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꽈아아아앙!
환마와 비마의 기척이 감지되지 않자, 마른 비는 적들이 모이길 기다렸다.
그리고 단숨에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간헐적으로 마주치는 것보다 다수의 적을 밀집시켜 놓고, 강력한 기술로 깨부순다.
그건 적들의 숫자를 줄이는 데도 효과적일 터였다.
‘보고도 막지 못할 한 방!’
누적된 피로, 바닥난 체력, 소진된 자연기…….
잔기술을 여러 번 쏟아내기보단 큰 기술로 승부를 보는 게 현명하다.
그리고 속도가 아닌 힘이라면, 역시 우둔한 땅의 기술이 제격이었다.
천둥바위가 적진 한복판에 작렬하자 수십 명의 적들이 하늘을 날았다.
‘멈추지 마! 곧바로…!’
연격(連擊).
힘을 중시하는 바위 곰 특유의 기술로 적진을 허문다.
자연기를 박박 긁어모은 마른 비가 전진했다.
“하앗!”
강렬한 진각이 산을 울리고, 순정한 정권이 불을 뿜는다.
휘돌아 내치는 어깨가 적들을 부수며, 사선으로 내리꽂힌 뒤꿈치가 정수리를 쪼갰다.
와족 체술의 정수가 지금 여기 폭발하니, 권각에 실린 자연기가 노을 아래 황홀한 빛을 뿌렸다.
“거, 검이 안 통해!”
“크악! 이, 이놈! 몸뚱이가 어떻게 돼먹은…!”
마교의 무인들은 경력에 휩쓸리면서도 악착같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베이지 않는다.
범의 앙심으로 강화한 육체에 교룡갑까지 둘러치니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흠집도 낼 수 없었다.
마른 비의 육신은 침범할 수 없는 방패이자 적들을 깨부술 무기나 다름없었다.
쩌어어엉―!
마지막은 전방을 향해 휘두른 팔꿈치였다.
무소의 뿔이 작렬하자 십여 자루의 검이 하늘로 튕겨 나갔다.
줄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지는 자들은 단일 최강이라 불리는 마교의 정예들이니, 누구도 찾지 않는 안휘성의 야산에서 와족의 전사가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되는…!”
두려움을 모른다는 마교의 정예들이 주춤댔다.
한 번의 돌진으로 진형을 완파한 청년은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저놈…! 지쳤다!’
야만인 청년은 모든 힘을 쏟아낸 게 분명했다.
하지만 덤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마음은 이미 날아올랐지만, 발이 떨어지질 않는 것이다.
마른 비의 힘을 목격한 마교의 무인들은 넋을 놓았다.
‘대체 몇 명이 쓰러진 거냐? 돌진 한 번에 병력의 삼분의 일이 날아갔어! 어떻게 이럴 수가…!’
산 곳곳에서 지원 병력이 달려오는 중이고, 여기 있는 건 그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환마와 비마를 제외하면 누구도 저런 신위를 보일 순 없었다.
이 한 수로, 마른 비는 자신의 힘이 마교의 정예들을 압도한다는 걸 증명한 것이다.
“후우, 후욱…. 고작 이 정도야? 단일 최강 어쩌고 하더니, 별거 아니네?”
마른 비가 허리를 세우며 뒤를 돌아봤다.
지쳐서 몸을 들썩이지만, 그에게선 강자의 여유가 배어났다.
그와 눈이 마주친 적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걸 본 마른 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중구라면 물러서지 않았을 거야. 규는 말할 것도 없고. 마교… 실망스럽네.”
천하에 누가 있어 마교의 정예 앞에서 이런 망발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인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마교도들이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환마나 비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근처에 있는 네다섯 명 정도는 당장 목이 날아갔을 거다.
개인의 힘이 밀린다?
그럼 힘을 합쳐서 잡으면 된다.
모욕을 당한 마교의 무인들은 타오르는 분노로 두려움을 극복했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나 봐? 근데 어떡하지? 너무 늦었어.”
슈아아악―!
하얀 바람이 일고, 거대한 무언가가 적들을 지나쳤다.
마른 비는 쏜살같이 튀어 나가는 별비의 목을 붙잡고, 등에 올라탔다.
“싸움은 못 하던데, 달리기는 잘하려나?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달려야 할걸? 별비는 엄청 빠르거든.”
마른 비는 끝까지 속을 긁었다.
순식간에 점이 돼버린 별비를 보며, 마교 무인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자, 잡아!”
잡을 수 있을 리 없다.
어지간한 경공으론 별비의 그림자도 쫓기 힘드니까.
적들을 최대한 끌어들인 건 탈출을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돌파한 놈들보다는 포위진의 외부에서 밀려드는 적이 문제였다.
“커허헝!”
콰학! 푸화학―!
별비는 산을 달려 내려가며 길을 막는 적들을 앞발로 후려쳤다.
서쪽으로부터 번지는 노을이 산을 물들이는 가운데, 세상 어디에도 없을 백호가 흑의를 걸친 무인들을 도륙한다.
“마, 막아… 컥!”
“크학!”
“끄아아악!”
피가 터지고, 얼굴이 뭉개진다.
별비의 발톱에 갈린 적들이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마른 비의 신위를 목격하지 못해서일까?
뒤늦게 가세한 마교도들은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끝도 없이 달려들었다.
‘운이 좋았어!’
별비의 등에 올라탄 마른 비는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적들의 동향을 살폈다.
적들의 배치, 몰려드는 방향, 진형의 구성…….
야투 때와 같다.
마교의 무인들은 외부에서 다가올 적을 경계하며 포진해 있었다.
산 바깥에서 돌파를 시도했다면?
얼마 못 가서 쓰러졌으리라.
진형 내부에서 튀어나온 마른 비와 별비는 마교도들에게 있어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최대한 힘을 회복해야 해. 곧 그자가 올 거야.’
벌써 조짐이 느껴진다.
기감의 범위에는 잡히지 않지만, 좌측 저 멀리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꿈틀대고 있었다.
『부탁해. 별비야. 힘이 회복될 때까지만 고생해줘.』
“크항!”
별비는 걱정 말라는 듯 힘차게 울었다.
어느새 나타난 고목의 숲.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여기만 통과하면 산을 내려갈 수 있어!’
어느덧 해가 저물고 밤이 오고 있었다.
별비는 주저 없이 숲으로 진입했다.
슈아아악―!
‘어? 이건 뭐야? 암습?!’
마기를 지닌 자들은 암습이 어렵다고 하지 않았나?
별비가 숲으로 진입하자마자 사방에서 적이 쏟아져 내렸다.
경비병들은 이곳에서 마른 비를 잡을 생각인 게 분명했다.
‘아! 가면이 있었지…!’
정통 마교도들과 달리, 환마가 중원에서 키운 무인들은 기운을 죽이는 법을 안다.
그리고 마기를 숨겨주는 가면.
이들은 마교의 인물은 은신이 불가능하다는 상식을 깨뜨린 자들이었다.
야전단처럼 중원에서의 활동을 위해 환마가 마련한 병력이지만, 상대가 나빴다.
‘이게 암습이야? 어설퍼!’
며칠 전에 사영과 혈투를 벌인 마른 비다.
그와 겨뤘던 마른 비에게 이들의 암습은 가소로울 뿐이었다.
발톱이 흐르고, 권각이 솟구친다.
나무 위에서 쏟아진 적들은 마른 비와 별비의 간격에 들어선 순간, 뭐에 당했는지도 모른 채 튕겨 나갔다.
스팟! 파박! 슈아악―!
심지어 여긴 산이다.
전장이 산이나 숲과 같은 자연지형이라면, 마른 비는 누구에게도 밀릴 생각이 없었다.
마른 비의 지시를 받은 별비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쏜살같이 오갔고, 은신해 있던 매복자들은 허연 무언가를 보는 순간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추락해야 했다.
삐이이익―!
상당한 숫자를 뒤로 제쳤지만, 적들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름의 수단으로 의사를 주고받으며 줄기차게 따라붙는다.
사방을 둘러싼 원은 점점 정확하고 착실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별비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전속력으로 숲을 가로질렀다.
촤아아악―!
자연기를 머금은 발톱이 풍경을 절단했다.
산에 내려앉은 어둠 속으로 피가 흩뿌려지고, 토막 난 거목이 허리를 꺾었다.
쿠쿠쿵―!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는 별비의 너머로 평평한 지형이 보였다.
‘거의 다 왔어!’
마른 비는 별비의 털을 꼭 쥐고 거리를 가늠했다.
산자락에 해당하는 이곳만 지나면 개활지가 나온다.
거기서부터는 경공이 특출한 소수만 따라올 수 있을 것이며, 일반 무인들은 전부 제칠 수 있었다.
비마대를 전멸시킨 건 결과적으로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별비를 재촉하려는 순간, 섬뜩한 기운이 마른 비의 주의를 끌었다.
‘뭐지? 이 음침하고 기분 나쁜 감각은?’
고요하게 내리깔린 정적.
소리만이 아니다.
숨 막힐 듯한 적요함 속에 죽음의 기운이 감지됐다.
색으로 표현하자면 새카만 무언가가 눈앞의 지형을 안개처럼 뒤덮은 느낌이었다.
밤눈을 발동하자 어둠 속에 삐죽 솟은 것들이 보였다.
‘……비석?’
조악한 데다가 볼품없기까지 한 비석들이 둥근 흙더미 위로 솟아있었다.
운남에선 보기 힘든 풍경.
시체를 매장한 봉분들이 평평한 지형에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여규에게 들었어! 공동묘지라고 했었나?’
죽은 자의 뼈를 추려 항아리에 보관하는 와족과는 전혀 다른 풍습이다.
마안산은 안휘성 동부의 백성들이 시체를 묻는 장소이며, 평평한 지형마다 이런 묘들이 존재했다.
마지막 예우로 돌아가신 어른을 안치하지만, 먹고 사는 것도 벅찬 민초들이 다시는 찾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숨이 막힐 지경이야! 이런 지독한 기운이라니…!’
그래서 환마가 여기를 택한 것이다.
마라의 근원이 되는 사기(死氣)와 시기(屍氣)를 흡취할 수 있는 곳.
야투의 장원에 묻힌 시체로부터 마라를 제조했듯 여기선 묘지 하나당 한 구의 마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마라의 기운을 빨아들여 만든 게 진 마라였다.
마안산의 동굴은 마라의 제조소이자 진 마라를 위한 부화장이었던 것이다.
“어머니 대지의 품으로 돌아간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와족의 관점에서 이보다 지독한 짓은 드물었다.
망자들의 혼과 기운을 빨아들여 죽지도 살지도 않은 괴물을 잉태한다.
대체 무얼 위한 작업인지는 모르겠지만, 눈 뜨고 보기 힘든 악행이었다.
마른 비는 환마가 벌인 짓거리를 목격할수록 점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저기다! 놈들이 저 앞에 있다!”
마교의 무인들이 숲을 통과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멈췄을 뿐인데, 공동묘지를 둘러싼 사방에서 적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마른 비는 이를 악물고 별비에게 신호하며 날아올랐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끼아아아악―!”
그때, 땅 밑에서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울렸다.
지형을 꺼뜨리며 육중한 무언가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여긴 동굴과 묘지 간의 고저차가 크지 않은지 지하에 있던 마라가 마른 비를 잡기 위해 천장을 무너뜨린 게 분명했다.
두더지처럼 흙을 파헤치는 괴생물체를 상상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처음 동굴에 들어갔을 때는 가만있더니, 왜?’
환마다.
환마가 모종의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다.
마라는 땅 밑에서 올라오고 있었고, 마교의 무인들도 가까워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부리나케 도주했겠지만, 마른 비는 이 순간에도 요격을 떠올렸다.
『별비야! 날 따라와! 동시에 해야 해!』
별비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마른 비가 땅 위에 섰다.
별비 또한 벗의 옆에 자리했다.
“키에에엑~!”
거대한 손이 지면을 뚫고 나오려는 찰나!
“지금이야!”
꽈아앙!
콰아아앙!
마른 비와 별비의 자연기가 지면 아래서 폭발했다.
뿌리내리기.
그건 마치 머리를 내밀려는 두더지를 망치로 내리찍는 것과 같았다.
지상으로 나오려고 발버둥 치던 마라는 둘의 자연기를 직격으로 얻어맞고 침묵했다.
인간의 몇 배는 됨직한 징그러운 팔뚝이 땅을 뚫고 나오다 말고 축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