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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21화 (221/463)

221화

껌뻑, 껌뻑.

호위대장은 우두커니 선 채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옷과 배를 관통하여 등을 비집고 나온 검.

곧이어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울렸다.

“끄, 끄으윽…! 이, 이게 무슨…? 네, 네놈이…!”

부아아아악―!

뚝뚝 끊기는 몇 마디 말이 호위대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 돼버렸다.

직각으로 치솟은 검이 그의 몸통을 세로로 쪼갰기 때문이다.

호위대장의 시체가 넘어가자 그를 살해한 자의 모습이 보였다.

몸을 일으킨 이곽은 기둥이 드리운 그림자에서 벗어났는데, 그의 얼굴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랐다.

중년의 사내가 아닌, 이십 대를 갓 넘긴 청년의 얼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조화였다.

“너는…! 그렇군. 네놈인가.”

주원장은 침착했다.

잠시 눈이 커졌지만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 눈빛은 잊을 수 없지. 한 달 만이로군.”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단어를 전한 게 속임수였나?

그렇다면 실로 기가 막힌 한 수였다.

시간을 몇 번을 되돌리든 자신은 그때마다 알현을 허락할 것이다.

‘그’를 언급한 이상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대단하구나. 또다시 경계를 뚫고 여기까지 오다니.”

칼을 빼든 살수가 서 있는데도 주원장은 아무런 동요를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속임수였던 게 다행이란 표정이었다.

눈앞에 당도한 초일류 살수를 보고도 안도하게 만드는 존재.

‘존자’라 불린 인물이 대체 어떤 자이기에 그에게 이런 반응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주원장만이 알 일이었다.

“…….”

목숨을 빼앗으러 왔음에도 도리어 긴장한 건 살수였다.

손 한 번 까딱하면 목을 딸 수 있는 사냥감.

분명 사냥꾼은 자신일 터였다.

하지만 도무지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한 달 전에도 그랬지만, 이 주원장이란 사내는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도약 한 번으로 죽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 지금도 그 느낌은 변함이 없었다.

“……그 목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야 한다.

갈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 죽여야만 한다.

살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쾅―!

“주군! 무사하십니까!”

생각은 길지만, 흘러간 시간은 찰나였다.

주원장이 독대를 언급한 탓에 거리를 두었던 외부의 호위무사들이 이상을 감지하고 뛰어들었다.

그들은 문을 박차고 난입하자마자 눈앞에 다가든 비수를 맞닥뜨려야 했다.

“컥…!”

“크학!”

호위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정확히 한 사람당 한 자루.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던진 비수는 호위무사들의 목젖에 정확히 박혀 있었다.

스르륵―

일격에 목을 딴다.

여기서 죽더라도 표적만 죽이면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니까.

주원장을 노리는 살수의 눈엔 필살의 의지가 이글거렸다.

쾌애애애액―!

아, 이놈들이 있었지.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엉망으로 당하는 바람에 잠시 잊었다.

다시는 마주치기 싫은 대호와, 어처구니없는 감각을 지닌 이족 청년.

그것들 때문에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고, 그 바람에 표적을 지키는 암중 호위들을 깜빡했다.

몸이 정상일 때도 만만치 않았던 놈들.

열두 명이 온존했다면 힘들었겠지만, 한 달 전에 놈들의 숫자를 일곱 명으로 줄여놨으니 해볼 만했다.

츠캉!

여섯은 흘리고, 하나를 잡는다.

살수와 칠영이 서로를 지나친 순간, 일곱 개의 그림자 중 하나가 추락했다.

푸화악―!

살수의 어깨에서도 핏물이 솟구쳤다.

공격을 완전히 흘리지 못한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살수가 몸을 움직였다.

스르륵―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살아남은 육영 중 셋은 몸을 드러낸 채로 살수를 쫓았고, 나머지 셋은 천장과 바닥에 녹아들며 살수의 퇴로를 선점했다.

쐐액- 쾌액― 피슉!

여섯 방위에서 쏟아지는 검격.

육영은 암중 호위답게 은신에 능했고, 살수의 싸움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상대가 몸을 숨길 틈을 주지 않았고, 절묘한 합격술로 살수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놈은 정면 대결에도 능한 괴물이었다.

우우웅―

검이 운다고 느낀 순간, 흑색의 칼날이 어둠을 토했다.

검명(劍鳴)에 이은 검강.

살수는 지고한 경지를 개척한 검사들만이 운용하는 검강을 쏟아냈다.

양지에 드러난 세 개의 그림자가 반 토막 나며 후드득 무너져 내렸다.

“……!”

음지에서 살아가는 이들답게 누구도 소리를 흘리지 않았다.

세 명은 죽어가는 순간까지 신음 한 번 뱉지 않았고, 이제는 삼영이 되어버린 자들 또한 동료의 죽음에 침묵했다.

그저 소리 없이 이를 악물며 암격을 준비할 뿐이다.

살수가 검을 회수할 때, 천장과 바닥에서 두 자루의 검이 솟구쳤다.

스각- 피슉!

어깨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

옆구리가 꿰뚫리는 서늘한 음향.

살수는 휘청였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어금니를 깨물고 적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반전한 살수가 검을 그었지만, 위치를 선점했던 둘은 다시 천장과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쫓아가려던 살수가 비틀거리더니 무릎을 꺾었다.

‘저놈, 다리를 다쳤구나!’

마무리 일격을 준비하던 삼영의 수장이 눈을 빛냈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살수는 지쳤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기서 잡는다!’

기회라고 여겼는지 앞서 공격했던 두 명도 다시 검을 뻗었다.

둘의 암습에 또 하나의 암습을 더한다.

바닥에서 솟구친 삼영의 수장은 공격이 성공할 걸 확신했다.

이변이 벌어진 건 기둥이 드리운 그림자의 영역에 들어갔을 때였다.

덜컥!

‘이, 이게 무슨…?!’

뭐냐. 뭐가 몸을 붙잡은 거지?

온몸이 주박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사지를 옭아맨 느낌이었다.

바람이 스친다고 느낀 순간, 눈에 담긴 집무실의 정경이 빙글빙글 돌았다.

‘저건… 내 몸?’

묘한 기분이었다.

평생을 사용한 자신의 육체를 외부에서 들여다보는 느낌은.

목 위가 휑한 자신의 몸을 시커먼 무언가가 휘감고 있었다.

‘그림자…! 그림자를 부리는 거였나?’

이제야 이해가 간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기동과 누구도 잡아낼 수 없었던 은신술.

놈은 그림자에 스며들고, 그림자를 타고 이동이 가능하며, 그걸 암습에 이용하는 자였다.

‘빌어먹을……. 미리 알았더라면…!’

한 달 전에 받았던 급습에선 놈의 기술을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불쑥 튀어나와서 주원장을 공격하는 놈을 저지하기 바빴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인간이 그림자를 조종하다니!

무엇보다 그때는 이런 기술을 사용하지도 않았었다.

‘주군…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 부디 무사하시길….’

목이 잘린 칠영의 수장이 눈을 감았다.

“음…….”

주원장은 낮게 침음했다.

곽자흥의 수하로 시작하여, 천하를 눈에 담기 전부터 함께 한 호위들.

자신이 성장했듯 그들 또한 발맞추어 강해졌다.

자신이 대업을 이루는 걸 두 눈으로 보고야 말겠다며, 어떤 위협에서든 지켜주겠다 웃었었다.

십이영이 없었다면 절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형제보다 가깝게 여겼던 그들이 한 달 만에 몰살해 버렸다.

단 한 놈에게.

“그래……. 이건 그런 길이지.”

이들만이 아니다.

동고동락한 사람 중 죽은 이보다 살아남은 자들을 세는 게 빨라진 건 오래됐다.

모두가 자신의 꿈에 휘말려 죽어갔다.

자신이 걷는 건 그런 길이었다.

모르지 않지만, 무뎌진 지 오래지만, 십이영의 몰살은 가볍게 넘기기가 힘들었다.

주원장은 갑자기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슬픔보다 외로움이라……. 날 지키다 죽어간 이들의 시체 앞에서 말이지.’

번쩍번쩍하며 칼이 부딪치더니 칠영은 순식간에 몰살해 버렸다.

칠영의 수장은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염려하는 듯했다.

그 눈빛을 보면서 슬픔이 아닌 외로움을 느낀다?

과연 이걸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어.’

초월적인 존재가 시간을 되돌려서 다른 선택을 할 기회를 준다면 그리 할 것인가.

절대 그럴 리 없다.

주원장은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았다.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욕망의 집합체.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든 황제가 될 생각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은 오랜만에 표면으로 떠오른 감정을 빠르게 지워버릴 수 있었다.

“희한한 일이야. 언제부터인지 나는 죽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릎을 꿇은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살수가 몸을 일으켰다.

흑색의 검엔 진득한 피가 묻어 있었고, 살의에 찬 눈은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원장은 웃었다.

“진우량의 함대가 본선을 노릴 때도, 숙적들이 보낸 자객이 코앞까지 들이닥쳐도, 언제나 그랬다. 천하를 눈에 담은 순간부터, 나는 도무지 죽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아.”

쾅―!

“주군! 괜찮으십니까?!”

“사, 살수…! 막아! 놈이 주군께 가는 걸 저지해라!”

입구를 막은 시체를 치우며 호위무사들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살수와 주원장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고, 살수가 몇 걸음만 떼면 주원장의 목은 떨어질 터였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하늘이 점지한 차세대의 군림자는 태연했다.

“무언가 사연이 있군. 그래서 그토록 필사적이겠지. 안 됐지만, 너의 절실함은 나의 욕망을 넘지 못할 것이다.”

조롱이라고 여긴 걸까?

어떤 부분을 건드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수는 그 말을 지독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혹은 애써 억누르고 있던, 침잠된 슬픔을 후빈 걸지도.

“……닥쳐라!”

필요할 때 말고는 입을 열지 않았던 살수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핏발이 선 눈동자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읽혔다.

그의 검이 주원장의 목젖을 관통하려는 순간, 벽면이 터졌다.

콰앙―!

암석 같은 등판이 강대한 충격파를 뿜어낸다.

집무실의 벽면을 통째로 날려버린 전사는 살수를 포착했고, 지체없이 발을 굴렀다.

쾅!

번갯불이 공간을 압축하고, 호위를 약속한 전사가 왕의 앞을 막아선다.

왕을 해하려던 칼날이 속절없이 튕겨 나가는 순간, 마침내 마주한 전사와 살수의 눈빛이 교차했다.

지키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이 순간은 적으로 마주했지만, 인연이란 어떻게 뻗어 나갈지 모르는 법.

처음으로 눈을 맞춘 전사와 살수는 서로에게 이어진, 보이지 않는 끈을 느꼈다.

“미안. 늦었어, 아저씨.”

느낌은 느낌일 뿐 지금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마른 비는 살수의 눈을 응시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아니. 딱 알맞게 왔다.”

마른 비 말고도 그를 지켜줄 누군가가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칼이 한 치 앞까지 왔다 갔음에도 주원장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겨우 따라잡았네. 안 놓쳐, 이젠.”

말과 동시에 뻗어 나가는 주먹이다.

순정한 일격에 공간이 일그러지니, 와족 정권 바위 부수기가 살수를 덮쳤다.

콰우우웅―!

대포가 뿜어지는 듯한 권격이다.

어둠을 담은 칼날이 진로를 가로막았지만, 마른 비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비스듬히 흘리려는 방어초마저 날려버리고 살수의 육신을 침범한다.

눈을 치뜬 살수가 필사적으로 몸을 꺾었다.

콰아아앙!

바위 부수기는 그 이름처럼 암석을 분쇄했다.

묵직하게 천장을 지탱하던 돌기둥 하나가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

돌조각과 흙먼지가 휘날리며 횃불의 빛을 가렸을 때, 살수의 몸이 흐릿해졌다.

“어딜 숨으려고?”

내원에서 지겹도록 본 기술이다.

마른 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응했다.

『합!』

즈즈즈즛―

언령이 뿜어지자, 그림자에 숨어들던 살수의 몸이 멈췄다.

갑자기 막혀버린 입구에 몸이 낀 듯한 광경.

현세에선 듣기 힘든 잡음과 함께 살수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살수가 황급히 그림자를 흩어버리고 하강할 때, 마른 비는 그의 발밑에 당도해 있었다.

쐐애애액―!

중선오격.

치명적인 살상기가 다섯 줄기 빛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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