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아차…!’
자신들이 이곳에 매복해 있던 이유.
혹시나 비마 장로님의 뒤를 쫓아올 병사들을 차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추격자는 없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설령 쫓아온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손에서 정리할 자신이 있었다.
서달과 상우춘이 전장에 나간 지금, 그저 그런 무장들이 이끄는 병사들 따윈 아침 해장거리도 못 되니까.
무엇보다 마기 때문에 은신에 서툰 자신들이 매복까지 하면서 추격 여부를 확인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살수를 구한 비마가 향할 곳.
거긴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릴 무시하고 장로님께 따라붙을 생각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마대주는 다급히 외쳤다.
“막아라! 저놈들이 장로님을 쫓게 놔둬선 안 돼!”
원진이 풀리고, 비마대가 움직인다.
비마의 직속 세력답게 그들은 주력(走力)이 뛰어난 자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다른 장로들의 직속 무력 단체에 비해 전투력은 떨어지지만, 경공이 빠른 만큼 적을 놓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비마대주는 너무 성급했다.
저 앞에서 갈대를 건드린 게 둘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걸렸어.”
비마대주가 달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비마대가 넓게 펼치며 움직일 때였다.
갈대숲에 납작 엎드려서 사냥감을 기다리던 마른 비의 신형이 솟구쳤다.
퍽! 빠바바박―!
“커… 허!”
중선오격.
다섯 줄기 섬격이 전면에 주의를 뺏긴 비마대주의 몸을 부쉈다.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마교 원로원 칠대 무력 집단 중 하나를 이끄는 남자가 이토록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경공을 펼치려던 비마대원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덜컥 멈췄다.
“대, 대주님!”
정면으로 붙었다면 골치 아팠을 상대를 마른 비는 상처 하나 없이 처리했다.
그리고 비마대원들이 경악하는 사이 또다시 갈대숲에 녹아들었다.
“대주니이임! 또 어디로 숨은 거냐! 빌어먹을 애새끼가…!”
“이, 이놈… 그놈이다! 환마 장로가 공들인 제조소를 박살 냈다는 야만인…!”
“야투? 그건 소교주의 짓이잖아?”
“아니야! 이놈과 저 짐승이 발단이야! 야전단의 경계를 뒤로 돌리고, 기관을 부숴놔서 소교주의 기습에 맥없이 무너진 거다! 이놈이야! 이놈이 원인이라고!”
마른 비의 정체를 눈치챈 비마대는 아연실색했다.
영수를 부린다느니, 약관도 안 된 애송이가 소교주에 필적한다느니 할 때는 코웃음을 쳤었다.
인간이 맹수를 부려서 전투에 활용한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진짜라고 쳐도 그게 조련사지, 무인인가.
무엇보다 짐승 따위가 아무리 강해봤자 단련된 무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리고 뭐? 소교주에 필적?
그거야말로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마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을 거치며 적으로 돌아섰지만, 소교주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남자다.
이십 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벌써 대종사의 품격과 위엄을 갖춘 걸물이었다.
그 나이에 교주의 진전을 제대로 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장을 뜻대로 움직이는 전술과 지휘력까지 갖춘 괴물이었다.
한데 어디서 튀어나온지도 모를 야만인 꼬마가 천마의 후예에 버금간다고?
치명적인 실패를 한 환마가 그답지 않게 추잡한 변명을 늘어놓는 거라고 비웃었었다.
‘진짜였어!’
사실이었다.
사실일 뿐만 아니라 들었던 것보다 더 엄청난 놈이었다.
암습이었다지만 대주가 손 한 번 까딱하지 못하고 절명하다니!
비마대원들의 얼굴이 하얘지건 말건 마른 비는 기회를 흘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스륵― 퍼퍽!
슈르륵― 우득! 우두둑!
황색의 사신이 갈대숲에 죽음을 파종하고 있었다.
지휘자를 잃은 비마대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반전한 백색의 영수가 당도했다.
별비는 진형을 해체한 비마대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고, 비마대는 눈에 보이는 적에게 발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살수에게 입은 부상과 비마대의 녹록치 않은 무력.
아무리 별비라도 마교의 정예를 홀로 감당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애뢰산 강변,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영혼을 포갠 이후로 별비는 혼자인 적이 없었다.
별비에게 주의가 쏠린 비마대는 무방비한 사냥감이나 다름없었다.
우드득― 뿌득! 빠가각! 퍼억!
척추가 무너지고, 다리뼈가 부서진다.
두개골이 함몰되며, 치명적인 급소들이 꿰뚫렸다.
중원 무림에 공포의 대명사로 군림하는 마교의 정예들이 스물도 안 된 와족의 사냥꾼에게 도륙당하고 있었다.
“모습…! 모습을 드러내라!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더러운 살수 놈아아아!”
주원장의 병사들이 검은 암살자를 두려워했듯 비마대에게 있어 마른 비는 형체를 잡을 수 없는 공포 그 자체였다.
어느덧 그들에게 살수로 인식된 마른 비는 대꾸 한마디 없이 검은 수리 식의 전투를 수행했다.
은신과 암습.
철중구는 치사하니 어쩌니 했지만, 전사이기 전에 사냥꾼이었던 마른 비에게 그건 더없이 훌륭한 싸움법 중 하나였다.
“이대로는 몰살하고 말 거야! 강변을 벗어나라! 갈대숲을 빠져나가!”
비마대의 부대주가 외쳤다.
좋은 판단이지만, 너무 늦었다.
그리고 갈대숲은 넓었다.
우드득! 뿌득! 퍼억!
“크악! 부대주님! 사, 살려…!”
“위치를 잡을 수가 없어! 이런 말도 안 되는…!”
부대주는 수하들이 얼마나 살아남았는지도 모른 채 정신없이 내뺐다.
그가 겨우 갈대숲을 벗어났을 때, 그를 뒤따른 건 하얗게 질린 다섯 명뿐이었다.
“이, 이게 전부냐? 나머지는? 다… 다 죽은 거야?”
부대주의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팔십에 달하는 비마대가 몰살해버렸다.
대주를 포함하여 손 한 번 쓰지 못한 채.
정도맹이든 사도련이든 중원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과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한데 야만인과 짐승 하나에게 이런 참패를!
부대주의 얼굴은 참담하다 못해 넋이 빠진 것만 같았다.
“뛰어… 뛰어라… 무조건 달려! 장로님께 비보를 전해라!”
살아남은 비마대 여섯 명이 일시에 튀어나갔다.
따로 의사를 교환할 것도 없이 그들은 여섯 갈래로 갈라져서 달렸고,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험난한 운남의 지형을 누비고 다닌 둘이었다.
팍! 파바바박―!
“커흥!”
퍼억!
‘벌써?!’
쐐애액― 퍽!
후아아악― 촥! 촤악!
“크아아악!”
“부, 부대주님…!”
‘셋? 아냐! 넷이다! 벌써 네 명이…!’
가속이 붙기도 전에 네 명이 당했다.
남은 건 자신과 수하 하나.
다행인 건 네 명이 당하는 사이, 자신들은 경공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렸다는 점이었다.
“별비야! 놓치면 안 돼!”
야만인 살수의 외침이 들렸다.
파바바바박!
흙과 자갈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발소리로 보아 짐승이 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곧이어 퍼억! 하는 타격음이 들렸다.
“으아아아아!”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전멸.
수하들은 다 죽었고,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부대주의 얼굴이 울 듯 말 듯 일그러질 때, 등 뒤에서 소름 돋는 포효가 울렸다.
“커허허헝!”
추아악!
화끈하게 타오르는 작열감!
별비의 발톱에 등이 긁힌 부대주는 잠시 휘청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고, 죽을힘을 다해 달려 나갔다.
‘사, 살았어! 살았다고!’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별비야! 비켜!”
쾌애애애액―!
작은 물체가 날아드는 소리.
곧 뒤통수가 터지는 화끈함과 함께 부대주의 의식이 끊겼다.
“후우… 놓칠 뻔했네.”
돌멩이를 집어던진 마른 비가 허리를 세웠다.
투석술(投石術).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렇지만, 와족 전사들에게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기술이었다.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자연의 모든 걸 이용하는 그들에게 투석술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비마대를 정리한 마른 비와 별비는 잠시 숨을 고르고 추적을 계속했다.
지금 자신들이 전멸시킨 자들이 마교에서도 손꼽히는 무력 집단이라는 것과, 이 사실이 알려지면 중원이 발칵 뒤집힐 거라는 걸 모른 채.
알아도 달라질 건 없었으리라.
마른 비는 비마의 뒤를 쫓는 데 집중하고 있었고, 두 번이나 마주치긴 했지만 그는 아직 마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상태였다.
“서두르자, 별비야.”
갈대숲이 끝나고, 탁 트인 강변이 이어졌다.
잡풀이 가득한 지역도 나타났다.
추적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달린 탓일까?
비마의 흔적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마른 비에게는 그가 지나간 길이 또렷하게 분리돼서 보일 정도였다.
한 번도 다른 쪽으로 빠지지 않고 계속 강을 따라 이동했기에 길을 헷갈릴 염려도 없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는 길 중간중간에 허름한 모옥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거기엔 피 묻은 붕대와 고름을 닦아낸 천이 버려져 있었는데, 아마도 살수를 치료한 듯했다.
주원장이 전쟁 중이라 추적자를 보낼 여유가 없다고 여겼거나, 비마대를 철석같이 믿은 모양이다.
이렇게 흔적을 지우지 않은 걸 보면.
덕분에 마른 비는 오직 속도를 올리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보이지가 않아. 더럽게 빠르네!”
사흘.
장강의 물길을 따라 남서쪽으로 이동한 시간이다.
강소성 서쪽 끝에 위치한 응천부에서 출발한 둘은 이틀 만에 안휘성의 동쪽 경계를 넘었다.
“허억, 허억…….”
마른 비는 물론이고 별비도 지쳐 있었다.
살수가 주원장을 습격한 날로부터 나흘.
부상을 입은 상태로 한잠도 못 자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전투와 질주를 계속했다.
이렇게 쫓지 않으면 비마를 놓치고 말 것 같다는 불안감이 마른 비를 쉴 수 없게 했다.
그리고 결국 따라잡고야 말았다.
장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숨을 고르는 둘의 앞에 마안산(馬鞍山)이 모습을 드러냈다.
“흔적이 없어졌어.”
정면에는 산이, 우측에는 장강이, 좌측에는 시가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세 갈래로 나뉘는 지점에서 비마의 흔적은 사라졌다.
“목적지에 다 왔다는 뜻이겠지?”
마른 비는 그걸 흔적을 남겨선 안 되는 지점에 다다랐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문제는 족적이었다.
길 위엔 흔적이 없다.
주변을 샅샅이 뒤진 끝에, 훌쩍 뛰어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거리에서 사람이 디딘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관도에 심어진 나무 위.
관도가 깔린 만큼 당연히 그건 도시로 가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바위나 나무 등 발자국이 남지 않을 만한 자연물에 사람이 디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일부러 이런 것만 골라 밟은 건가?’
굉장히 주의를 기울인 흔적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고개를 저었다.
‘속임수야.’
일단 부자연스럽다.
마치 이걸 발견할 만한 역량을 지닌 추적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찍어놓은 느낌이 강하다.
딱 집어 설명하긴 힘들지만, 목적지를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이동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슬쩍 남긴 듯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너무 가벼웠다.
경공의 고수라 할지라도 이 거리를 뛰었다면, 그리고 자신의 체구의 두 배는 됨직한 살수를 업고 있다면 좀 더 또렷한 자취가 남아야 한다.
나무가 패인 흔적에서 비마 정도의 체구를 지닌 사람이 홀로 남긴 발자국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길 위처럼 뚜렷하지가 않아서 그게 비마인지, 비슷한 다른 사람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 산인가? 아니면 강?’
강이면 심각해진다.
여기까지 와서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마른 비가 얼굴을 찌푸린 건 강변에 있는 자그마한 나루에서 비마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을 발견했을 때였다.
그건 세 갈래 길에서 비마 정도의 경공을 지닌 자가 전력을 다해 뛰었을 때 도달할 만한 거리에 찍혀 있었고, 족적의 깊이로 보아 자신보다 무거운 무언가를 들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아… 망했네.”
주변엔 따로 이동한 흔적도 없었다.
아마 준비해놓은 소선에 훌쩍 올라탔으리라.
성의 경계를 넘어와서 따로 검문을 하는 병사들도 없었고, 배에 몸을 실은 채 이동했다면 쫓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버젓이 발자국을 남겨 두었겠지.
‘실력 있는 추적자라면 도시 쪽으로 갔을 거야.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이쪽으로 온 자라면 놓쳤다고 생각할 거고.’
확실한 건 산으로는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처럼 도시 쪽이 속임수라는 걸 간파해도 여기서 배를 탔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낙담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엄청 공을 들여놨네.’
강으로 내뺀 이상 쫓을 방법도 없지만, 전혀 상관도 없는 도시 쪽에 추적자가 속을 만한 발자국을 남겨 두었다는 점에서 과할 만큼 주의를 기울인 게 엿보였다.
‘잠깐. 과할 만큼?’
뛰어난 추적자를 속이기 위한 흔적.
그리고 강변까지만 오면 뻔히 보이는 발자국.
혹시 있을지 모를 추적자의 실력을 감안하여 단계별로 모든 조치를 취해 놨다.
수준이 어떻든 좌절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아냐. 낙담하지 마. 지나치게 공을 들인 흔적. 그 말은…….’
이 근처에 목적지가 있는 게 확실하다.
방향만 제대로 잡으면 된다.
문제는 그걸 알 수가 없다는 것인데…….
마른 비의 고민을 해결해준 건 별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