻이 아니냐.
절대 그럴 리 없다.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냐!
그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안 돼. 말이 안 통해.’
이들은 살수의 무력 침투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 다른 가능성은 아예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부상자들을 검문한 자신들의 안목을 믿는 것이다.
어쩌면 문책이 두려워 불안하면서도 살수의 침투 가능성을 외면하는 걸 수도 있겠지.
아무튼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난 분명히 말했어. 살수가 안으로 들어갔다고. 판단은 당신들이 해. 나를 따라 들어가서 당신들의 왕을 지킬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지.”
거기까지 말한 마른 비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경비대장은 크게 당황했지만, 곧 그의 임무가 무엇인지 떠올렸다.
살수가 주군에게 접근할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점검하고 차단하는 것.
얼굴을 굳힌 경비대장이 일단의 병력을 정문에 남기고 마른 비의 뒤를 따랐다.
‘곧바로 아저씨에게 향했을 리는 없어. 놈은 다쳤고, 전보다 호위의 질이 높아진 만큼 무리하게 돌파를 강행하지는 않았을 거야. 어디냐. 의원? 아니면 어둠에 몸을 숨길 수 있는 구석진 곳?’
마른 비는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 살수를 찾았다.
하지만 그 시각, 살수는 이미 주원장의 눈앞까지 다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