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추적
마른 비는 응천부 서쪽에 위치한 강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갈대숲 너머에는 푸른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반대편 땅이 간신히 보일 만큼 그 너비가 아득했다.
강무재의 인도를 받은 일행이 장사에서부터 배를 타고 이동했던 장강의 물길이었다.
“이런… 큰일 났네.”
장강 앞에 선 마른 비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비마로 의심되는 침입자는 발끝으로만 대지를 디뎠고, 땅에 남은 족적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희미했다.
하지만 사냥의 달인인 마른 비가 그 흔적을 놓칠 리 없었다.
발자취를 쫓아 여기까지 왔는데, 망망대해나 다름없는 강을 맞닥뜨린 것이다.
“배를 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하다니…!”
선박을 이용했다면 쫓을 방법이 없다.
별비의 후각이 아무리 뛰어나도 땅을 밟지 않으면 잔향이 남지 않기 때문에 뒤를 쫓는 게 어려워진다.
별비의 후각 범위 안에 있다면 추적이 가능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그 바깥으로 멀어졌을 확률이 높았다.
심지어 강을 오가는 배는 한두 척이 아니었고, 세찬 강바람이 냄새를 쓸어가고 있었다.
마른 비는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크릉.”
〔거기가 아냐. 이쪽이다.〕
별비의 울음에 마른 비는 정신을 차렸다.
바람이 기울인 방향과 반대로 꺾인 갈대들.
무언가가 빠르게 이동한 흔적이었다.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별비가 눈짓을 했다.
“아래로 방향을 틀었구나! 다행이야!”
곧바로 추적이 재개됐다.
강변을 따라 내려가던 마른 비는 침입자가 배를 이용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붉은 깃발을 단 군선들이 강 곳곳에서 검문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중한 시기이니만큼 배 하나하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주원장이 마른 비가 추적에 성공할 거라고 확신한 이유였다.
‘쫓을 수 있어!’
흔적은 계속해서 아래로 이어졌다.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는 걸 확인해준 건 핏자국이었다.
마른 비는 살수의 것으로 보이는 핏자국을 드문드문 발견했고, 그건 제대로 뒤를 쫓고 있다는 증거였다.
문제는 상대의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점이었다.
전속력으로 쫓아왔음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공의 대가라더니 과연 그럴 만했다.
별비가 더욱 속도를 올리는 걸 보며, 마른 비는 생각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뚜렷한 목적지 없이 이동할 리는 없지 않은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데려간 걸로 보아 침입자는 살수를 살릴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그럼 위중한 상처를 입은 그를 치료해야 할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걸음을 재촉하던 마른 비가 갑자기 우뚝 멈췄다.
『별비야! 숙여!』
마른 비의 언령을 들은 별비가 자세를 낮추며 몸을 숨겼다.
지금껏 거쳐 온 곳과 다를 바 없는 갈대숲.
겉으로 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마른 비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있어!’
뭐냐. 뭐가 이런 느낌을 주는 거지?
정면을 노려보던 마른 비는 눈앞에 펼쳐진 갈대숲 곳곳에서 인간의 숨결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매복…!’
침입자가 흔적이 남는 걸 신경 쓰지 않고 내달린 이유가 이거였다.
추격자가 있더라도 뿌리칠 자신이 있으며, 만약 따라붙더라도 처리할 병력을 숨겨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매복자들은 마른 비가 이미 경험했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야투. 야전단과 비슷해!’
야투의 장원에서는 기척을 알아채는 데 그쳤다.
하지만 야전단의 실체를 겪은 마른 비는 매복자들이 지닌 본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옷이 몸을 가리듯, 주술에 가까운 무언가가 매복자들의 진기가 새어나가는 걸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건 낯익은 기운이었다.
마기(魔氣).
매복자들은 마기를 숨길 수 있는 가면을 뒤집어쓴 마교의 인물들이 분명했다.
‘기운이… 지저분해.’
마교 무인들의 내공이 정순하지 않은 이유.
중원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만한 사실을 모르는 마른 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교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율법, 강자지존.
마교에선 힘이 곧 정의며, 모든 것에 앞서는 절대 원칙이나 다름없었다.
강하면 모든 것을 손에 넣고 군림할 수 있다.
강해지기 위한 수단은 묻지 않는다.
싸움법이나 무기의 선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공의 축적에 있어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마교에는 속성으로 내공을 쌓는 기법이 무궁무진하며, 그중엔 마른 비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기괴한 방식들도 존재했다.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힘을 키운 마교인들은 마른 비에게 근원적인 거부감을 주었다.
물론 마교에서도 상위에 위치한 강자들은 내공의 정순함을 중요시하지만, 이들은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멀미가 날 정도로 혼탁한 기운을 접한 마른 비는 인상을 찡그리며 적들의 전력을 가늠했다.
‘……많아. 그리고 강해. 포위되면 위험할 거야.’
그래도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고수들이란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자들이 진형을 짜고 달려들면 별비와 함께 싸우더라도 위험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천인대쯤은 찜쪄먹을 강자들이 갈대숲에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크게 곤란한 표정이 아니었다.
‘전면전에 특화된 자들….’
이들은 주원장을 암습했던 살수와는 다르다.
정면에서 적을 뭉개기 위해 단련한 무인들.
그렇다면 방법은 있다.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려 별비를 바라봤다.
벗의 의중을 눈치챈 별비가 인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왼쪽. 네가 오른쪽.』
마른 비는 서서히 지형에 녹아들며 말했다.
『별비 너도 느껴지지? 이들에게서 나는 악취에 가까운 피 냄새……. 봐줄 필요 없어. 사냥을 시작하자.』
둔덕이 하강하는 지점에 굴을 파고 들어앉은 마교의 무인은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었다.
천산에 있을 때는 마기를 숨기는 것 따위 수련한 적도, 고민해본 적도 없다.
목숨을 걸고 수련한 힘을 왜 숨겨야 한단 말인가.
마음껏 힘을 드러내고, 그에 걸맞은 쾌락과 영화를 누린다.
약육강식은 태고부터 정해진 섭리였다.
하지만 중원에 나온 순간부터는 그럴 수 없었다.
이곳은 자신과 같은 마교도들을 배척하는 곳이었고, 마기를 드러내는 순간 공적으로 몰려 사냥당하기 딱 좋았다.
나약한 놈들이 화려한 도시에서 희희낙락할 때, 자신은 풍찬노숙하며 명령을 수행하기 바빴다.
비마의 명이라지만, 진심으로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가면…!’
마기를 가려주는 가면을 지급받은 후로, 이걸 벗은 건 손에 꼽을 정도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매복을 하려면 기운을 억누르고 쥐새끼처럼 숨어 있어야 했다.
가면은 마기를 가려줄 뿐, 기운의 강약까지 숨겨주진 못하니까.
무공을 수련할 때를 제외하면, 인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그에게 굴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행위는 굉장한 짜증을 유발하는 일이었다.
툭!
그때,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뭔…?!’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거의 동시에 눈이 커졌다.
‘돌멩이가 왜? 이런, 썅…!’
우두둑!
속으로 뱉다 만 욕이 사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목이 거꾸로 돌아간 그가 앞으로 넘어갔다.
사내를 죽인 장본인은 쓰러지는 몸을 조심스레 받쳤고, 소리가 나지 않게 내려놨다.
북쪽에서부터 죽음이 번지는 순간이었다.
스르륵― 푸푹!
인간은 약하다.
몸통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것만으로 숨이 끊긴다.
그 구멍이라는 게 별비에게 있어서나 작다는 게 문제였지만.
별비는 풍경에 녹아든 채 기동했고, 왠지 격앙돼 있는 인간들의 몸에 발톱을 찔러 넣었다.
느껴지는 기운은 하나하나가 상당한데, 묘하게 정신이 흐트러져 있다.
살짝 우회하여 뒤를 잡는 것만으로 인간들이 죽어 나갔다.
중원에 나온 이후 계속해서 몸을 숨겨왔던 별비의 은신은 어느새 어스름의 경지를 넘보고 있었다.
실전을 거듭한 마른 비가 성장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스르륵―
‘좌전방. 둘.’
퍼억! 우두둑―
‘우측으로 번갯불의 기동거리만큼. 여긴 올빼미 사냥으로.’
퍼- 퍼어억!
죽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비마는 수하들을 이곳에 숨겨선 안 됐다.
바람이 소리와 냄새를 지우고, 갈대가 시야를 가리는 이곳은 마른 비와 별비에겐 최적의 사냥터나 다름없었다.
반면, 전면전에 특화된 마교의 무인들은 절정에 이른 와족의 은신술을 잡아내지 못했다.
개활지였다면 마른 비를 곤란하게 했을 정예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고 있었다.
“자, 잠깐! 뭔가 이상해!”
매복해 있던 마교의 무인 하나가 허리를 세웠다.
은신술 따위를 배운 적은 없지만, 기척을 감지하는 건 능숙하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감각을 발달시키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으니까.
전면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눈에 띄게 줄었고, 감이 뛰어난 그는 이변을 눈치챘지만, 주변에 포진한 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병신이 매복 중에 무슨 짓을….”
“앉아! 이 멍청한 새끼야!”
동료들이 떠들건 말건 사내는 멍청히 서 있었다.
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언제 이런…!”
일어나니 보인다.
갈대숲 군데군데에 튄 피들이.
자신의 앞에 있던 동료들은 전멸한 게 틀림없었다.
“다, 다들 일어나… 뭔가, 뭔가가…!”
휘아아아악― 퍼퍼퍼억!
바람이 일고, 피가 튀었다.
발각된 이상 소리를 죽일 필요가 없었고, 마른 비와 별비는 번개처럼 움직이며 주변을 휩쓸었다.
홀로 서 있던 무인의 몸이 덜덜 떨렸다.
“뭐, 뭐야… 왜 다들 조용해?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크르르르….”
머리 뒤에서 훅 끼치는 뜨거운 숨결!
그건 절대 인간이 뱉을 수 있는 날숨의 양이 아니었다.
퍼어어억!
그가 마지막으로 목격한 건 태양을 무색게 할 푸른빛이었다.
“이, 일어서! 전부 일어서라!”
중간에서도 약간 뒤로 치우친 지점에 은신해 있던 비마대의 대주가 외쳤다.
저 앞에서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하얀 짐승.
지금 꿈을 꾸는 건가, 하며 눈을 비빈 순간, 수하의 몸이 찰흙처럼 부서져 버렸다.
육편과 뼛조각이 핏물과 함께 비산하는 광경은 소름이 돋도록 비현실적이었다.
수하를 산산조각낸 백호는 앞발을 휘둘러 피를 털었고, 매복해 있던 비마대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이, 이 무슨 개 같은…! 뭘 멍청히 얼어 있나! 당장 일어서지 못해!”
저게 어디서 튀어나온 괴수인지는 몰라도, 끔찍한 손실이었다.
매복 따위를 하는 게 아니었다.
비마 장로의 명이라도 이의를 제기했어야 했다.
자신들은 힘으로 적을 짓밟는 영광된 마인들이지, 쥐새끼처럼 숨어서 적을 기다리는 살수가 아니었다.
짜증을 삭이며 엎드려 있는 사이에 대원의 삼 할이 쓸려나갔고, 손도 못 써보고 이런 피해를 입은 건 비마대의 창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게 뭔지는 몰라도 만만히 볼 짐승이 아니다! 진형을 갖춰라! 둘러싸고 사냥을…!”
퍼퍼퍼억!
“컥…!”
“대, 대주님!”
뭐냐! 하나가 아니었나?
비마대주가 뒤를 돌아봤을 때,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던 최후방의 세 명이 무너지고 있었다.
“뒤…! 뒤다! 뒤에도 적이…!”
“커허허헝!”
귀청을 찢을 듯한 포효!
다시 앞을 돌아보자 백호가 앞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부아아악―!
하얀 발톱.
석림의 제왕에게 배운 별비의 비기가 햇살을 갈랐다.
거대한 앞발이 휘둘러지자 갈대숲이 횡으로 잘렸고, 몸을 일으키던 비마대원들이 무더기로 휩쓸렸다.
겨우 방어에 나선 자들조차 수수깡처럼 부러지는 애검을 눈에 담은 채 숨을 거뒀다.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지, 진형! 진형을 짜라! 힘을 모으란 말이다!”
비마대주의 외침은 피맺힌 절규와 같았다.
빠바바바박!
콩 볶듯 터져 나오는 타격음.
후방을 막아섰던 인원들이 하반신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갈대에 가려진 사각을 노린 솔잎 털기.
마른 비와 별비는 당황한 비마대를 앞뒤로 휩쓸었다.
“대주! 원진을 완성했습니다!”
혼을 쏙 빼놓은 암습과 익숙하지 않은 싸움법.
하지만 그들은 마교의 정예였다.
비마대는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젠 암습이건 뭐건 쉽게 당하지 않을 터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적은 고작 둘뿐이다! 어깨를 맞대고 차분히 대응해!”
비마대원들이 마른 비와 별비를 노려볼 때였다.
스르륵―
일인일수는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갈대숲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어, 어디로…?”
정적이 흐른다.
바람이 갈대를 헤치는 소리만이 비마대의 귓전을 간질였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등이 식어간다고 느낀 순간, 남쪽 저 멀리에서 갈대가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