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쩌저저저정!
귀청을 찢는 굉음이 집무실을 울렸을 때, 살수는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
혼신의 힘을 때려 부은 영강기(影罡氣)가 낱낱이 분쇄되어 버렸다.
감각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주원장을 지키는 청년은 나이를 뛰어넘는 힘을 축적하고 있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술들을 구사했다.
가장 기가 막힌 건 전음과 비슷한 음공이었다.
사자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올 때마다 자신했던 비기가 뿌리째 흔들렸다.
하늘이 허락한 초능에, 그분께 전수받은 영술(影術).
두 가지를 절묘하게 혼합한 은신술은 한 번도 파훼된 적 없는 기예였다.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었던 절대 비기가 청년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깨지고 있었다.
‘막았어?!’
살수가 경악을 삼킬 때, 마른 비도 그에 못지않게 놀랐다.
필살을 자신한 기술이 상대를 침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선오격은 의심의 여지없이 깔끔하게 적중했다.
살수의 몸에 발이 꽂히는 순간, 타격을 상쇄한 건 새카만 어둠이었다.
‘뭐였지, 그게? 마치 다른 공간에 발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일인전승되는 영벽(影壁)을 마른 비가 알 리 없었다.
그것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예이며, 극히 드물게 목격한 자들조차 실체를 깨닫지 못한 비전이었다.
적중의 순간 발끝에 묵직하게 전해져야 할 타격감은 솜뭉치를 걷어찬 것처럼 가볍기만 했다.
‘정신 차려!’
언제까지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은 전투 중이고, 몰아쳐야 할 상황이 아닌가.
짧게 고개를 흔든 마른 비가 곧바로 살수에게 따라붙었다.
‘큭…!’
허공에 떠오른 살수도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상대의 공격은 영강기를 깨부순 것만으로도 모자라 영벽을 뚫고 들어올 정도로 가공했다.
한 달 전에 암습을 훼방 놓은 장군처럼, 힘으로 술법을 깨뜨릴 수 있는 자였다.
‘아냐. 이건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니야…!’
청년의 무력은 아직 장군에 비해 모자랐다.
하지만 저자에게는 영술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냐. 무엇이 이런 결과를…!’
살수는 무소처럼 돌진해오는 청년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눈에 깃든 무언가를 발견했다.
‘……푸른빛?’
저거다.
저것 때문에 영술이 가차없이 무너진 거다.
기묘한 음공도 그랬지만, 청년이 푸른 기운을 발동할 때마다 그림자가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내공! 지금껏 본 어떤 것보다도 순수한…!’
중원의 내공 심법과는 확연히 다르다.
정제를 거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순정함.
정확히는 마른 비가 흡수한 대자연의 정수가 원인이었지만, 살수가 거기까지 짐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른 비가 영벽에 대해 알 수 없듯, 그에겐 자연기가 미지의 영역이었다.
투콰캉!
어깨로 들이받는 체술.
산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일격이다.
황급히 발동한 영벽을 뚫고 또다시 충격이 전해졌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자 앞에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아앗!”
절로 기합이 터져 나왔다.
마침 청년은 빛이 가려진 영역을 지나고 있었고, 영력(影力)을 운용해 그림자를 움직였다.
새카만 그물 같은 어둠이 마른 비를 붙들었다.
『까불지 마!』
‘또…!’
청년이 쩌렁 외치자, 급히 끌어모은 영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한 수로 확실해졌다.
극상성(極相性).
청년은 마치 자신을 잡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자신이 음지를 지배하는 어둠이라면, 상대는 양지를 보듬는 빛과 같다.
선과 악 같은 개념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한 상반적 속성에 해당하는 관계.
상대가 지닌 내공의 근원이 자신의 모든 걸 파훼하는 느낌이었다.
‘……인정할 수 없다!’
살수는 난생처음으로 오기가 치밀었다.
영술은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능한 절정의 기예다.
그리고 영술을 자신에게 전수한 분은 무림 역사상 최강의 암살자란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남자였다.
만약 밀린다면 그건 자신의 경지가 낮을 뿐이며, 영술을 잡아먹을 상극의 무언가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럴 리 없다! 절대 그럴 리 없어!’
살수의 이마에 핏줄이 불거졌다.
극한으로 개방한 뇌력이 사방으로 번지니, 빛을 피해 숨었던 어둠이 그의 앞에 집결했다.
후아아아악―!
활짝 열린 상단전이 어둠을 응축한다.
하단전으로부터 치솟은 암영기(暗影氣)가 형체 없는 어둠에 실체를 부여하자, 칠흑의 장막이 눈앞에 펼쳐졌다.
살수에게 돌진하던 마른 비가 무저갱 같은 어둠 앞에서 우뚝 멈췄다.
“뭐, 뭐야, 이게?”
뭉클뭉클 번지는, 새카만 어둠.
자연적으로 형성된 그림자의 활용을 넘어 인위적으로 어둠을 생성한다.
전설적인 암살자의 후인은 초능과 술법을 융합하여 새로운 경지를 열어젖혔다.
스르륵―
꿈틀대는 어둠과, 그 안에 녹아든 살수.
예측할 수 없는 각도에서 튀어나온 검이 마른 비의 심장을 노렸다.
“큭…!”
왼쪽 가슴을 길게 가른 검날.
암습을 피한 건 순전히 본능이었다.
어둠, 아니 공간 자체를 헤집으며 엄습하는 검은 예측불허의 신기였다.
좌, 우, 앞, 뒤, 심지어 머리 위까지…!
피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도 신기할 지경이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마른 비의 육신에 상처가 늘어갔다.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지?!’
자연기가 영술을 파훼됐듯 살수의 영강기 또한 교룡갑을 찢어발겼다.
검이 스칠 때마다 자연기를 두른 외피가 맥없이 갈라졌다.
대척점에 서 있는 상극의 기운은 서로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온몸에 혈선이 그어질 만큼 고전하던 마른 비는 어느 순간 퍼뜩 깨달았다.
‘……예측으로 회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생각하지 마. 감각에 집중해야 해!’
티끌만 한 살기까지 배제한 암검.
어둠을 가르며 엄습하는 그것은 지독하리만치 인간을 죽이는 데 특화된 검이었다.
어설픈 예측이나 짐작으론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마른 비는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지금껏 자신을 살렸던 감각에 몸을 맡겼다.
스악- 쉭― 슈슉―
귀 기울여도 듣기 힘든 소성(小聲)은 검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였다.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은 다가올 위험을 감지했고, 한발 앞서 몸을 움직였다.
마른 비는 미리 합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허깨비처럼 튀어나오는 검을 슬쩍슬쩍 피했다.
갑자기 검이 빗나가기 시작하자 초조해진 건 살수였다.
‘이럴 수가…!’
아공간(我空間)에 몸을 숨긴 살수는 매 순간 피가 마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만 상상해 왔던 술법을 실전에서 펼치는 데 성공했지만, 이건 너무나 제약이 많은 기술이다.
강제로 응축시킨 어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내력이 소모되며, 그림자를 매개로 한 아공간에 머무르는 건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실세계로 튕겨져 나가려는 몸을 붙들며 암격까지 감행하는 살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왜 맞지 않는 거냐? 어떻게 피하는 거지?’
야생에서 목숨을 걸고 체화시킨 생존 감각.
살수의 스승이 무림 역사상 최고의 암살자라면, 마른 비를 키운 건 운남의 야생이었다.
원시를 간직한 태고의 자연과 비정상적으로 강인한 맹수들.
그리고 천 년의 세월을 통틀어 최강이라 칭송받는 남자가 그를 다듬었다.
살수 역시 지옥 같은 아수라장을 뚫고 살아남았지만, 마른 비가 거쳐 온 길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러 환경적 조건이 맞물린 끝에 마른 비는 살수를 벼랑 끝에 몰아넣고 있었다.
‘큭! 영력이…!’
한계가 다가온다.
강제로 끌어모은 어둠이 흩어지려 하고 있었다.
영술이 풀리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살수는 여력을 쏟아부어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꾸구구국―
영술로 구현한 어둠은 실존하는 생명체의 내부로 스며들지 못한다.
하지만 몸을 숨기는 것 말고도 직접적인 전투에 활용할 방법이 있으니 호위무사들을 붙들었던 물리적 간섭이었다.
마른 비를 감쌌던 어둠이 그의 몸을 조였다.
“흡…!”
발밑에서 솟아올라 붙잡는 수준이 아니다.
어둠은 거인의 손아귀처럼 마른 비를 붙들었다.
육신을 옥죄고, 숨통을 조인다.
그리고 움직임이 멈췄으니 곧 암습이 날아들 터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마른 비는 육신을 본능에 맡긴 순간부터 평온한 상태였다.
‘이거, 어딘가 익숙해.’
상단전.
뇌력이 발현시킨 조화.
구동하는 방식이 다를 뿐 이것의 근원은 술법이 틀림없었다.
‘자연기를 꺼려 해.’
스멀대는 어둠은 자연기와 맞닿을 때마다 움찔대며 물러났다.
시전자의 명령에 따라 짓쳐올 뿐 의지라는 게 있다면 자연기를 피했으리라.
‘실체를 부여한 가상의 힘. 뇌력과 의지에 의해 구현되는 물리적 간섭. 그건…!’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와족 비전, 야수 제어.
언령으로 시동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살수가 부리는 어둠은 야수 제어와 대단히 흡사했다.
‘그렇다면 나도…!’
못할 이유가 없다.
마른 비는 이미 상대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멈출 수준의 야수 제어를 연성했고, 그것은 살수의 비기에 맞설 강력한 무기나 다름없었다.
『물러나!』
육신을 압박하던 어둠이 소스라치며 후퇴한다.
언령에 깃든 의지는 백수를 굴복시킨 전사의 명령이니 악몽 같은 어둠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무기.
순정한 대자연의 기운이 마른 비의 부름에 응답하자 천지를 울리는 하늘의 분노가 두 손에 담겼다.
쿠르르릉―
뢰창.
감히 바라보기도 힘들 만큼 휘황한 빛이 새카만 어둠을 헤집었다.
‘어디냐.’
온 정신을 집중해도 기척을 잡기 힘든 자.
하지만 마른 비는 확신했다.
사위를 더듬은 생존 감각이 적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었다.
마른 비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뢰창을 집어 던졌다.
쩌저저저정―!
“크훅…!”
처음으로 듣는 살수의 목소리다.
의지를 벗어난 신음과 함께 어둠이 걷혔다.
암흑을 두른 듯 새카만 검이 뢰창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놀랍게도 살수는 그 와중에 현란하게 검을 놀렸고, 뢰창의 궤도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크… 크아아아!”
필사적인 기합성이 터지고, 뢰창의 경로가 틀어졌다.
전면을 향해 뿜어나간 영강기가 기진맥진한 마른 비의 옆구리를 할퀴었다.
왼쪽 어깨를 스치며 지나는 푸른빛에 살수가 안도한 순간, 음파가 만들어낸 후폭풍이 그를 강타했다.
“컥…!”
살수란 놈들은 대체 어떤 수련을 쌓는 것인가.
진저리쳐질 만큼 질긴 놈이었다.
순간적으로 생성한 영벽이 뢰창의 음파를 가로막았고, 살수는 철퇴에 얻어맞은 것처럼 튕겨 나갔다.
더욱 경악스러운 건 그 와중에도 목적을 잊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신창이가 됐음에도 놈은 검을 휘둘러서 날아간 쪽에 있는 호위들을 절단했고,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좌중을 가로질러 주원장에게 달려들었다.
전투의 현장을 우회해 주원장을 둘러싸고 있던 호위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마른 비조차 예상치 못한 한 수였다.
“크아아아―!”
무엇이 저 남자를 저토록 필사적이게 만드는 걸까.
확신할 수 있는 건 절대 단순한 암살 따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겐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주원장의 목을 취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여긴 그를 뒷받침해줄 자가 없었고, 마른 비에겐 든든한 아군이 있었다.
스르륵―
어느새 당도하여 주원장의 곁을 지키던 별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어깨가 베였다지만 막강한 힘은 변함이 없었고, 녀석이 앞발을 휘두르자 살수는 달려들던 속도보다 빠르게 튕겨 나가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쿠우웅―!
정적이 내리깔렸다.
피투성이가 된 살수가 후들거리는 고개를 들어 주원장을 바라봤다.
물샐틈없이 둘러친 인간의 벽.
정원과 처소를 지키던 모든 병력이 집결하여 주원장을 감싸고 있었다.
암살은 실패했다.
‘안… 돼. 저자… 저자를 죽여야만….’
일군을 공포에 떨게 만든 살수가 고개를 떨궜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주원장의 앞을 막아섰던 병사들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악몽 같은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니, 그런 줄만 알았다.
“케케케. 이거, 이거. 서달과 상우춘이 없는 데도 실패한 건가? 역시 도통 쓸모가 없는 놈이라니까?”
검은 가면 위로 양각된 새하얀 뱀.
빽빽하게 들어찬 병사들 위, 자그마한 사내가 대들보에 매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