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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20화 (220/463)

220화

‘우선 의원부터!’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모든 곳을 돌아볼 수는 없었다.

마른 비는 살수가 부상자인 척 잠입했으니 호위무사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우선은 의원으로 향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거기엔 규와 중구가 있는데…!’

뚜렷한 목적이 있는 놈이니 설마 부상자들을 건드려서 소란을 일으키진 않겠지만, 모를 일이었다.

의원으로 향하는 내내 마른 비는 초조했다.

“당신! 살수가 안으로 들어온 거 같다고 전해줘! 빨리!”

“네? 사, 살수가 들어왔다고요?”

마른 비는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도 위험을 알리는 걸 잊지 않았다.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가 화들짝 놀라며 상관에게 뛰어갔다.

‘빨리, 더 빨리…!’

생기와 사기가 뒤엉켜 감각을 자극하는 곳.

시야에 들어온 의원은 혼돈의 장이었다.

건물 바깥까지 부상자들의 신음이 흘러나왔고, 침상이 모자란 나머지 복도는 물론이고 건물 바깥에까지 누워 있는 자들이 즐비했다.

마른 비는 피와 약 냄새가 뒤섞인 공간으로 들어서며 감각에 집중했다.

‘느낌. 아까의 느낌을 기억해!’

외양에만 몰두하면 놓칠 확률이 높다.

감각을 속이는 기만술을 걷어내고 인간이 지닌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처.

다리와 팔을 다쳤으면서 의심 가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살수이리라.

마른 비는 줄줄이 누워 있는 환자들을 훑으며 지나쳤다.

“……으엉?”

듣는 순간 귓전에 박히는 특유의 억양.

바깥에서부터 환자들을 살핀 마른 비가 의원 내부 끝에 당도했을 때, 누워 있던 철중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뭐여? 비아, 네가 왜 여기 있냐? 살수는?”

‘없어…!’

마른 비는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있어야 할 살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정신을 집중했고, 놓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한데 없다고?

‘의원으로 온 게 아니야?’

대답을 기다리는 철중구와 그 옆에서 곤히 잠든 여규.

둘이 무사한 걸 확인한 마른 비는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어? 어? 저 새끼 저거, 이제는 그냥 내 말을 대놓고 무시하네?”

‘바쁜 거야. 무지막지하게 중요한 일이 있는 걸 거야.’라고 중얼대던 철중구가 마른 비의 뒤를 따라온 경비대장에게 말했다.

“당신이 무슨 일인지 설명해줘야겠어. 혹시나 내 말을 쌩 까고 그냥 가면 등짝에 칼 꽂힐 줄 알라고.”

도를 집어 든 철중구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마른 비를 따라왔다가 이상한 놈에게 걸린 경비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없어! 확실히 없어!’

또 한번 거꾸로 훑었음에도 살수는 보이지 않았다.

건물 바깥으로 나온 마른 비가 심란해할 때,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가 주의를 끌었다.

“으음… 선생, 나를 부축해준 청년은 어디 있는 거요?”

고개를 돌린 곳엔 낯선 얼굴의 중년 사내가 있었다.

중상을 입은 그는 겨우 고개를 돌려서 지나가던 의원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그 친구도 다리를 절던데……. 팔도 다친 것 같고. 같이 치료를 받을 줄 알았는데 어디로 간 거지?”

“……!”

가만히 들여다보니 투구 사이로 스쳤던 얼굴이 기억났다.

살수가 부축했던 적색창기병이 틀림없었다.

“당신…!”

마른 비는 한달음에 사내에게 달려갔다.

그는 마른 비를 보고 철중구처럼 눈이 커다래졌다.

“소, 소협? 소협이 왜 여기에? 설마 다친 거요?”

“어디 있어? 당신을 부축했던 그놈, 어디 있냐고!”

예의니 뭐니 따질 겨를도 없다.

마른 비는 닦달하듯 캐물었고,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걸 깨달은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그자… 그자는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주고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갑옷까지 벗겨주었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중간에 나는 기절했고, 깨어나니 여기였지. 눈을 떴을 때 그자도, 갑옷도 사라져 있었소. 설마, 설마 그자가…?”

“젠장!”

마른 비가 저 멀리 있는 주원장의 집무실을 노려봤다.

주원장의 집무실은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서달과 상우춘이 동쪽의 장사성을 정벌하는 동안, 예기치 못한 사태에 대응하는 건 그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우려는 북쪽이었다.

원 황실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지만, 지금은 본진이 비어 있었고, 수년간 북쪽을 막아주던 방패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한림아.

원 황실과 줄기차게 싸우며 북쪽에 대한 염려를 덜어주던 소명왕이 무너진 후, 주원장은 밤낮으로 원 황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개의 등롱과 촛불이 타오르는 주원장의 집무실로, 적색창기병 한 명이 접근하고 있었다.

“멈춰라.”

엉망이 된 갑옷과 육체.

용케 걷고 있지만, 적색창기병은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주원장의 집무실 주변에 포진한 호위무사들이 그의 앞을 막았다.

“부상자 같은데, 무슨 일인가?”

호위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그는 검을 뽑아 들고 있었는데, 그뿐만 아니라 호위들은 전부 검갑에서 검을 뽑은 채 경계에 임하고 있었다.

언제든 싸울 수 있는 태세.

호위들의 경계는 완벽에 가까웠다.

“주군께 급히 아뢰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이렇게 왔습니다.”

“살수가 침투한 상황에서는 주군을 뵐 수 없다는 걸 모르는가? 적색창기병에 속한 자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살수와 싸우던 중에 너무나 중요한 정보를 습득하여 알현을 청한 것입니다.”

호위대장은 사내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한동안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호위대장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중요한 일이라……. 우선 자네의 신분부터 확인하도록 하지. 우섭.”

“네, 대장.”

우섭이라 불린 호위무사가 다가와 알현을 청한 사내를 살폈다.

적색창기병은 물론이고, 일반 병사 중에서도 부장급 이상의 얼굴은 모조리 꿰고 있는 사내.

눈썰미와 기억력이 좋아 직접적인 대조가 필요할 경우 확인을 맡은 자였다.

그는 사내가 내민 신분을 증명하는 패를 확인하고 얼굴을 살폈다.

“……이곽 십장이군요.”

꾹 눌러쓴 투구 밑으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투구가 드리운 음영이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는데, 눈과 코의 형태는 그가 기억하는 이곽이 분명했다.

우섭이 잠시 머뭇거린 건 입술 때문이었다.

그의 기억에 이곽의 입술은 두툼한 편이었는데, 횃불이 비추는 입술의 두께는 평범했다.

‘이곽이 틀림없는데…… 입술이 조금….’

부상을 입고 피를 흘렸는지 이곽의 입가엔 피가 낭자했다.

아마도 자신의 기억이 다소 어긋난 것이리라.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특징과 윤곽을 기억할 뿐이지, 수백 명의 입술 두께까지 세밀하게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원래 이곽의 입술이 이랬던 것 같기도 했다.

“……입대가 늦은 바람에 십장에 머물러 있지만, 실제 실력은 그 이상이라고 평가되는 병사입니다. 적색창기병 소속이 확실합니다.”

우섭이 신분 증명을 마치자 호위대장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래. 이곽 십장.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알현을 청한 거라면, 대단히 중요한 정보인 모양이군. 치료를 받지도 않고 달려올 정도로 말이야.”

애써 억누르고 있지만, 이곽의 얼굴에선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가 주군을 뵈어야 한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호위대장은 원칙을 따랐다.

“그래도 이 안으로 진입할 순 없네. 시급을 요하는 일이라면 내게 전해주게. 그러면 내가 주군께….”

“마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는지, 이곽은 호위대장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리고…… 존자. 주군께 그 두 가지 단어만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알현 요청을 수락하실 겁니다.”

저벅, 저벅, 저벅….

호위대장은 집무실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두 단어를 꺼내자마자 그를 안으로 들이라는 주원장의 명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음색에는 놀라움을 넘어 혼란스러워하는 기색까지 묻어났다.

수년간 주원장을 호위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호위대장은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에는 부상 때문에 다리를 절면서도 자신 이상으로 서두르는 이곽이 따라붙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주군께서…….’

주원장이 스스로 공표한 규칙을 어기고 예외를 두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송렴을 필두로 한 4대 선생을 진영에 받아들인 후, 그들의 조언대로 기강의 확립을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웬만하면 살수에 대한 경계령이 해제된 후에 알현을 허락할 텐데, 당장 데려오라는 명을 내린 것만 봐도 보통 일이 아닌 건 분명했다.

‘마교라니……. 그 이름을 듣고 주군께서 동요하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존자? 대체 누구이기에 그런 광오한 호칭을….’

복잡한 상념이 스치지만, 일개 호위가 추측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주어진 명령을 수행하면 그뿐.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복도를 지나자 환히 불을 밝힌 주원장의 집무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주군. 적색창기병의 십장, 이곽을 데려왔습니다.”

주원장이 전략을 논의하는 집무실은 넓었다.

좌우로 두툼한 기둥 여덟 개가 천장을 받치고 있었고, 그 중앙에는 전술용 지도가 깔린 탁자가 놓여 있었다.

강소성 전역이 세밀하게 그려진 지도 위로 병력의 이동과 현황을 나타내는 표패(標牌)들이 즐비했다.

참모들과 전략을 논의하던 주원장이 호위대장 쪽을 돌아봤다.

“내게 전할 말이 있다고?”

무엇이 그리 급한 걸까.

주원장은 격식을 생략한 채 곧바로 이곽에게 물었다.

이 역시 매우 드문 일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 호위대장이 등을 돌리며 이곽에게 말했다.

“주군의 앞이다. 투구를 벗도록.”

이곽은 투구를 벗으란 말에 머뭇거렸다.

앞서 서두르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무언가를 찾듯 주변을 눈으로 훑던 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호위대장이 눈을 치켜뜨며 호통을 쳤다.

“이놈이! 누가 다가서는 걸 허락했느냐! 당장 투구를 벗지 못할까!”

이곽은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횃불이 환하게 비추는 곳이었는데, 한 발자국 앞에는 기둥이 드리운 그림자가 길쭉하게 늘어져 있었다.

상체를 숙이자 어깨 윗부분이 음영의 영역에 들어갔고, 그는 그제야 투구를 벗었다.

“죄송합니다. 주군을 가까이서 뵙는 게 처음이라 긴장이 돼서. 예법에 서툰 점, 용서하시길.”

고개를 든 이곽은 그리 말했다.

세월이 묻어나는 중년의 얼굴.

잠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주원장이 주변을 물렸다.

“긴히 할 말이 있다. 모두 나가보도록.”

“……?”

독대?

대체 무슨 일이기에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주변을 물린단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호위대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주군. 어떤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원에 살수가 침투한 상황이옵니다. 제 눈과 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자리를 지키는 걸 허락하소서.”

주원장은 호위대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참모들이 집무실 밖으로 나갈 때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이곽이 알현을 청한 이유를 아뢸 차례였다.

어떤 충격적인 내용이 나오든 동요하지 않으리라.

호위대장은 이곽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주원장 너머의 벽면을 바라봤다.

위급한 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그는 눈과 귀가 없는 병풍이 될 작정이었다.

그를 힐끗 쳐다본 이곽이 입술을 열었다.

“살수와 싸우던 중 마교가 연루된 흔적을 발견하여….

삐이이익―!

그 순간, 날카로운 경계음이 울렸다.

살수의 침입을 알리는 호각 소리!

깜짝 놀란 호위대장이 등을 돌렸을 때,

푸욱―!

어둠처럼 새카만 검이 그의 복부를 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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