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24화 (224/463)

224화

마른 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별비와 함께라면 방금 막을 수도 있었어. 병사들까지 있으니까 확률은 더 높았을 거고. 도망치는 걸 놔두고서 지금 쫓아가라고? 왜 말린 거야?”

“뒤를 쫓아야 하기 때문이네.”

주원장은 그 이상은 설명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병사들이 듣는 앞에서는 더욱더.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걸 짐작한 마른 비가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나중에 말해줘. 그냥 쫓기만 하면 되는 거야?”

주원장은 그답지 않게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니. 우선은 살수를 구해야만 하네. 여기서 이유를 말할 순 없지만, 반드시 그를 구해야만 해.”

조금 전까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 살수를 구하라고?

그게 목적이면 방금 막아섰으면 되는 게 아닌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주문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거 말고 또 있어?”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지만, 살수를 대동했기 때문에 그자의 동선이 변할 거야. 침입자가 들르는 곳과, 접촉하는 자들을 파악해주게. 현재로서 기댈 곳은 자네뿐이로군.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네.”

주원장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걸 보아 넘길 수 없는 자들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당신을 지키다가 부상까지 입은 애한테 저런 괴물을 쫓아가라고? 거기다가 뭐? 살수를 구해?”

입구로 들어서며 호통을 치는 남자.

철중구였다.

전신을 칭칭 감은 붕대엔 피가 배어 있었다.

그의 옆에는 창백한 안색의 여규도 있었다.

“맞습니다. 무리한 요구예요.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문제가 아니라고요. 비아야, 우린 저분의 가신이 아니잖아. 암습을 막아준 걸로 충분해. 가지 마.”

가슴을 길게 베인 여규는 걷기도 힘들어 보였다.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의원에서 철중구가 붙잡은 경비대장에게 살수가 침투했다는 걸 들은 게 틀림없었다.

마른 비는 자신을 염려해 달려온 친구들을 보며 감격했다.

“비아야. 침입자가 도망칠 때, 그의 가면을 봤어. 백사의 크기로 볼 때 최소 환마와 동급일 거고, 그럼 칠대 장로 중 하나일 확률이 높아.”

말을 잇는 게 쉽지 않은지 여규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 몸놀림. 칠대 장로면서 그런 엄청난 경공을 구사하는 자라면 하나밖에 없어. 비마(飛魔). 마교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자 중원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경공의 대가야.”

철중구는 인상을 찌그러뜨리며 주원장에게 따졌다.

“들었수? 이 꼬맹이한테 쫓으라는 놈이 그런 괴물이라고! 당신, 왕이잖아? 지금 데리고 있는 호위무사들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그들을 시키는 게 사리에 맞지 않아?”

왕에게 내뱉기엔 너무나 거칠고 무례한 언사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주원장의 부탁이 과하다는 데에 공감하니까.

더군다나 주원장은 이미 마른 비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상황이었다.

어지간하면 물러날 텐데, 주원장은 그러지 않았다.

“내 호위들은 그를 쫓지 못한다. 서 장군과 상 장군이라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야. 비마라는 자를 따라잡을 수 없을 테니까.”

“하! 당신을 지켜야 하니까 못 보내는 건 아니고? 그리고 그 괴물을 쫓을 수 없는 건 비아도 마찬가지야!”

철중구의 항의에 주원장은 차분히 대꾸했다.

“맞다. 이들은 날 지켜야 해. 언제 또 다른 위협이 닥칠지 알 수 없으니까.”

“옌장! 귀한 목숨이시다? 그러면서 필요한 건 손에 넣어야겠으니 비아를 시키시겠다?”

주원장은 손을 들어서 성을 내는 철중구를 제지했다.

“부정하지 않겠다. 자네 말 그대로야.”

철중구는 뭐 이런 뻔뻔한 인간이 다 있냐는 얼굴이었다.

“시벌, 말이라도 못 하면…!”

“마저 들어라. 호위들을 보내지 못하는 건 그런 이유가 맞아. 하지만 우 소협에게 부탁한 이유는, 여기서 침입자를 쫓을 수 있는 사람이 그뿐이기 때문이야.”

말을 마친 주원장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본 곳엔 별비가 있었다.

“짐승이니 엄청난 후각을 지녔을 테지. 더군다나 이런 영수라면 스스로 사고도 가능할 테니 뒤를 쫓는 게 가능할 거야. 안 그런가?”

묻고 있지만,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투였다.

주원장과 눈이 마주친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적을 떠올린 순간, 그도 별비의 후각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네. 이번 한 번만 부탁하지.”

“시벌! 정말 미안하면 그딴 부탁을 하지 말아야지! 윗대가리들은 원래 이렇게 뻔뻔한 거야? 당신, 염치도 없어?!”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발작하려는 철중구를 말린 건 마른 비였다.

“중구, 그만해. 염려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갈 거야.”

“……?!”

철중구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대체 왜? 너 호구냐?”

“말했잖아. 아저씨가 만들려는 세상이 궁금하다고.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돕고 싶어. 그리고 그에 앞서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어. 나, 그 살수를 구하고 싶어.”

철중구는 멍한 표정이었다.

어버버하던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살수를 구하고 싶다고? 그 새끼가 오늘 몇 놈을 죽였는지 잊은 거냐? 나랑 규도 그놈에게 당한 거야!”

“알아.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해.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까 마주쳤을 때 묘한 느낌을 받았어. 그 사람,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내몰린 듯한….”

당연히 철중구는 납득하지 못했다.

“세상에 사연 없는 놈이 어디 있냐! 뭐가 됐든 수십 명을 베어 넘긴 놈이야!”

“네 말이 맞아. 그가 한 짓을 잊은 게 아니야. 이것 역시 느낌일 뿐이라 설명하긴 힘든데, 그를 꼭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또 그놈의 느낌 타령인가!

하지만 뭐라 반박하기가 힘든 게, 마른 비의 느낌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를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야생의 감각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용하기가 산신령 뺨따귀 후려치는 수준이었다.

철중구가 끄응하며 신음을 삼킬 때, 마른 비는 살수와 만난 순간을 되짚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에 스친 감정의 교류.

그건 정말 말로 풀어놓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필사적이고 처절하지만, 그만큼 애처로운 느낌.

적으로 만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저지했지만, 왠지 언젠가는 나란히 설 것만 같은 예감.

아군에게조차 소모품 취급받는 모습을 보자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해졌다.

‘그래. 일단 구하고 보는 거야.’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미래로 이어질 인연의 끈을 잡을 것인지 놓을 것인지는 지금 이 순간, 마른 비에게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충실하고 싶었다.

살수를 구한다.

일단 살려놓고 본다.

그리고 마주치는 순간 스쳤던 감정의 번뜩임이 어디로 흐를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주원장의 부탁을 받았지만, 지금 마른 비를 이끄는 건 오로지 그의 느낌과 선택일 뿐이었다.

“날 믿어, 중구. 다녀올게.”

“…….”

무슨 말을 더하랴.

이미 마음을 굳힌 놈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무엇보다 저런 눈빛으로 자길 믿으라고 하면 꼼짝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

철중구는 ‘시벌! 염병! 썩을…!’이라고 욕을 연발하다가, 그의 무사 귀환을 빌어줄 수밖에 없었다.

“후우… 이 몸으로 따라가 봤자 짐만 되겠지. 절대 무리하지 마. 비아야.”

여규도 마찬가지였다.

별비가 침입자가 남긴 냄새를 후각에 각인하는 동안, 주원장이 말했다.

“고맙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게 무엇이 됐든, 아무리 무리한 부탁이라도 자네의 청을 한 가지 들어주겠네. 내 목숨과 황제의 자리를 달라는 것만 아니면 말이야.”

이 순간까지도 허용 가능한 한계와 조건을 붙인다.

지독히도 철저하고 실리적인 남자였다.

철중구는 ‘고작 한 개? 황제가 되려는 인간이 더럽게 쪼잔하네.’라며 툴툴거렸다.

“다녀올게.”

마른 비는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별비와 함께 떠났다.

* * *

‘살수를 보낸 게 정말로 마교였다니…….’

철통같은 호위에 둘러싸인 집무실.

주원장은 촛불을 밝힌 채 고뇌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협조 요청을 수락한 거지?’

그는 ‘그 일’을 도와 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직은 자신이 다른 마음을 품은 걸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한 달 전, 음살로 의심되는 살수가 왔다갔음에도 긴가민가했던 이유였다.

서달에게 패한 것을 보고 음살에 대한 혐의를 지운 점이 크게 작용했지만.

그리고 실제로 자신을 습격한 건 음살이 아니었다.

‘한데 마교와 끈이 닿은 암살자다? 음살의 후인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 그건 차후의 문제다.

중요한 건 ‘그자’가 자신의 변심을 눈치챘단 점이었다.

‘설마… 알면서도 요청을 수락한 건가?’

그럴 리 없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원장이 아는 그는 변심한 걸 안 이상, 가만히 놔둘 자가 아니었다.

‘……요청을 수락한 후야. 그 후에 눈치챈 거다!’

천만다행인 건 그자는 지금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점이었다.

그렇기에 그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눈치챌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렇다면 약조도 무산된 거나 다름없다. 협검과 당가가 움직여도 마교가 빠지면 안 돼.’

상황이 복잡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기존의 인원을 대체할 자를 찾아야만 했다.

장사성이 무너지는 건 기정사실이고, 중요한 건 그 이후니까.

그리고 그자가 알게 된 이상, 계획을 앞당겨야만 했다.

황제가 되는 건 이제 욕망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돼버렸다.

‘너무 서둘렀나……. 아냐.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그자가 내 욕심과 그릇을 몰랐을 리 없어.’

이해의 일치.

그자도 대체할 자가 없으니 자신을 선택했던 거다.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

말 잘 듣는 충견으로 남을 것이란 기대.

지켜보다가 아니다 싶으니 소거에 나선 거다.

의문인 건 자신의 목을 딸 수 있는 확실한 패가 있음에도, 왜 덜 여문 살수를 보냈냐는 것인데…….

추측건대 지금 그자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듯했다.

‘마교의 내전이 내겐 천운으로 작용하는군.’

예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당분간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내전이 끝나기 전에 황제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손아귀에서 확실히 벗어나는 동시에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 살수… 무조건 구해야 한다.’

비마를 쫓아간 마른 비에게 모든 게 달렸다.

천하는 넓고, 모든 수를 동원한다면 어떻게든 대체할 패를 구할 순 있겠지만, 그보다 확실한 패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나.

자신을 습격했던 살수의 역량이라면 기존의 패를 대체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오히려 잘되었다. 잘하면 두 가지를 한 번에 처리하는 게 가능하겠어.’

살수가 소모품 취급당하는 걸 보고, 침입자가 도망치는 순간, 뇌리를 스친 번뜩임.

주원장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는 허공에 대고 짧게 손짓했다.

그러자 죽은 칠영을 대신하여 암중 호위를 맡게 된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협검과 당가에 사람을 보내라. 일은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호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원장은 생각을 검토하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지금부터 장사성과의 전쟁에 필요한 정보망을 뺀,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사람을 찾아라.”

“누굴 찾으면 되겠습니까, 주군?”

주원장은 고개를 들어 서쪽 어딘가를 바라봤다.

“은밀하게 중원을 휘젓고 다닌다는 마교의 타격대.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자. 마교의 소교주를 찾아서 내게 데려와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