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아, 아니? 어느 틈에 저기에!”
병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지만, 침입자가 들어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니!
호위병들이 주원장을 철벽처럼 감싸며 뒤로 물릴 때, 마른 비가 부숴놓은 벽면으로 외부의 병사들이 밀려 들어왔다.
“치, 침입자가…! 누군가 저희의 머리 위를 가로지르며 침투를…!”
건물 바깥에 있던 병사들은 침입자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집무실 내부로 들어선 병사들이 천장에 매달린 사내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 저기 있다! 바로 저놈입니다!”
호위대장과 칠영이 살아 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지휘자들이 전멸하고, 마른 비와 살수의 싸움에 병사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감행한 침투였다.
마침 마른 비가 벽면을 통째로 부숴놨으니 침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병사들을 눈뜬장님으로 만들 은신술이나, 보고도 따라잡지 못할 경공만 갖추고 있다면.
“한 놈인가?”
소란 속에서 태연한 건 주원장뿐이었다.
그는 느긋한 태도로 침입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도 같은 목적으로 온 것이냐?”
그 물음에, 침입자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뒤에 이어진 대꾸에서 못마땅한 기색을 읽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가? …것이냐? 케헥! 많이 컸군. 많이 컸어. 길바닥이나 전전하던 비렁뱅이 주제에. 하긴 그분께서 의도한 바였으니 당연한 일인가?”
살수의 칼날이 코앞까지 다가와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주원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변화를 즐기듯 침입자는 천천히 말했다.
“제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줄 아는 모양이지? 건방짐이 아주 하늘을 찌르겠어.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야. 객지에서 비명횡사할 놈을 거둬줬더니 감히 딴마음을 품어?”
‘눈치챈 건가!’
이를 지그시 깨문 주원장이 침입자를 노려봤다.
“쓸데없이 혓바닥이 길구나. 내 목숨을 취하러 온 거라면 군소리 말고 내려와서 덤벼라.”
침입자는 빤히 보이는 도발에 걸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순순히 시인했다.
“안 돼. 안 돼.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이 숫자를 어떻게 이겨? 저놈처럼 암습을 한다면 모를까, 정면으론 어림도 없지. 난 바보가 아니야.”
침입자는 그렇게 말하며 정신을 잃은 살수를 흘겨봤다.
“기회를 줬건만 결국 실패했네. 형편없는 쓰레기 같으니라고.”
슈아아악― 퍼억!
침입자는 느닷없이 비수를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건 기절한 살수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움찔했던 호위병들의 눈이 커졌다.
“무, 무슨 짓을….”
같은 편이 아니었나?
눈치로 봐선 암살을 사주한 당사자인 모양인데 왜….
피칠갑을 한 살수는 살아 있는 고깃덩이 같았다.
기절한 와중에도 통증을 느꼈는지 꿈틀댔고, 침입자는 그걸 보며 키득댔다.
“케케. 화풀이야, 화풀이. 너희의 왕이 깝죽거려서 기분이 나쁘잖아.”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주원장을 해코지할 수 없으니 엄한 대상에게 분을 풀었다는 소린데….
여기에 나타난 목적이 무엇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 가면… 투주와 무슨 관계지?”
옆구리를 움켜쥔 마른 비가 일어섰다.
검은 바탕 위로 도드라진 백사.
침입자가 쓰고 있는 가면은 야전단의 것과 같았다.
침입자는 놀란 눈치였다.
“투주? 야투를 아는 놈이냐? 그런 놈이 왜 여기에…? 아! 야투에 침투했던 세작이 이쪽과 연관된 것 같다고 했었지! 케케, 이걸로 확실해졌군.”
침입자는 야투의 일을 전해 들은 듯했다.
그가 혼자 고개를 끄덕일 때, 마른 비는 그의 가면을 살피고 있었다.
‘뱀의 크기가 저 정도면…!’
눈대중으로 볼 때 침입자의 가면에 그려진 백사의 크기는 투주의 것과 비슷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투주와 동급이라는 뜻…!’
온 정신을 기울여야 할 상대였다.
부상을 입은 상황이니 더더욱.
마른 비는 바짝 긴장하며 자연기를 끌어올렸다.
침입자는 그런 마른 비를 흥미로운 눈으로 훑었다.
“가만…. 권각을 쓰고, 백호를 부리는 야만인? 호오… 너구나! 투주를 물 먹였다는 녀석이!”
침입자는 고개를 돌려서 주원장을 노려봤다.
“네가 보낸 거였구나! 처음부터 작심하고 일을 벌인 거였어! 고얀 놈 같으니라고! 언제 이런 놈을 휘하에 들였지?”
무언가 오해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마른 비도, 주원장도 침입자의 오해를 바로잡아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혼자 떠드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교를 통틀어도 소교주를 제외하면 젊은 층에선 당할 자가 없을 거라더니…. 정말 그렇군. 정말 그래. 제조소… 아니, 야투를 날려 먹고 늘어놓는 구차한 변명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주원장이 자신의 소속을 눈치챘기 때문일까?
침입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를 언급했다.
하지만 실수가 있었으니, 마른 비는 그가 흘린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제조소?’
제조소라면 무언가를 만드는 곳이란 뜻인데…….
자금을 끌어 모으는 것 외에 야투의 용도가 따로 있던 걸까?
지하에서 느꼈던 괴생명체?
야투를 운영했던 진짜 목적이 그걸 만드는 거였나?
현재로선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마른 비가 머리를 굴릴 때, 호위무사 중의 한 명이 소리쳤다.
“침입자 주제에 무슨 쓸데없는 소릴 늘어놓는 거냐! 여기가 네 안방이라도 되는 줄 아는… 컥!”
호위무사는 주원장에게 접근한 위험요소를 두고 볼 수 없어서 나선 것이었지만, 그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빛이 번쩍이는 순간, 그의 목구멍엔 비수가 박혀 있었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딜 건방지게 끼어들어? 주가 놈을 죽이는 게 어려울 뿐이지, 잔챙이 몇 놈 지옥으로 보내는 건 일도 아니야. 볼일 끝나면 알아서 갈 테니 닥치고 있어라.”
호위들은 침음을 흘리며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주원장을 더욱 두텁게 감싸며 거리를 벌렸다.
호위들이 움츠러드는 모습에 만족한 듯 키득대던 침입자가 마른 비에게 말을 건넸다.
“이봐, 꼬맹아. 너, 뭘 받기로 한 거냐?”
“……?”
마른 비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침입자는 음침하게 웃었다.
“케케. 주가 놈을 돕는 대가로 받기로 한 게 뭐냐고. 너, 한족도 아니잖아? 저놈의 밑에 들어간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대가? 그런 거 없는데? 그리고 밑에 들어간 것도 아냐.”
침입자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진위를 가리려는 듯 마른 비의 얼굴을 살피다가 말했다.
“……아무 대가도 없이 이러고 있다고?”
“응.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침입자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느닷없는 제의를 건넸다.
“꼬맹이.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너 정도면 어딜 가든 엄청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갖고 싶은 게 뭐냐. 돈? 지위? 여자? 원하는 걸 말해봐. 그게 무엇이든, 네가 상상한 것 이상을 제공하마.”
“……?!”
난데없이 이게 무슨 말인가.
원하는 걸 줄 테니 자신들의 편에 서라는 말이 아닌가.
호위병들이 화들짝 놀라며 마른 비를 바라봤다.
침입자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원장을 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말했다.
하지만 마른 비가 등을 돌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호위대장과 칠영이 쓰러진 지금 마른 비는 호위의 핵이며, 침입자의 무력에 마른 비와 별비가 더해지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병사들이 긴장하는 건 당연했다.
호위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움켜쥘 때, 마른 비는 눈썹을 찌푸렸다.
“원하는 걸 줄 테니 뭐? 당신 편이 되라고?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미쳤어?”
마른 비는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침입자는 웃었다.
“케케.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뜻이 아니다. 천천히 두고 생각해봐. 절대 나쁜 이야기가 아닐 거다.”
침입자의 의도를 간파한 주원장이 나서려고 할 때였다.
마른 비가 허리를 세우며 한숨을 쉬었다.
“이봐. 당신. 날 바보로 아는 거야? 그런 말을 던져서 아저씨와 날 이간질하려고? 나 벌써 열아홉 살이거든? 그런 뻔한 수작이 통할 것 같아?”
여규가 들었다면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으리라.
‘눈치 없고 무식했던 우리 비아가 성장했어요.’ 하고.
침입자는 수작질이 통하지 않자 아쉬워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포위진을 완성한 병사들이 침입자를 덮치기 위해 슬금슬금 다가갈 때였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천장에 매달려 있던 침입자의 몸이 흐릿해졌다.
슈아아아악―
바람 소리가 들리고, 그의 신형이 다시금 또렷해졌다고 느꼈을 때.
퍼퍼퍼퍼펑!
접근하던 병사들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자욱이 깔리는 피 안개는 너무나 새빨개서 꿈만 같았다.
“케케케. 어딜 느려터진 것들이 다가와? 죽을라고.”
침입자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의 움직임을 포착할 능력이 되는 자들은 바짝 긴장했고, 그중엔 당연히 마른 비도 있었다.
‘빨라! 엄청나게…!’
침입자의 몸놀림은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마른 비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빠른 자를 꼽으라면 단연 매서운 눈인데, 좀 전의 움직임은 그에 준할 정도였다.
침입자는 대들보에서 떨어져 내린 후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았고, 가까이 있는 자들에게 발차기를 쏟아냈다.
머리를 터뜨리는 동시에 그걸 디딤돌 삼아 이동하며 다음 사람의 머리를 밟았다.
침입자가 제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폭죽처럼 터진 머리들.
뻔히 보면서도 잡아내기 힘들 만큼 가공한 속도였다.
“어… 어?”
무공 수위가 떨어지는 병사들은 그제야 상황을 인식하고 말을 더듬었다.
침입자는 모두가 경직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쐐애애액―!
‘아차!’
잠시 굳어버린 바람에 마른 비는 침입자의 움직임에 대응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곧바로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번개처럼 왕복한 침입자의 팔에는 축 늘어진 살수가 들려 있었다.
“케케케. 어리숙한 것들. 힘을 쓸 줄 아는 놈들은 많은데, 머리가 없구나. 이놈이 지휘자급을 모조리 죽이기라도 한 건가?”
언행은 기이하지만, 머리 회전은 빠른 자였다.
손에 든 살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침입자는 비수를 꺼내더니 갑자기 그의 몸을 찍었다.
“이 쓰레기가 감히 노부를 번거롭게 만들어? 생각할수록 열 받네!”
퍽! 퍽! 퍽!
기절한 살수의 몸이 흔들리며 피가 튀었다.
모두가 아연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올려다봤고, 침입자와 가깝게 있던 자들은 피가 얼굴에 튀는 걸 막기 위해 손을 들었다.
“후우… 이제야 기분이 좀 풀리네. 케케! 이놈은 아직 쓸모가 있으니 내가 데려간다. 주가야. 그 목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머지않아 그분을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침입자는 사나운 눈으로 주원장을 노려봤다.
그가 떠나려 한다는 걸 깨달은 호위병들이 날아올랐지만, 침입자는 일반 병사들로서는 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를 저지할 만한 능력이 되는 자들은 전부 주원장 곁에 몰려 있었으니, 현재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한 명, 아니 한 명과 한 마리뿐이었다.
“별비야!”
“크아아아앙!”
마른 비와 별비가 솟구치려는 순간,
“멈춰라! 그냥 보내!”
주원장이 황급히 둘을 제지했다.
마른 비와 별비가 덜컥 멈추고, 살수를 안은 침입자는 벽에 뚫린 구멍으로 유유히 빠져 나갔다.
벽을 막고 있던 병사들 쪽에서 피분수가 터지는 걸 목격한 마른 비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저씨! 왜…?!”
입을 꾹 다문 채로 침입자가 떠난 쪽을 노려보던 주원장이 말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한 가지 더해도 되겠나?”
“부탁? 무슨 부탁?”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듯 주원장은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번쩍 뜬 눈에선 결단의 빛이 흘러나왔다.
“지금! 지금 저자를 쫓아가 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