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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31화 (231/463)

231화

‘역시…!’

마른 비는 내심 감탄했다.

경비병의 목을 비튼 저 한 수.

사영의 실력은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든든하네.’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불과 나흘 전에 목숨을 걸고 맞붙었던 적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줄이야.

상대는 은신과 암습 분야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경지를 이룬 자였다.

절로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대단하군!’

감탄한 건 마른 비만이 아니었다.

그의 암습을 지켜본 사영도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자는… 암살자가 아냐. 제대로 무를 수련한 무인이다. 한데 중원의 무인들과는 뭔가가 달라. 마치… 생생하게 펄떡이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 아무튼 정면으로 마주 서서 적을 분쇄하는 자다.’

한데 방금 선보인 한 수는 뭐란 말인가.

자신에게 크게 뒤지지 않는 암습이었다.

살수의 싸움으로 가면 그 작은 차이가 절대 뒤집을 수 없는 결과를 낳겠지만, 이자의 특기는 암습이 아니었다.

‘나와 다르지만, 또한 비슷하다.’

자신이 살수임에도 특이하게 정통으로 검을 수련했듯, 이자는 자신의 싸움법에 은신과 암습을 끼워 넣은 모양이었다.

아니, 끼워 넣는 수준이 아니다.

이 정도면 중원 전체를 뒤져도 이자와 견줄 만한 살수는 손에 꼽을 게 분명했다.

‘괴물이군.’

역시 천하는 넓다.

신강을 나오기 전엔 소교주를 제외하면 젊은 층에서 자신을 당할 자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소교주조차도 살행에 나서듯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철저히 암습으로 맞선다면 크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로 오는 중에 우연히 맞닥뜨렸던 꾀죄죄한 낭인도 그렇고, 천하엔 드러나지 않은 강자들이 즐비했다.

부상을 입은 상황이었고, 치명적일 만큼 상성이 나쁘다지만, 사실 자신은 나흘 전에 이 청년에게 패한 거나 다름없었다.

‘마른 비라…….’

사영은 감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년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했다.

『시간을 지체했네. 가자!』

별비를 대동한 마른 비는 사영과 함께 미끄러지듯 어둠을 헤쳤다.

갈림길까지는 순식간이었고, 방향을 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

좌측으로 가면 중앙 광장이 나올 것이며, 중간에 환마와 비마를 마주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무조건 우측으로 가야겠지만, 문제는 그쪽에 뭐가 있는지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답은 사영이 주었다.

「비마에게 끌려왔을 때, 우측 통로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식료품 등의 물자가 들어오는 것도 봤지. 그쪽에 산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을 거야.」

『그럼 우측으로…!』

하지만 사영의 표정은 어두웠다.

「문제는 경계가 엄청나다는 점이다. 강 쪽의 입구는 발각될 가능성이 희박하니 거의 모든 병력이 산과 연결된 입구를 지키고 있어. 동굴 내부의 경비병들이 느슨한 편인 데 반해 저 위는 방심한 놈이 하나도 없을 거다.」

『그 말은….』

사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조건 발각될 거야. 너희 둘의 은신술은 대단하지만, 저쪽은 나조차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 정도다. 비마와 환마 같은 실력자가 없는데도 말이야.」

방금 분명히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 정도’라고 했다.

마른 비는 그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어렵다……. 그럼 당신 혼자라면 어때?』

사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가능하겠지. 한데 그걸 묻는 이유가 뭐지? 분명히 말하는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난 나를 구하러 온 사람을 두고 가버릴 만큼 쓰레기가 아냐.」

사영의 표정에선 진심이 뚝뚝 묻어났다.

그래서 마른 비는 더욱 홀가분해졌다.

『뭔가 잊지 않았어? 우리가 여기 어떻게 들어왔을 거 같아?』

「그거야….」

마른 비는 흔들리는 횃불을 받으며 웃었다.

『우린 빠져나갈 방법이 있어. 다만 그쪽은 당신이 어려울 거야. 무엇보다 환마와 비마가 있는 통로를 지나가야 해. 우린 어차피 오른쪽으로는 못 간다며? 나와 별비는 들어왔던 경로로 빠져나갈게. 당신은 우측으로 나가.』

「어떤 길이길래 너희는 되고 나는 안 되는….」

마른 비는 사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설명할 시간 없어. 곧 비마가 올 거야. 지금 바로 출발해. 각자 탈출해서 밖에서 만나. 그게 최선이야.』

사영은 진위를 가리듯 마른 비의 얼굴을 살폈다.

우려와 달리 마른 비는 진심인 듯했고, 그의 말처럼 시간이 촉박했다.

사영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바깥 어디에서….」

『우리가 갈 길은 빙 돌아가야 해. 강을 이용하게 될 거고. 놈들이 금방 눈치챌 테니 빠져나가는 즉시 응천부로 달려. 주원장 아저씨에게로 가는 거야. 우리도 그렇게 할 테니까 응천부에서 만나.』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들으니 미심쩍던 부분이 해소됐다.

사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알았다. 응천부에서 보자. 꼭 살아나와. 그리고… 고맙다.」

사영이 우측 통로로 멀어지자, 별비가 속삭였다.

〔잘했다. 살 놈은 살아야지.〕

마른 비가 작심하고 거짓말을 한 이상 사영은 알아챌 수 없었다.

가을 수리가 타인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감정에 영향을 주었듯이, 마른 비 또한 자연기를 가미해 거짓을 말했기 때문이다.

첩보와 잠입, 기만을 위해 특수한 목적으로 자연기를 활용하는 가을 수리의 방법을 마른 비도 흉내 낸 것이다.

〔강한 기운이 움직이고 있다. 비마란 놈인 모양이야. 곧 이리로 올 거다.〕

별비가 앞발의 근육을 풀며 뜻을 전했다.

좌로 가든 우로 가든 어차피 빠져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살 수 있는 놈이라도 살리고, 최후까지 항전할 뿐.

별비는 마른 비의 판단을 긍정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몰라.』

〔……?〕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날 따라와, 별비야.』

마른 비는 사영이 나간 우측 통로로 향했다.

그리고 원래 있던 삼거리로부터 충분한 거리를 둔 뒤에 멈췄다.

『은신에 집중해, 별비야. 이제부터는 운에 맡기는 거야.』

눈을 부릅뜬 마른 비가 비마가 오는 방향을 노려봤다.

간간이 설치된 횃불이 흔들렸고, 동굴치고는 넓은 통로로 경비병들이 드문드문 오갔다.

긴장으로 인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무렵, 기다리던 놈이 나타났다.

‘비… 아니, 환마?!’

비마가 아니었다.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건 환마였다.

‘어째서?! 사영의 금제를 갱신하기 위해 비마가 오는 게 아니었나?’

이러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비마라면 사영이 있던 곳으로 들어갈 테고, 놈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을 때, 놈을 지나쳐 중앙 광장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거기까지만 가면 살길이 열린다.

하지만 오고 있는 게 환마라면… 놈은 굳이 그쪽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빌어먹을…!’

옆으로 빠지는 길이 있기를 기대하며 물러서야 하나?

마른 비가 맹렬히 머리를 굴릴 때, 환마가 방향을 꺾었다.

‘어?!’

사영이 있던 방향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놈은 그쪽으로 들어섰다.

‘왜? 사영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건가? 경비병들을 보냈는데 굳이? 놈들이 온 게 얼마 되지 않았어. 조급하게 확인하러 올 이유가 없는… 아!’

사영의 내공에 금제를 가한 건 비마였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갱신이 필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비마는 피로를 풀기 위해 잠들었고, 주기적으로 깨서 귀찮음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비슷한 수준의 환마가 있지 않은가.

이제부터는 환마가 사영의 내공 봉인을 담당할 생각인 것 같았다.

‘이유가 뭐든 상관없어! 기회다!’

마른 비는 별비에게 눈짓했고, 은신을 유지하며 최대의 속도로 나아갔다.

팽팽하게 끌어올린 기감.

둘은 환마를 중심으로 원형의 탐지 범위를 상정했고, 발각되지 않을 거리를 가늠하며 원이 그리는 경계선의 끝자락에 붙어 전진했다.

환마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가상의 원은 점점 이동했고, 마침내 통로를 지나갈 만한 틈이 생겼다.

‘지금이야!’

스르륵―

가상의 탐지 범위에 오차가 있다면 끝장이다.

마른 비와 별비는 솜털까지 곤두서는 감각을 맛보며 전진했다.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

마른 비는 가상의 원에 닿지 않기 위해 우측 벽 끝에 바짝 붙어서 발을 뗐다.

‘됐어! 빠져나왔어!’

해냈다.

발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었다.

‘환마가 경비병의 시체를 발견하기 전에! 사영이 없다는 걸 알아채기 전에…!’

등이 축축하게 젖어온다.

언령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마른 비는 속으로 외쳤다.

‘달려! 별비야!’

은신 중이라서 낼 수 있는 속도는 한계가 있다.

지금도 저 앞에서 경비병 둘이 다가오고 있었다.

“살수를 확인하러 간 놈들은 왜 안 오는 거야?”

“보나 마나 그 안에서 농땡이 피우고 있겠지, 뭐. 장로님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곳이잖아.”

“하긴. 그 안에서 최대한 머물다가 나오는 게 현명하지. 우리도 그러자.”

교대조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디서나 있을 법한 ‘상관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신공을 계획 중이었다.

저들은 알까?

곧 동굴은 물론이고, 산 전체가 뒤집어질 거라는걸.

마른 비는 길을 이쪽으로 잡은 이상 곱게 나갈 생각이 없었다.

스르륵―

‘빨리! 더 빨리…!’

비마가 자고 있는 곳으로 통하는 길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였다.

“이노오오옴!!!”

대로한 외침이 동굴을 쩌렁 울렸다.

“살수가 도망쳤다! 전원, 특급 경계 태세를 취하라!”

내공을 실은 환마의 명령이 동굴 전체를 흔들었다.

저 뒤에서 막강한 기운이 통로로 홱 튀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야! 분명히 이 주변에 있다! 동굴을 샅샅이 뒤져서 놈을 찾아라!”

공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있을 리 없는 침입자를 방비하는 데 지쳐서 느슨해졌지만, 경비병들은 하나하나가 마교의 정예였다.

그들이 바짝 긴장하고 내공을 끌어올리자 마른 비의 감각에 위험 신호가 울렸다.

하지만 경비병들의 이목은 어떻게든 속일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건 처음부터 끝까지 환마와 비마였다.

‘제발…! 우측으로 가!’

마른 비는 중앙 광장을 향해 최대 속도로 전진하며 빌었다.

환마가 자신들과 반대편으로 가기를.

다행히도 통로로 튀어나온 환마는 좌우를 한 번씩 돌아보더니 우측으로 몸을 날렸다.

“쥐새끼 같은 놈! 설마 나와 비마가 있는 쪽으로 탈출로를 잡진 않았겠지! 네놈의 은신이 아무리 뛰어나도 산을 벗어나진 못한다! 네가 마교의 정예들을 쥐 좆으로 봤구나!”

환마는 귀가 아플 만큼 크게 외치며 우측으로 내달렸다.

사영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심어주려는 속셈이었다.

마른 비가 겨우 한숨 돌릴 때였다.

화아아악―!

산 넘어 산이다.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기운이 급속도로 팽창한다.

비마.

잠들었던 노마(老魔)가 깨어난 게 틀림없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쾌애애애액―!

전력으로 경공을 펼친 비마의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그가 있는 통로를 지나쳐 왔음에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중앙 광장으로 향하는 길.

은신에 집중한 채 나아가는 마른 비는 조마조마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가라. 제발 환마 쪽으로 가!’

하지만 통로로 뛰쳐나온 비마는 마른 비 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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