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 * *
장강의 물결은 도도했다.
또한 장대하며 거침이 없었다.
지평선 끝까지 흐르는 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품었던 꿈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장강을 보며 천하를 꿈꿨던 사내는 그래서 오늘따라 스스로가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한심하구나.”
뱃전에 선 사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든 걸 꿈꾸었지만, 결국 모든 걸 잃고 말았다.
평생을 원에 대항하며 싸운 끝에 남은 건 영토와 수하들을 모조리 잃은 패장이란 딱지뿐이었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남하하는 그는 하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었다.
“박주(亳州)에 도읍하여 안휘성(安徽省)을 점령했을 때만 해도 홍건군의 뜻을 펼치리라 자신했는데. 결국은 쫓기는 신세가 되어 오왕에게 의탁하는구나.”
처량함이 묻어나는 자조였다.
옆에서 공손히 시립하고 있던 사내가 황망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심려치 마시옵소서. 고래로 영웅들의 삶이란 다사다난한 법이옵니다. 지금은 잠시 후퇴하지만, 전하께선 다시 일어나실 것이옵니다.”
군대를 지휘했던 장군이라도 되는 걸까?
사내는 화려한 갑주를 걸치고 있었고, 체구도 우람했다.
주군을 위로했던 사내는 무언가가 불만스러운 듯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전하께서 위란한 상황에 처했는데 마중도 나오지 않다니…. 스스로 오왕을 자처할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주원장, 그는 욕심이 큰 자입니다.”
송나라 황실의 후예를 자처하며 봉기했던 홍건군의 영수, 한산동(韓山童).
뱃전에서 한숨짓던 사내는 한산동의 아들이자 장강 이북에서 세력을 떨쳤던 소명왕 한림아였다.
과거에 주원장은 그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부원수의 직함을 받았고, 그로 인해 정통성도, 실권도 불분명한 나라에서 적당한 직위와 대의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하의 불만을 들은 한림아는 웃었다.
“지금 그는 장사성과 한판 붙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전장에 나가진 않았지만, 수하들이 싸우고 있는데 어찌 군왕된 자가 자리를 비우겠나. 그리 생각지 말게, 황 장군. 당연한 것이야. 오히려 나를 염려해 선박과 병사들을 보내오지 않았나. 이것으로 충분하네.”
하지만 군왕을 모시는 입장에선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림아의 밑에서 평생토록 종군한 사내, 장군 황일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하께선 항상 그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하십니다. 하지만 그자는 그렇지 않았죠.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어쩌면 전하에 대한 충성도 거짓일지 모릅니다.”
한림아는 뒷짐을 지며 장강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아마 그럴 테지. 아니, 분명히 그럴 거야.”
설마 수긍할 줄은 몰랐는지 황일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답답한 마음에 그만 실언을….”
한림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아닐세. 자네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지.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네. 자네도 알다시피 난세에선 힘을 가진 자만이 살아남는 법이야. 내가 그렇듯 그도 힘이 필요했을 테고, 힘을 키우기 위해 잠시 허리를 굽히는 건 대국적인 견지에서 타당한 판단이라는 게 내 생각일세.”
황일은 여전히 주원장에 대한 반감이 가시지 않은 듯했으나 주군의 의견에 토를 달 수 없어서 침묵을 지켰다.
한림아는 그런 황일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그는 분명 효웅(梟雄)과 간웅(奸雄)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사내지. 하지만 난 누구보다 그를 믿네. 그가 곽자흥의 수하일 때부터 그랬어. 지난번 장사성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그가 아니었다면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거야. 그가 지원군을 보낸 덕분에 위기를 넘기지 않았나.”
“그건… 분명히 그렇사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림아의 군은 장사성이 보낸 여진(呂珍)이 이끄는 군대에 패해 위기를 맞이했었다.
그때 한산동과 더불어 홍건군의 우두머리였고, 한림아를 소명왕으로 추대했던 유복통(劉福通)마저 목숨을 잃었다.
하마터면 한림아마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주원장이 보낸 지원군이 여진의 목을 친 것이다.
당시의 위급했던 상황을 떠올린 황일은 한림아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가 분명 도움을 주었지요. 허나 전하,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함께 북벌을 단행하자는 요청에도 그는 십 년간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단독으로 싸운 우리 군만 지리멸렬했지요. 우리가 오랑캐들과 싸우며 북쪽을 막아줄 동안 그는 자신의 배만 불리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간사한 놈입니다.”
말하다 보니 분이 치밀었는지, 황일은 이제 대놓고 주원장을 비방하고 있었다.
그 부분은 한림아도 서운한 게 많았는지 반박하지 않았다.
장강으로 고개를 돌린 한림아가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왕이 강남을 평정할 군세를 확보하지 않았나. 강남을 제패한 다음은 하나밖에 없지. 북벌. 누가 됐든 몽골 오랑캐를 몰아내고 도탄에 빠진 민초들을 구하면 되는 거야. 그 역시 홍건의 기치를 이어받은 남자가 아니겠나. 이제부턴 내 능력이 모자람을 인정하고 그를 도울 생각이네.”
황일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주군은 분명 주원장에 비해 군왕으로서의 자질은 모자랐다.
하지만 황일은 처음 봤을 때부터 주원장에게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고,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그 느낌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홍건의 기치?
주원장에게 과연 그런 게 있을까?
그는 그냥 먹고살기 위해 붉은 두건의 깃발 아래 들어왔을 뿐이다.
그리고 잠재했던 능력을 꽃피우며 승승장구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주원장은 지독하리만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남자일 뿐, 한림아처럼 천하대의를 염두에 둔 적은 없다는 게 황일의 결론이었다.
‘주군께서 강남을 평정하셨다면….’
한림아가 새로운 세상을 열 패자가 되길 바랐으나 현실은 원에게 패망하고 주원장에게 몸을 의탁하러 가는 처지였다.
그리고 거기엔 그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자신의 탓도 있다고 황일은 생각했다.
속은 쓰리지만,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일 때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황일이 감정을 털어낸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저 역시 과거를 잊고 전력을 다해 오왕을 돕겠습니다.”
두 사내가 마음을 다잡고 새롭게 시작될 내일을 그릴 때였다.
선박이 덜컹하는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렸다.
“뭐, 뭐냐! 무슨 일이냐!”
평생을 이용해온 장강의 물길이다.
이곳은 대형 선박이 걸릴 만한 장애물이나 암초가 없는 곳이었다.
한림아와 사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선박 위에는 피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커… 커헉! 주, 주군….”
안 그래도 전쟁에 패해 성한 곳이 없던 병사들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한림아를 따르던 수하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들의 등에는 아군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자들의 칼이 꽂혀 있었다.
“네, 네놈들이…!”
주원장이 보낸 병사들.
남쪽으로 도망 중인 한림아를 맞이하기 위해 파견한 자들이다.
완전 무장한 그들은 비무장 상태인 한림아의 수족들을 처참하게 도륙했다.
푸른 장강의 물결 위로 붉은 피가 넘실거렸다.
“주원장! 이, 이 쓰레기 같은 놈이…!”
황일이 대노하며 검을 뽑았다.
보자마자 상황을 짐작한 그는 머리끝까지 치솟은 분노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뚜벅, 뚜벅.
황일과 달리 아무런 표정이 없는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침착한 걸 넘어 냉기가 뿜어질 듯 차가운 얼굴에서 그의 성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십 대 중반쯤 돼 보이는 사내는 한림아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명왕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금일 전하의 목을 취할 표금산이라 하옵니다. 오왕 전하를 모시는 사냥개들의 수장이지요.”
‘표금산…!’
들어본 적 있다.
검을 쓰는 능력은 출중한데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놈이 있어 고민 중이라고.
아주 오래전에 술잔을 기울이며 주원장이 한 말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 특화된 놈이지요. 어린놈이 검을 기가 막히게 씁니다. 하지만 살수와는 다릅니다. 인간 사냥꾼이라고나 할까요. 사냥감으로 정한 표적의 피를 말리며 죽이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놈입니다.’
그런 놈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키니 내치라고 했었다.
하지만 주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희한한 건 그런 주제에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하다는 점이지요. 정확히 말하면 살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자에 대한 충성이겠지만. 저는 그 녀석을 키워서 저의 지위를 위협하는 숙적과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쓸 생각입니다.’
짧은 회상을 마친 한림아가 허탈하게 웃었다.
“허, 허허……. 오왕은 그런 놈을 나에게 보낸 건가? 지저분한 피가 묻은 사냥개들에게 나를 처리하라고?”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표금산은 웃었다.
밝은 의미의 웃음이 아닌 진득한 살의가 묻어나는 살소였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자들. 고귀한 피를 잇는 자들을 죽이는 맛은 각별하지요. 그건 여인과의 정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흥분제입니다. 전하가 죽어갈 때의 표정은 어떨지 기대가 큽니다.”
미친놈이었다.
너무나 담담하게 늘어놓는 말투엔 끔찍한 내용이 담겨 있었고, 비정상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자의 흥분이 묻어났다.
그는 한림아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주군께선 소명왕 전하에게 저를 보내는 걸 탐탁지 않아 하셨습니다. 강남의 정적들을 제거한 후 한동안 피를 보지 못한 저를 달래기 위한 조치이지요. 그러니….”
얼음장 같던 표금산의 얼굴이 꿈틀댔다.
붉어진 눈엔 가까스로 눌러 참던 욕구가 번들거렸다.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쳐서 날 즐겁게 해줘.”
피가 솟구치고, 장강 한복판에 멈춘 배에서 처참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똑, 똑.
“들어오라.”
동쪽 전선의 상황을 논의하던 주원장의 집무실로 사내 한 명이 들어섰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주원장과 눈을 맞춘 후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주원장 또한 눈짓으로 그를 내보냈다.
주원장은 정신없이 전략을 논의 중인 신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무척이나 피곤하군. 전선의 이상 징후가 포착되면 부르도록. 오늘은 먼저 쉬겠다.”
가신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주원장은 내원에 딸린 자그마한 정자로 향했다.
그는 미리 준비된 술상에 홀로 앉아 투명한 술을 술잔에 따랐다.
밤하늘에 휘영청 걸린 달을 향해 술잔을 들어 올린 그가 말했다.
“야속하게 생각하지 말게. 나 또한 미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으니. 허나 난세란 그런 것이 아니겠나.”
술을 쭈욱 들이켠 그가 탁 소리가 나게 술잔을 내려놨다.
“그대가 못다 이룬 꿈……. 내가 대신 이뤄 주리다. 그대처럼 순수하진 않으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야.”
주원장은 고개를 들어 북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읊조렸다.
“그러니 지금까지 그랬듯 내 일용할 양식이 되어 사라지시게.”
몇 마디 말로 오랜 인연을 정리한 그는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의 다 왔군. 그자가 살수를 구해 돌아오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그날, 주원장은 밤새도록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며칠 뒤, 한림아가 탄 선박이 장강을 지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전복되었다는 소식이 천하 각지에 퍼졌다.
그리고 그 시각, 추적에 나섰던 마른 비는 난감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