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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35화 (235/463)

235화

‘아직 살아 있어…!’

기관 장치에 보호받았다지만, 마라란 놈은 야투에서 뢰창을 맞고도 죽지 않았다.

같은 수준의 개체인지는 몰라도 이 정도로 끝날 리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축 늘어졌던 팔뚝이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아서 잠시 멈췄을 뿐, 숨통을 끊으려면 후속타가 필요할 듯했다.

“저기 있다! 동쪽 끝에 있는 묘지야!”

“저 팔뚝은 뭐냐! 설마 마라가 움직인 건가?”

하지만 마른 비에게 마무리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마교의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대의 병력이 모두 집결하여 뒤를 쫓고 있었다.

마안산으로 오르는 길과 동굴의 입구를 틀어막았던 병력이 모이자 그 숫자는 삼백 명에 육박했다.

‘너무 많아! 그냥 싸워도 어려운데, 진형까지…!’

쫓아온 자들 중엔 당연히 지휘자급도 존재했고, 그들은 합류하는 병력을 추슬러 진형을 꾸렸다.

이제는 전처럼 쉽게 쓰러뜨릴 순 없는 것이다.

심지어 동쪽에서 대기하던 병력이 나아갈 길을 막고 있었다.

“치잇…!”

마른 비는 발밑에서 꿈틀대는 마라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별비야! 시간이 없어!”

이제는 정말 속도전이다.

마른 비는 별비와 함께 날아올랐고, 동쪽을 가로막은 적에게 달려들었다.

“하앗!”

하늘에선 마른 비가, 지상에선 별비가.

와족 체술 소낙비가 머리를 부수고, 백호의 발톱이 육신을 난자한다.

남쪽의 변방, 운남에서 올라온 일인일수의 합공은 마교의 정예라도 버텨낼 수 없었다.

“크악…!”

“못 막아! 어디서 이런 괴물이…!”

뒤따라오는 본대에게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마른 비는 순식간에 진형을 허물었고, 곧바로 별비에게 올라탔다.

“뛰어! 별비야!”

“커헝―!”

비탈에서 도약한 백호의 등 뒤로 달빛이 쏟아졌다.

순백의 털에 월광이 스치니 은백색 광휘가 번졌다.

피아를 막론하고 넋을 놓을 수밖에 없는 광경.

미치도록 눈부신 자태였다.

“크아아앙!”

하지만 황홀한 모습과 달리, 마교의 무인들에게 별비는 하얀 악몽이었다.

평생토록 수련한 무예가 통하지 않는다.

검을 들어 올려서 방어해도, 무자비한 앞발 한 방에 모든 게 바스러진다.

발톱과 이빨로 피의 길을 만들어낸 별비는 마침내 마안산 산자락을 벗어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뭐가 저리 빠르단 말이냐…! 경공에 자신 있는 자들은 따라붙어라! 나머진 투검을 준비햇!”

파바바박―!

속도를 올리는 삼십여 명의 무인들.

별비를 따라갈 자신이 없는 자들은 멈춰서 자신의 무기에 내공을 주입했다.

“짐승이 나아갈 경로에 검우(劍雨)를 뿌린다! 벌집을 만들어줘라!”

지휘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백 자루의 병장기가 하늘을 날았다.

시린 칼날이 달빛을 가르며 쏟아지고, 어둠이 덮인 하늘에 은빛 반사광이 번졌다.

별비의 질주 경로를 앞지르는 검들은 하나하나가 주인의 의지대로 조종되는 비검(飛劍)이었다.

수백 자루의 검이 쇄도하자 하늘을 올려다본 별비가 낭패스런 울음을 흘렸다.

그때, 등에 타고 있던 마른 비가 외쳤다.

“멈추면 안 돼! 그대로 달려! 별비야!”

“크항!”

좋아. 널 믿는다.

저건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별비는 뜻을 전한 후 온 힘을 다해 달려나갔다.

마른 비는 내리꽂히는 검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냥은 못 막아!’

검 한 자루 한 자루에 필생의 공력이 담겨 있다.

과거 어설펐던 점창의 제자들과 달리 이들은 투검까지 절정으로 연마한 무인들이었다.

이 많은 검을 전부 막지는 못할 터였다.

지금까지 습득한 기술만으로는.

‘전방위 방어! 물샐틈없는 엄밀함! 모든 공격을 차단할 속도!’

창조해야 한다.

자신과 별비를 지킬 새로운 기술을.

그리고 마른 비는 그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

‘검막!’

점창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보았다.

검속에 기초한 놀라운 수비식을.

그렇다면 구현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야생에서 성장한 마른 비에게 모방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 기술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응용해!’

범의 앙심이 육체를 극한까지 강화한다.

교룡갑이 육신에 철갑을 입히고, 야생의 감각이 날아드는 검날을 포착했다.

올빼미 사냥이 팔에 속도를 더하며, 자연스럽게 편 손에는 회전의 묘가 담겼다.

‘비막(臂膜)!’

검 대신 양팔과 손바닥으로 구현하는 기예다.

강도와 속도, 유연함에 회전까지.

엄습하는 적의를 튕겨낼, 마른 비만의 전방위 방어술이 지금 탄생했다.

쩌저저정! 채챙! 챙강―!

수백 자루의 비검은 그 자체로 수백 개의 검기와 같다.

그 모든 것이 원을 그리는 팔에 부딪히며 상쇄됐다.

암석도 두부처럼 꿰뚫을 비검이 전부 가로막히자 마교의 무인들은 할 말을 잃었다.

“말도 안 돼! 맨몸으로… 저런 게 가능하단 말이냐…?!”

마른 비는 허벅지로 별비의 몸통을 조여 중심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상체만 기울인 자세로 비막을 펼쳐 마교 무인들의 투검을 모조리 차단했다.

양팔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못 잡는다……. 저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놈이 아냐….”

마교의 지휘자는 허탈하게 중얼댔다.

삼십여 명이 뒤를 쫓고 있지만, 저 숫자로는 야만인과 짐승을 잡을 수 없다.

아니, 애초에 따라붙는 것조차 쉽지 않을 터였다.

“천하 최강의 본교가 이런 치욕을….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을 길러냈단 말이냐!”

예상대로 뒤쫓던 자들도 하나둘씩 처지고 있었다.

백호의 등에 탄 야만인은 장애물 하나 없는 개활지를 유유히 가로질렀다.

그건 마교 무인들에게 지독한 조롱처럼 느껴졌다.

“놈은 진 마라를 목격했다! 그런 놈을 놓치다니, 이 치명적인 실책을 어떻게 해야…. 비마대만 있었어도 놈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응?!”

푸화하학―!

지휘자가 말을 흐릴 때, 북쪽 강변에서 무시무시한 마기가 일었다.

활화산 같은 분노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그것은 일대의 풍경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저, 저건…! 비마, 비마 장로님이시다!”

강 쪽을 수색하던 비마가 개활지를 건너는 마른 비를 포착했다.

북쪽 강변을 쩌렁 울리는 고함이 터졌다.

“이노오오옴!!!”

콰아아앙―!

질주를 위한 도움닫기.

곧 새카만 무언가가 산에 가려진 강변에서 튀어나왔다.

전신에 마기를 둘러친 비마는 개활지에 검은색 선을 그렸다.

“빌어먹을 야만인 놈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갈가리 찢어 죽여주마!”

침중하게 가라앉았던 마교 진영이 환호했다.

마교 제일의 경공 고수.

비마라면 놈을 쫓을 수 있다.

지휘자는 수하들을 독려해 마른 비를 쫓기 시작했다.

“달려라! 비마 장로님께서 오셨다면 놈을 잡을 수 있어! 전력으로 뒤를 쫓아라!”

슈아아악― 쐐액! 쐐애액―!

추격이 재개됐다.

새로운 기술을 만들고, 적들을 떨궈내서 기뻐했건만.

이번엔 마른 비의 얼굴이 굳을 차례였다.

“달려…! 달려, 별비야!”

말보다도 빠르다.

전력을 다한 비마의 속도는 입으로 뱉는 말보다도 빠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미친 듯이 따라붙는 비마를 보며 마른 비는 초조해졌다.

‘숲! 숲까지만…!’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유리한 전장에서 비마를 맞아야 했다.

별비가 강으로 방향을 틀었던 숲.

거기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활로가 열리지 않을까?

확실한 건 개활지에서 놈에게 따라잡히면 끝장이었다.

파바바바박―!

별비의 뜀박질을 따라 흙과 자갈이 튀어 올랐다.

백호의 질주는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빨랐지만, 적은 그 이상이었다.

비마가 지나간 길 뒤로 검은 궤적이 잔상처럼 남았다.

“네놈이 여기까지 왔다면 비마대와 마주쳤을 터! 바른대로 불어라! 내 수하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저토록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리면서도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점창의 대장로를 노렸던 설지굉이 어린아이로 느껴질 만큼, 전심전력을 기울인 비마의 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시시각각 좁혀지는 거리를 보며, 마른 비는 이를 악물었다.

‘못 가! 숲까지 가기 전에 잡히고 말 거야!’

어떡해야 하나.

숲이라면 일말의 승산이라도 있겠지만, 여기서 붙는다면 필패다.

체력과 자연기가 바닥을 친 지금은 별비와 함께 싸워도 승산이 없었다.

마른 비가 최후의 항전을 각오했을 때, 추격을 지연시킬 방법이 뇌리를 스쳤다.

‘한 번뿐이야. 두 번은 안 통하겠지만, 한 번이라면…!’

마른 비는 고개를 돌렸고, 최대한 얄미운 어조로 비마를 도발했다.

“비마대? 아, 갈대숲에 숨어 있던 사람들? 다짜고짜 덤비길래 싸웠지. 결과야 뭐… 당신이 짐작하는 대로야.”

보인다.

비마의 이마에 솟은 핏줄이.

조금 더, 조금만 더!

“그들이 당신 수하였구나. 저 뒤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싸울 줄을 모르더라. 하도 마교, 마교하길래 기대했는데 실망이야. 근데 당신을 보니 이해가 가.”

“……?”

마른 비는 비마를 똑바로 보며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당신, 약하다고. 게다가 느려.”

천하 최강을 자부하는 마교의 장로가 언제 이런 모욕을 들어봤겠나.

비마의 눈에 실핏줄이 서고,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마른 비는 그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쐐기를 박을 때였다.

“좀 더 분발해봐. 그 정도로 날 잡을 수 있겠어?”

“으아아아아!”

비마는 눈이 뒤집혀서 달려들었다.

한계를 넘는 속도를 냈고, 마른 비만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마른 비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때를 가늠했다.

‘그래, 날 봐! 그리고 달려들어!’

둘 사이의 거리가 확연히 줄어들고 있었다.

지척까지 따라붙은 비마가 괴성을 질렀다.

“토막을 내서 씹어 먹는다! 땅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네놈의 피붙이를 몰살할 것이야! 죽어라, 애새끼야!”

간격을 좁힌 비마가 마른 비를 덮치기 위해 도움닫기를 할 때였다.

‘지금이야!’

비마의 발이 땅에 닿기 직전, 마른 비가 한발 앞서 진각을 찍었다.

쿠르릉―!

수평, 뿌리내리기.

지면을 타고 방사선으로 번진 자연기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도약을 위해 땅을 밟으려던 비마가 발을 헛디뎠다.

그는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달려온 속도만큼이나 거세게 나자빠졌다.

우당탕! 촤아아악―!

속도가 엄청났던 만큼 넘어졌을 때의 여파도 컸다.

비마는 온몸으로 땅바닥을 긁다시피 하며 미끄러졌다.

땅에 얼굴을 처박은 그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별비를 붙잡은 채 진각을 찍었던 마른 비는 다시 등으로 올라타며 외쳤다.

“하하! 멍청이!”

최후의 도발까지 남겼다.

저 정도로 멈출 리 없고, 비마는 금세 따라붙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이런 임기응변의 수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마른 비는 눈을 돌려 숲을 바라봤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선점해야 해!’

“자, 장로님…!”

헐레벌떡 쫓아온 마교의 무인이 경악하며 외쳤다.

몸을 일으킨 비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피와 흙이 뒤엉켜 엉망이었다.

“괘, 괜찮으십…!”

퍼어억!

비마는 자신을 염려하는 수하를 일수에 쳐 죽였다.

밤이 내린 어둠보다 새카만 마기가 그의 주변에서 뭉클대고 있었다.

뒤늦게 당도한 몇몇 마교도들은 감히 말도 걸지 못한 채 침만 삼켰다.

“…….”

우두커니 서 있던 비마는 말없이 추격을 재개했다.

그가 발작할까 봐 잔뜩 긴장했던 마교의 무인들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따, 따라가자….”

까딱하면 화풀이 대상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마의 뒤를 쫓는 자들은 전처럼 최선을 다해 달리지 못했다.

“하악, 학…!”

“고생했어, 별비야! 얼른 숨을 골라! 바로 준비해야 해!”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질주한 별비는 다리를 후들거렸다.

하지만 쉴 시간은 없었고, 둘은 숲에 진입하자마자 지형에 녹아들었다.

‘한 방 먹은 것 때문에 비마는 제정신이 아닐 거야. 도발이 먹혔으니 미친 듯이 달려들겠지.’

도주는 물론이고, 이 순간을 위해 감행한 도발이었다.

어차피 도망이 불가능하다면, 놈이 숲에 진입하자마자 선공한다.

평정을 잃은 비마를 암습하는 것.

힘이 다한 마른 비가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쾌애애액―!

‘왔다!’

숨 막힐 듯한 마기가 다가오고, 비마의 신형이 숲을 헤치며 튀어나왔다.

마른 비는 몸을 숨겼던 나무에서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주변을 못 보고 있어! 성공이야!’

위에선 마른 비가, 후방에선 별비가.

동시에 가해진 암습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의 예상과 달리 비마의 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정도의 암습이라니. 그냥 달려왔다면 위험했겠어.”

‘아…!’

추격을 지연시킨 한 수가 독이 됐는가!

어지간한 자라면 더욱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이 노련한 노마는 오히려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죽어라. 망할 꼬맹이.”

냉정한 눈이 마른 비를 노려봤다.

비마는 마른 비와 별비를 일격에 쳐 죽일 기세였다.

마른 비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 때,

“죽는 건 그들이 아니라 너다.”

어둠을 지배하는 살수가 비마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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