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비마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자, 마른 비와 별비는 이동을 멈추고 그대로 굳었다.
발각되면 죽는다.
여기서 걸리면 절대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척추를 타고 짜르르한 전율이 흘렀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비마가 소리 높여 물었다.
‘아직 눈치채지 못했어…!’
마른 비는 벽에 등을 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척에 있는 경비병이 부동자세를 취하며 답했다.
“네, 넵! 장로님! 살수가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환마 장로님께서 놈이 사라진 걸 발견하고 추적 중입니다!”
비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도망이라고? 그럴 리가…! 그놈이 부상 때문에 미치기라도 한 게야? 우릴 거스르면 인질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고 했는데, 도망을 쳤다고?”
믿기 힘들다는 어조였다.
비마는 사영이 절대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던 모양이었다.
“도망가려면 진작 그럴 수 있었던 놈이다. 왜 이제 와서…?”
근처에 둘 때는 철저히 금제를 가하지만, 살행에 내보낼 때는 사영을 항상 온전한 상태로 풀어줬었다.
하지만 놈은 한 번도 허튼짓을 한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놈은 절대로 자신들을 거스를 수 없으니까.
비마는 인질로 내세운 자가 사영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데 탈출을 시도했단 말이지? 내 점혈까지 풀고서?’
그럼 그동안 금제를 풀 수 없는 척 연기를 한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은신술과 살법은 귀신 뺨치는 놈이지만, 순수한 무공만 따지면 놈은 자신의 아래였다.
홀로 점혈을 푸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초능? 상단전을 이용하는 빌어먹을 잡기술로 풀어낸 건가?’
영술인지 뭔지 하는 것도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걸로 아는데….
마른 비가 침투한 걸 모르는 비마로서는 사영이 비기를 감췄던 거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뭐든 상관없지. 어차피 산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이 잡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도망쳤다는 사실이 의외인 거지, 잡아들이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설령 소교주라고 해도 혼자 이 안에 들어왔다면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
비마는 환마가 향한 통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 회전이 빠른 환마가 저쪽을 택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해봐도 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자신과 환마가 있는 쪽으로 왔을 리는 없었다.
“케케케. 열심히 도망가 봐라. 잡히는 순간, 살아 있는 고깃덩이가 될 때까지 다져주마.”
비마는 특유의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신형을 날렸다.
마른 비가 있는 반대쪽이었다.
‘됐어!’
잔뜩 긴장했던 마른 비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별비도 힘이 들어갔던 어깨를 풀었다.
한고비 넘겼지만,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탈출은 지금부터니까.
『가자, 별비야!』
서둘러야 한다.
경비병들만으로도 어려운 상황인데, 환마와 비마가 전부 사영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저대로 놔두면 오래지 않아 붙잡히고 말 것이다.
사영은 물론이고 자신들을 위해서도 판을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장애물이 사라진 덕분에 마른 비와 별비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고, 순식간에 중앙 광장에 당도했다.
두쿵― 두쿵―!
진 마라.
경비병들은 저 징그러운 심장 덩어리를 그렇게 불렀다.
정확히는 거대 심장이 품고 있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또한 환마는 부화장이란 단어를 언급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저 심장은, 그리고 이 동굴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소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마른 비는 처음 본 순간부터 저걸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준비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별비는 마른 비의 의도를 파악했다.
강으로 이어지는 통로 쪽.
둘은 처음 들어왔던 길 위에서 은신을 풀었다.
그 순간, 불쾌한 감각이 마른 비의 신경을 건드렸다.
‘이 느낌은…!’
이미 한 번 겪었던 감각이다.
동굴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난 갈림길.
마른 비는 그곳에서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을 받았었다.
지금 느껴지는 감각은 그때와 흡사했다.
더욱 끈적거리고 훨씬 강렬할 뿐.
실체가 아닌, 기운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친다.
오한이 들 정도로 끔찍한 무언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해. 저 안에 있는 놈이다…!’
생물처럼 펄떡이는 거대 심장.
그 안에 있는 존재는 자신과 별비를 탐색하는 한편, 경고하고 있었다.
허튼짓하지 말라고.
마교도들이 진 마라라고 부르는 존재는 나름의 의지를 지닌 데다 사고까지 가능한 모양이었다.
‘가만… 경고? 경고를 한단 말이지?’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 전율적인 기세에 눌려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른 비는 오히려 자신감을 얻었다.
야생에서 나고 자란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맹수가 경고를 하는 건 세 가지 경우 중 하나라는 걸.
첫째는 배가 부르거나 귀찮아서 힘을 쓰지 않고 쫓아내고 싶을 때다.
이 경우는 경고하는 쪽이 상대의 힘을 압도한다.
둘째는 힘이 엇비슷한 경우다.
맞붙으면 둘 다 치명상을 입거나 죽을 게 예상되기 때문에 경고를 날리고 싸움을 피하려 한다.
마지막은 허세였다.
싸울 수 없는 상황이거나, 적을 이길 자신이 없을 때 엄포를 놓아서 적을 물러서게 만든다.
그리고 지금 이 녀석은 세 번째 경우, 정확히는 싸울 수 없는 상황에 해당한다고 마른 비는 확신했다.
『경고라니……. 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실수한 거야.』
마른 비는 웃었다.
어차피 한 방 먹일 생각이었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없지 않았다.
이 정도로 공포를 자극하는 존재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안 순간, 작은 망설임마저 날아갔다.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린 손에 대자연의 기운이 응축됐다.
“끼악! 키아아아악~!”
섬뜩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마른 비는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 안에 있을 존재에게 눈으로 말했다.
보고 있겠지.
그게 눈이든, 감각이든 네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안다.
내가 뭘 할지 궁금한가?
거기서 계속 지켜봐라.
곧 알게 될 테니.
쿠르르릉―!
푸른빛이 동굴의 어둠을 헤친다.
자연기가 잉태한 하늘의 창이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위협하고 있었다.
거대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두쿵― 두쿵― 쿵― 쿵!
빨라진 심장 박동은 위험을 감지한 괴생물체의 조급함이었다.
막아라!
누구든 좋으니 와서 저걸 막아라!
난 아직 움직일 수 없다!
심장 안의 존재는 절규했지만, 그 비명을 알아듣는 자는 없었다.
다른 목적을 위해 당도한 경비병들이 있을 뿐이었다.
“뭐, 뭐냐?! 이 기운은…!”
“푸른빛?! 살수다! 살수가 여기에…!”
“아냐! 살수가 아니다! 전혀 다른 놈이야!”
“저건 뭐야? ……흰 호랑이?”
“알려지지 않은 침입자가…! 언제 침투한 거지?”
다른 통로에 퍼져 있던 마교의 무인들이었다.
사영을 찾기 위해 동굴을 수색 중이던 그들은 마른 비와 별비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다른 목적 때문에 여기까지 왔지만, 그들은 괴생물체의 뜻대로 움직였다.
“무슨 짓을? 마, 막아! 저놈이 진 마라를 공격하려 한다!”
마른 비의 의도를 눈치챈 마교의 무인들이 날아올랐다.
십여 개의 통로에서 쏟아져 나온 경비병의 숫자는 사십 명에 육박했다.
“늦었어.”
뢰창은 한참 전에 완성됐다.
적들에게 가장 치명적일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푸르른 창이 뇌성을 울리며 쏘아지고, 달려들던 마교의 무인들이 휩쓸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갈가리 찢긴 그들은 시체도 남기지 못했다.
퍼어어어억―!
철창이 가죽 부대를 꿰뚫는 듯한 음향.
똑바로 날아간 뢰창은 거대 심장의 한복판에 박혔고, 이차로 치명적인 음파를 쏟아냈다.
꽈르르릉―!
“키, 키아악…!”
퍼퍼퍼억! 퍼억! 퍼퍽!
뢰창의 음파가 폭발하며 거대 심장을 물어뜯었다.
인형을 봉합하듯 이어 붙였던 심장 수천 개가 뜯기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광장을 뒤덮는 피 안개와 흩날리는 심장 조각들.
임계치를 넘어선 참상은 사람을 무뎌지게 하는가.
너무나 끔찍해서 도리어 담담해지는, 악몽 같은 광경이었다.
“허억, 허억….”
마른 비의 헐떡임이 고요해진 광장을 울렸다.
“무, 무슨……. 마라, 진 마라가…!”
살아남은 놈이 있는가.
뢰창의 직격 범위 밖에 있다가 음파에 휩쓸린 경비병이었다.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피가 줄줄 흘렀지만, 그는 깨닫지도 못했다.
완파된 거대 심장을 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댈 뿐이었다.
“별비야.”
목격자를 남겨선 안 된다.
마른 비의 부름에 별비는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콰악!
겨우 살아남은 몇 명의 경비병들이 별비의 발톱 아래 숨을 거뒀다.
나흘간 이어진 전투와 추적.
뢰창까지 쏟아낸 마른 비는 온몸이 삐걱댔지만, 곧바로 움직였다.
『시간이 없어! 찾아!』
마른 비와 별비는 쏜살같이 움직이며 광장에 연결된 통로들을 훑었다.
하나뿐일 리 없다.
산으로 나가는 출구가!
잠시 주어진 찰나의 시간 동안 찾아내야만 했다.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물자가 들어온 흔적….
무엇이든 좋다.
강 쪽과 사영이 나간 통로를 제외한 길을 찾아야만 살 수 있었다.
마른 비는 감각을 있는 대로 끌어올린 채 출구를 찾았다.
〔이쪽…! 이쪽이다!〕
이번에도 별비의 후각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동굴의 눅눅한 공기와는 다른, 향긋한 초목의 내음.
별비는 널찍한 통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 협로 앞에 멈춰 있었다.
『가! 바로 들어가! 별비야!』
마른 비가 언령을 쏘아내며 움직일 때였다.
동굴을 쩌렁 울리는 노성과 함께 엄청난 기운이 감지됐다.
“뭐냐! 부화장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이 목소리!
환마다!
예전같이 착 가라앉은 저음이 아닌, 광인이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였다.
마른 비가 협로로 들어서는 순간, 또 하나의 괴음이 들렸다.
“끼, 끼에에….”
‘맙소사! 살아 있어?!’
괴생물체였다.
진 마라라고 불리는 그것은 뢰창에 직격당하고도 소멸하지 않았다.
스멀거리는 어둠 속에서 육중한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냥 와! 놈들이 온다!〕
별비가 협로의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마른 비를 불렀다.
마른 비는 입술을 깨물며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쾌애애애액―!
철전(鐵箭)이 날아드는 듯한 소리.
마른 비가 협로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마가 광장으로 들어섰다.
비마가 충격을 받고 부들부들 떠는 사이, 또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환마였다.
“그, 으… 그어어어….”
참상을 목격한 환마가 비척비척 걸었다.
그는 상처 입은 짐승이 낼 법한 소리를 흘리며 항상 착용했던 가면을 벗었다.
생각보다는 젊은 얼굴.
오십 초반 정도의 사내는 지적이고 중후한 인상이었다.
끔찍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지금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부, 부화장이… 진 마라가……. 조, 존자께서 내게 맡기신 임무가…!”
환마는 정신이 나간 듯했다.
그리고 피가 빠진 것처럼 하얗게 질려서 중얼거렸다.
“사영… 그놈이 이쪽으로 온 건가? 어떻게… 어떻게 우리의 감각을 피한 거지?”
총 책임자인 환마와 달리 비마는 그를 돕는 조력자에 불과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냉정할 수 있었다.
“……그놈이 아니야.”
박살 난 심장을 노려보던 비마가 말했다.
그는 피와 심장 조각이 낭자한 광장을 걸어서 괴생물체에게 다가갔다.
“이 기술……. 사영이 아니다. 전혀 다른…… 어떻게? 침입자가 있었단 말인가?”
침입자!
너무 큰 충격에 동공이 풀어졌던 환마가 그 단어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침입자라고?”
곧이어 환마는 보았다.
장사에서 목격했던 이질적인 무공의 흔적을.
탁하게 풀어져 있던 눈동자에 불길이 타올랐다.
“이, 이것… 푸른 창! 야만인…! 그 찢어 죽일 야만인 새끼가…!”
“야만인이라고? 짐승을 데리고 다니는 놈 말인가?”
“그래! 그놈이다! 그놈이 사영을 따라온 거야!”
환마는 손까지 떨고 있었다.
평생을 통틀어 이토록 낭패를 본 일이 있었던가.
제조소에 불과한 야투를 잃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진 마라는 그분이 세우신 계획의 핵심이나 다름없었다.
심장이 폭발할 듯한 분노를 억누르며, 환마는 뢰창의 흔적을 살폈다.
“……강이다.”
비마 역시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기술이 발출된 방향… 강 쪽의 통로가 맞다.”
“침입한 경로도 그쪽인 게 분명해. 자네… 뒤를 밟혔군.”
비마는 울컥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자네 말이 맞아. 강 쪽으로 들어온 게 맞다. 하지만 어떻게?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뒤를 살폈다. 산 위의 감시병들도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어. 눈이 미치는 범위 내에 인간 따윈 없었다고! 그건 장담할 수 있어.”
환마와 비마가 별비의 후각을 어찌 떠올릴 수 있을까.
그들에겐 지금 이 상황이, 강 쪽의 입구가 발각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해일 따름이었다.
“어떻게 뒤를 따라온 거지? 추적자가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비마대를….”
그 순간, 비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