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후욱, 훅…….”
어둠 속에서 안광이 빛났다.
살수는 몸을 일으키기도 힘든지 고개만 간신히 들어 마른 비를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는 지형에 녹아든 마른 비와 별비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 몸을 기댄 살수는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지만, 눈빛만은 고통을 모르는 사람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단해. 저 지경이 돼서도 바로 알아채네.’
역시 은신술로는 이자를 당할 수 없다.
천외천의 암살 비기를 지닌 자답게 보는 순간 실체를 간파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의식을 붙잡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마른 비가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
살수의 눈이 잘게 경련했다.
존재를 알아챘다고 해서 의문이 가시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친 놀라움.
살수의 눈에 의문과 경악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자가 왜 여기 있지?’
‘설마 날 죽이기 위해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비마의 경공을 따라잡았다고?’
‘동굴을 어떻게 찾은 거지?’
무수한 질문들이 살수의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마른 비의 언령은 그의 사고를 멈추며 더 큰 의문을 안겨주었다.
『또 보네. 구하러 왔어.』
“……?”
구하다니?
누구를? 나를?
……왜?
살수는 혼란스러웠다.
피를 너무 흘려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싶다.
죽일 듯이 달려들며 싸웠던 적이 뜬금없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
마교의 정예들이 들끓는 사지까지, 목숨을 걸고?
마른 비의 출현은 살수에게 자신이 착란 상태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케 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근데 당신, 생각보다 젊구나?』
일전에는 만나자마자 한판 붙느라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다.
상대의 은신술과 싸움법, 기술을 파악하기에 바빴다.
이렇게 들여다보니 그토록 막강했던 살수는 마른 비 자신보다 고작 두세 살 많은 청년이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살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마른 비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 의미를 깨달은 마른 비가 언령을 발했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일단은 여길 빠져나가자. 환마와 비마… 맞지? 저들이 눈치채면 우린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어. 움직일 수 있겠어?』
마른 비의 재촉에도 살수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마른 비가 빠르게 말했다.
『시간이 없다니까? 놈들이 근처에 있단 말이야. 움직일 수 있어, 없어?』
살수는 마른 비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난 갈 수 없다.”
갈 수 없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탈출을 돕는다고 하면 당연히 따라나설 거라 예상했다.
비마 덕분에 주원장에게 사로잡히는 건 면했지만, 기절한 상태로 칼까지 맞으며 납치되다시피 끌려온 게 아닌가.
살수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마른 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갈 수 없다는 거지? 도망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건가?’
주원장에게 달려들던 살수에게선 초조함과 절박함이 묻어났었다.
단순히 임무를 실패할까 봐 걱정이 돼서?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마른 비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그건 마치…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의 간절함 같았다.
『인질……. 누군가가 인질로 잡힌 거야?』
살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른 비는 확신했다.
‘맞구나…!’
마른 비는 잠시 말을 끊고 생각을 정리했다.
살수는 평정을 찾았는지 침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마른 비의 말에, 살수는 또 한번 흔들리고야 말았다.
『……비마가 당신을 대하는 걸 봤어. 내가 본 그자는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당신이 지키려는 사람을 돌려주지 않을 거야. 당신은 소모품처럼 이용당하다가 죽을 거고.』
살수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애써 무시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모를 것 같나?
안다. 알지만,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힘은 그들에 비해 너무나 부족했고, 세력은 전무했다.
약속을 지킬 거라 믿으며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그분만 무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당신이 살아야 해. 당신이 살아야 지키려는 사람을 구할 수 있어. 당신도 알고 있잖아?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서 인질을 돌려줄 놈들이 아니라는 거.』
마른 비는 확신했다.
살수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걸.
자연기가 그의 동요를 가감 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당신만이 아닐 거야. 저들에게 반감을 지닌 사람들이 또 있을 거라고. 살아남고, 그들과 접촉해. 일단 한 명은 내가 만나게 해줄게.』
누구를 말이냐?
살수는 눈으로 묻고 있었다.
『주원장 아저씨. 당신이 죽이려고 했던 왕 말이야. 내게 당신을 구해오라고 부탁한 게 그 사람이야.』
“……!”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주원장이 자신을 구하라고 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증거가 자신의 눈앞에 있으니까.
살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나도 당신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어. 이유는 묻지 마. 나도 모르니까. 그냥 그러고 싶었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처음 마주쳤을 때 묘한 기분이 든 거,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이성에 기초한 설득이 아니다.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는 막연한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이성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으며, 때론 이런 종류의 호소가 더욱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살수의 마음은 그의 눈빛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이 저들의 손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일단 살아남고, 소중한 사람을 구해. 일어서. 그리고 나랑 같이 가자.』
항상 그랬듯, 마른 비의 눈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마음을 읽은 살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음은 벌써 마른 비를 따라나섰지만, 한 번의 판단으로 지키고 싶은 이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만큼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른 비의 뇌리를 스치는 남자가 있었다.
『……소교주! 야투에서 환마를 공격한 남자가 마교의 소교주라고 했어. 그 사람이라면 당신과 한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하지만 살수의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격렬했다.
“소교주라고?! 당신, 소교주님을 만났나?”
전에 없이 극적인 표정 변화였다.
그리고 그건 그를 설득할 수 있는 길이 트였다는 말이기도 했다.
마른 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만났어. 그 사람이 이끄는 마교의 정예들이 환마를 공격해서 곤란에 빠뜨렸는걸. 환마가 여기 있는 것도 아마 소교주에게 당해서일걸?』
“……!”
살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소교주님이 중원에 나와 있다고? 심지어 저놈들과 싸우고 있어?’
교에 있을 때 감지했던 미묘한 기류.
설마설마했던 내전이 발발한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때 이미 진행 중이었을지 모른다.
교의 내부사정과는 동떨어진 자신만 몰랐던 일일지도.
아무튼 신강 땅을 벗어난 이후 들은 가장 반가운 소리 중의 하나였다.
소교주와 합류할 수 있다면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적이 약속을 지키기만을 바라며 입맛대로 이용당했던 살수는 이 순간 빛을 보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엉망진창인 몸을 일으켰다.
“내공이 봉인 당했다. 막힌 혈도를 풀어야 해. 도와줄 수 있겠나?”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살수가 마른 비에게 물었다.
육신의 고통쯤이야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지만, 내공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음을 사용하지 못하고 목소리를 냈던 이유였다.
『응. 할 수 있어.』
마른 비는 자신 있게 대답하며 살수의 등 뒤로 다가갔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이 요청에 당황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점창과의 전쟁 때 원승이 여규를 구하는 장면을 보고, 여행 중에 틈틈이 여규에게 혈도와 점혈에 대해 배웠기 때문이다.
문제는 점혈을 한 장본인이 비마라는 점이었다.
『고수들은 자신만의 점혈법이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할 수 있을 거야. 내공 봉인이라는 거, 결국은 자연스럽게 흘러야 할 기의 흐름을 강제로 틀어막는 거잖아?』
자연스러운 흐름.
대자연의 기운을 있는 그대로 활용하고 순리에 맞게 순환시키는 게 자연기의 요체다.
이치를 모를 때는 미지의 영역이었지만, 원리를 배우고 나니 그것만큼 간단한 게 없었다.
자연기를 연마한 마른 비에게 중원 무인들이 말하는 점혈은 전혀 특별할 게 없는 기예였다.
우우웅―
마른 비는 자연기를 집중한 손바닥으로 살수의 등을 훑었다.
그리고 찾아냈다.
기가 흘러야 할 통로에 들어앉은 이질적인 기운을.
비마가 주입한 기운들은 작은 공처럼 단단하게 뭉쳐서 기로를 가로막고 변경하여 살수의 내공을 엉망으로 헝클어놓고 있었다.
자연기에 능숙한 마른 비에게는 그 방해꾼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로 상쇄될 만큼만 정확하게…!’
외부로 발출한 내공은 대자연의 품으로 흩어지려는 속성이 있었고, 그렇기에 점혈을 통한 내공 봉인은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
피억압자를 묶어두기 위해 일정 시간마다 점혈을 갱신하는 이유였다.
비마가 주입한 기운은 처음보다 많이 흩어진 상태였고, 그만큼 마른 비가 흘려 넣어야 할 자연기의 양도 줄어들었다.
비마의 기운과 완벽히 상쇄될 만큼의 자연기.
까딱해서 자연기의 양이 커져버리면, 그때는 마른 비의 기운이 살수의 기로를 막는 꼴이 되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대… 단하군!’
마른 비가 혈도를 찍을 때마다 살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하나둘 막혔던 기로가 뚫림에 따라 내공의 순환이 원활해진다.
그건 마치 콱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뇌력으로 그림자를 움직여서 막힌 위치를 알려주려 했지만, 청년에게 그런 도움은 필요치 않은 듯했다.
마교 장로의 독문 점혈법을 손쉽게 풀어내는 청년.
심지어 상쇄시키는 기운의 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살수는 문득 청년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다 된 것 같은데?』
“음…!”
육신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진기!
완벽하다.
청년은 호언장담했던 대로 숨 몇 번 들이킬 사이에 비마의 점혈을 풀어버렸다.
「엄청나군……. 고맙다.」
암영기의 해방.
억눌렸던 내공을 되찾은 살수의 몸 주위로 새카만 어둠이 몰려들었다.
『당신, 상처가 심한데 괜찮겠어?』
마른 비는 새빨갛게 물든 붕대를 보며 염려했지만, 살수는 자신만만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여덟 살 때 이보다 더한 부상을 입고도 성인 삼십 명을 베어 넘겼으니까.」
살수의 전음은 담담했다.
자랑도, 허세도 아니었다.
그저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말할 뿐.
‘……여덟 살에 삼십 명을? 이 사람,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야?’
잠시 잊었다.
그가 왕을 노릴 정도의 암살자란 사실을.
마른 비가 새삼스러운 눈을 하는 사이, 살수가 앞으로 나섰다.
「서두르자. 비마가 점혈을 갱신하러 올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진하게 배인 피 냄새.
이자가 살인에 도가 튼 인간이란 건 분명하다.
하지만 덕창의 파락호들이나 성도에서 싸운 살수들처럼 역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생존을 위해 죽이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 처절함이 자연기에 실려 왔다.
마른 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난 마른 비야.』
살수는 멈칫하더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착각일까?
전음에 실린 그의 음성이 떨린다고 느꼈다면.
「……사영(死影). 내 이름이다.」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 봤다.
전사와 살수의 길이 맞닿은 순간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극적인 인연을 음미할 틈도 없이 찢어지는 비명이 정적을 갈랐다.
“끼아아아아악~!”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되듯 하나뿐인 통로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으… 저건 들을 때마다 섬뜩해. 광장 쪽으로는 가기도 싫다.”
“근처에 머물면 미치고 말걸. 그러니까 장로님들께서도 통로에만 병력을 배치하셨잖아.”
경비병들이었다.
그들은 분명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살수 놈, 아직 살아 있을까? 실려 올 때 이미 시체나 다름없던데.”
“살아 있겠지. 그놈이 어디 보통 놈이냐? 독종이란 독종은 전부 모인 본교에서도 그런 놈은 없어.”
“하긴. 그놈 눈빛 봤지? 그 꼴을 하고서도 살기가 풀풀 날리더라. 내공이 없어도 꺼림칙해, 그놈은. 얼른 확인하고 가자.”
경비병 두 명이 살수가 머물던 공간에 도착했을 때였다.
있어야 할 자가 없자 둘의 눈이 커졌다.
“어, 없…?!”
우드득-
뿌득!
마른 비와 사영.
어둠에서 튀어나온 손이 경비병들의 목을 꺾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