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커… 허…?!”
누구도 상황을 인식하지 못했다.
마른 비가 죽을 거라고 여겼을 때 그는 점멸하듯 사라졌고, 곧 상반신에 구멍이 뚫린 비마가 주저앉았다.
본능에 따라 움직였을 뿐 마른 비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 다른 이들이 넋을 놓은 건 당연했다.
“네… 네놈은…!”
그나마 무공 경지가 높은 비마가 마른 비에게 벌어진 일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가 느낀 건 두려움이었다.
‘방금 그 움직임…! 이놈, 방금 한 차원 높은 시간의 영역을 엿봤어! 이 나이에 이런 경지라니?’
거기까지가 비마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울컥 피를 토해낸 그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숨이 끊어졌다.
“방금 뭐였지?”
마른 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어?”
벌써 몸의 한계가 왔는가.
체력이 고갈된 상태라 전투화장의 발동 시간이 극적으로 짧아진 모양이었다.
마른 비는 땅에 엎어져서 오한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었다.
“허억! 헉…! 장로님! 저희가 왔… 아, 아니?!”
위험은 끝나지 않았다.
개활지를 가로지른 마교의 무인들이 당도한 것이다.
그들은 숨이 끊어진 비마를 보고 경악했고, 탈진한 마른 비 일행을 발견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어떻게 이따위 놈들이 비마 장로님을?!”
“죽여… 죽여라! 놈들은 기력이 다 했다!”
피피핏!
그들을 끊어낸 건 사영이었다.
경공이 빨라서 먼저 도착한 여섯 명의 선발대가 심장을 움켜쥐고 엎어졌다.
하지만 힘이 다한 건 사영도 마찬가지라 마지막 한 명을 처리할 때는 반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너…? 살수…! 네놈이 왜…?!”
피를 울컥울컥 뿜어내는 마교의 무인이 원독에 찬 눈으로 사영을 노려봤다.
사영은 칼에 맞은 옆구리를 지혈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욱…. 알 것 없으니 닥치고 가라. 나도 머지않아 따라가겠지만.”
여기까지다.
이제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사영도 마른 비처럼 풀썩 쓰러졌다.
숲에 맞닿은 개활지에서 수백 명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교의 본대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화아아악―!
설상가상으로 비마에 못지않은 무지막지한 기운이 감지됐다.
환마.
진 마라를 수습한 환마가 뒤늦게 따라붙은 모양이었다.
“후후, 정말 끝장이군.”
사영이 툴툴거리며 웃을 때, 장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기진맥진한 줄 알았던 별비였다.
녀석은 이빨로 사영을 물어 올렸고, 자신의 등 위에 안착할 수 있게 던졌다.
별비의 넓은 등에는 털을 붙잡은 마른 비가 있었다.
“아, 아직이야…. 죽기 전까지는… 발버둥 쳐야지. 별비를 꽉 잡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마른 비의 손에는 오색빛깔의 가루가 묻어 있었다.
“커허허허헝!”
전투화장.
마른 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별비의 얼굴에 전투화장을 그렸고, 그건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별비의 잠력이 폭발하고, 일시적인 각성 상태에 접어들었다.
백색의 영수는 인간 두 명을 태운 채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랬듯 얼마 못 가서 쓰러질 거야. 별비도 기운이 다했으니까.’
환마 정도라면 모를까, 다른 놈들은 별비의 뒤를 쫓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전투화장으로 일으킨 기운은 순식간에 사그라질 테고, 그때는 정말 끝장이었다.
“이럴 수가! 비마 장로?! ……쫓아! 지옥 끝까지 따라가라! 반드시 놈들을 잡아야 해!”
비마의 시체를 본 환마가 노성을 터뜨리며 따라붙었다.
별비는 필사적으로 달렸고, 그 속도는 환마조차 쫓을 수 없을 정도였다.
별비는 마른 비와 사영을 태운 채 며칠 전 내려왔던 강변을 거슬러 올랐다.
“하악, 학…!”
혀를 빼물고 힘겨워하면서도 별비는 멈추지 않았고, 점점 추격대와의 거리를 벌렸다.
환마는 종국엔 수하들을 내팽개치고 홀로 쫓아왔지만, 그럼에도 간격을 좁힐 수 없었다.
환마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쯤, 별비의 무릎이 꺾였다.
“힘이 다했구나…. 고생했어, 별비야.”
사영에게 입은 부상과 몇 날 며칠에 걸친 추적과 전투.
별비는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지쳐 있었다.
전투화장이 풀린 여파는 별비 같은 영수를 일어설 수도 없게 만들었다.
“여기까진가…….”
마른 비는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추켜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덧 밤이 지나고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마른 비는 저 멀리 점으로 나타난 환마를 감지할 기력도 없었다.
사영 역시 낮게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날 구한 거냐?”
사영은 아직도 그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마른 비는 피식 웃었다.
“곧 죽을 텐데 그게 궁금해? 말했잖아. 나도 잘 모르겠다고. 그냥 그러고 싶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난 네게 아무런 쓸모도 없잖아. 너 정도면 날 이용하지 않아도 죽이고 싶은 자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을 텐데. 차도살인이 필요했던 건가?”
마른 비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사영을 봤다.
자신이 느낀 감정을 사영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건가?
아니다. 사영도 분명히 느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를 모를 뿐.
자연기가 전해주는 감각이니 틀림없었다.
“너 혹시 친구 없어?”
“친구…….”
그건 사영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단어였다.
스스로를 자각한 순간부터, 아니, 기억이 남아 있는 시절부터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쓸모가 없으면 곧바로 버림받는 환경.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버림받는다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생애 처음으로 칭찬을 받은 건 사람을 죽였을 때였다.
그로써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살인의 재능 덕에 자신은 병기로 키워졌다.
또한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모두의 희망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순수하게 자신을 좋아해 준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쓸모가 있기에 필요로 했을 뿐.
그건 자신이 지키려고 하는 ‘그분’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아니야. 어쩌면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자신은 왜 그를 구하려고 하는가.
그의 넉넉한 미소가, 온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베푼 호의가 고맙기 때문이다.
처음엔 다른 이들처럼 도구로 대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인간으로 바라본 눈길이 사무치도록 그립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신에겐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사영은 처음으로 ‘그곳’에 두고 온 자들이 궁금해졌다.
마른 비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그는 변하고 있었다.
“세상에…! 중구의 말이 맞았어? 당신, 진짜 친구가 없는 거야?”
사영의 표정을 본 마른 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영은 알 듯 모를 듯한 얼굴로 웃었다.
“고맙다. 진심으로.”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마른 비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사연이 담긴.
한순간 표정을 바꾼 사영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리고 신음을 삼키며 일어섰다.
“어? 어? 너 아직도 일어설 힘이 있어?”
한 방울의 기력까지 남김없이 쏟아낸 마른 비는 고개를 돌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하지만 부상 정도로만 따지면 사영이 훨씬 심각했다.
온몸을 칭칭 감은 붕대엔 피가 배어, 흰색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영은 일어섰다.
“후우, 후욱…! 말하지 않았나. 고통엔 익숙하다고.”
사영은 동녘으로부터 번지는 햇살을 등지고 섰다.
점점 가까워지는 환마를 눈에 담으며, 사영이 말했다.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만약 살아남는다면…… 나와 친구가 돼다오.”
마른 비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사영이 난생처음으로 타인에게 내민 손이었다.
마른 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우린 이미 친구야. 그러니까…!”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왠지 더 이상 저 등을 못 볼까 봐 겁이 난다.
마른 비는 싸울 준비를 하는 사영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사여어어엉! 네놈이 감히…!”
사영이 탈출한 배경을 짐작한 모양이다.
진 마라를 잃을 뻔했고, 부화장이 엉망이 되었다.
심지어 비마까지 죽어버렸다.
환마는 흉신악살 같은 얼굴로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마지막…! 부디 이 청년이 살아남기를.’
검과 피뿐이라고 여겼던 인생을 돌아보게 해준 남자.
사영은 마른 비가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최후의 힘을 짜내 끝까지 저항하려 했다.
“덤벼라! 환마아아아!”
사영이 그답지 않은 거친 포효를 내지를 때.
동쪽 하늘 아래서 기적이 일어났다.
두두두두―!
“비아야!”
그건 마른 비가 부족을 나와 처음 사귄 친구의 목소리였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마른 비를 염려해 그의 흔적을 쫓은 벗의 음성이었다.
전투마에 올라탄 여규가 수백의 기마대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얼라? 저 시커먼 새끼, 저거! 친구 하나도 없을 거 같은 살수 새끼 아냐?! 구출에 성공했구만!”
철중구도 있었다.
“긴장해라! 적의 수괴가 다가오고 있다!”
기마대를 통솔하는 건 지태율이었다.
그들은 부상이 다 낫지 않았는지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기력과 투지만큼은 충만했다.
“달려라! 적색창기병! 적이 우 소협에게 닿기 전에 차단해야 한다!”
수백에 이르는 기마대는 내원을 지키던 적색창기병의 정예들이었다.
완전 무장하고 말에 올라탄 그들은 땅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기세를 내뿜었다.
“기마대?! 주원장의 병사들이 여기까지 왜…?!”
마른 비에게 달려가던 환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다가오는 적색창기병의 숫자를 확인하고, 뒤를 돌아봤다.
“오오오오! 장로님을 따라라!”
새카만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다.
환마의 뒤를 쫓아온 마교의 정예들이었다.
숫자는 호각.
갑주를 걸치고 말에 올라탄 적색창기병의 파괴력은 무시무시하지만, 자신이 직접 병력을 이끈다면 물리칠 수 있다.
무엇보다 환마는 진 마라를 목격한 마른 비와 사영을 놓칠 수 없었다.
“천마의 영광스런 후예들이여! 주제를 모르는 중원의 잡것들을 쓸어…!”
전투 지시를 내리려던 환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기마대를 통솔하는 자의 옆에서 익숙한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소, 소교주?!”
증오스런 얼굴이다.
저자가 왜 주원장의 병사들과 함께 있단 말인가!
천진운을 본 순간 환마의 머리는 새하얘졌다.
‘이길 수 없다. 소교주가 있다면 승산이 없어!’
수년에 걸쳐 준비한 계획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야만인이 있었다.
놈은 야투에 홀연히 등장하여 신경을 건들더니, 결국 대계를 뿌리째 흔드는 지경까지 왔다.
환마는 빠드득 이를 깨물며 마른 비를 노려봤다.
‘또 있다! 그분을 배신하고, 야만인을 포섭했으며, 소교주까지 끌어들인 놈!’
환마는 저 멀리 응천부에서 웃고 있을 사내를 떠올렸다.
“주원장! 이 배은망덕한 쥐새끼가! 내 기필코 너를 씹어 먹고 말 것이야!”
씩씩대던 환마가 주먹을 꽉 쥐자, 강변을 내달리던 검은 해일이 덜컥 멈췄다.
등을 돌린 환마가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철수하라!”
마교의 정예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들도 곧 소교주를 목격했다.
침중한 표정으로 회군하는 마교도를 보며 철중구가 외쳤다.
“봤냐? 여규 이 새끼야! 저것들, 날 보고 쫀 거다!”
여규가 천진운을 곁눈질하며 창피해하건 말건, 철중구는 신이 나서 소리 질렀다.
“카아하하하! 내가 바로 장사의 쾌남, 철중구라 이거야!”
기지개를 켜던 해도 민망한지 붉은빛을 뿌렸다.
* * *
짹짹―
산새 우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수발을 드는 시비를 제외하면 아무도 찾지 않는 모옥.
그 안에서 늙수그레한 노인이 걸어 나왔다.
그는 진이 빠진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후우…….”
문밖에 시립해 있던 검은 옷의 무인이 다가와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간절한 눈으로 노인의 입술을 바라봤다.
“뭘 그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쳐다봐?”
괴의였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걸까?
몇 년 전, 마른 비 덕에 살막의 암수로부터 목숨을 건진 화통달은 주름이 부쩍 늘어 있었다.
그가 모옥의 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독한 상처야. 내가 운남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날 찾는 게 조금만 늦었다면 돌이킬 수 없었을 거다.”
“그 말씀은….”
“이전의 경지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해.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그래도 사람 구실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화통달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게 정녕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본분은 의원이었고, 천인공노할 악인일지라도 자신을 찾은 환자를 내친 적이 없었다.
환자라면, 일단 살리고 본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건 차후의 일.
의원은 환자를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인생을 관통해온 철학이었다.
“저치가 벌인 만행에 대해 들었네. 약속, 믿어도 되는 거겠지?”
하지만 다짐은 받고 싶다.
자신이 살린 환자가 다시 세상에 나가 악행을 저지르는 건 끔찍한 일이니까.
사내는 환한 얼굴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노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옥의 안쪽, 침상에 누워 있던 사내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몇 년간 폐인처럼 살며 많은 생각을 했다오. 염려하시는 일은 없을 것이외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소.”
피골이 상접한 몰골은 피폐하다 못해 지금 죽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천하를 꿈꾸었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린 남자.
공지량이 세상사에 초탈한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