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38화 (238/463)

238화

명성

얼굴이 간지럽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따뜻하지만 축축한 그것은 볼을 몇 번 쓰다듬더니 이마로 올라갔고, 이내 눈, 코, 입 쪽으로 내려왔다.

마른 비는 의식이 들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할짝― 할짝―

얼굴을 건드린 건 별비의 혀였다.

마른 비가 곧 깨어나리란 걸 깨닫고,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한 모양이다.

그르렁대는 별비의 뒤에는 철중구가 못 볼 걸 본 얼굴로 서 있었다.

“우욱, 혀로…! 최악이구만.”

별비가 뒤를 돌아보자 철중구는 급히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일어났냐? 자그마치 나흘 동안 잠만 잤다, 너.”

“나흘?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잤다고?”

몸에 쌓인 피로가 굉장했던 모양이다.

장시간 누워 있어서인지 온몸이 결리고 머리가 무겁다.

마른 비는 눈만 끔뻑이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벌떡 일어났다.

“사영…! 사영은 무사해?!”

철중구는 아직 사영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얼굴로 마른 비의 의문을 풀어줬다.

“일어나자마자 찾는 게 그놈이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살수 놈, 진짜 괴물이야. 이틀 만에 깨서 뛰쳐나가더라. 서너 개월은 꼼짝도 못 할 부상을 입었는데 말이야. 의식을 차리자마자 소교주의 뒤를 따라갔다.”

“소교주의 뒤라니? 소교주가 어딜 갔는데?”

둘의 대화는 잠시 끊길 수밖에 없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여규가 뛰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여규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마른 비를 와락 안았다.

“깨어났구나, 비아야! 진짜 위험했다면서?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마른 비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규, 규야. 아파. 살살 좀….”

“아…! 미안!”

기력이 바닥 난 상태에서 전투화장을 발동한 후유증은 컸다.

튼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몸이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여규는 화들짝 놀라며 마른 비에게서 떨어졌다.

“규, 중구. 너희가 오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거야. 고마워.”

마른 비는 여규와 철중구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사영에 대해 물었다.

여규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비아 네가 기절한 후에도 그 사람은 의식이 있었어. 그가 소교주에게 동굴에 대해 알려줬지. 환마가 거기서 야투에 있던 괴물을 만들고 있다면서?”

“맞아. 심지어 그보다 더한 것도 있었어.”

“그래. 그걸 반드시 없애야 한대. 소교주는 원래부터 환마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야. 이미 강소성에 들어와 있었고, 응천부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지. 그 덕분에 오왕 님의 수하들이 이틀 만에 그를 찾을 수 있었어…….”

천진운은 응천부에 들어오자마자 주원장과 독대를 했다.

둘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여규는 그들이 무언가 거래를 했다고 확신했다.

독대가 끝나자, 주원장이 자신을 호위하던 적색창기병을 내주었으니까.

“……이건 내 짐작이지만, 둘이 거래를 한 게 맞다면, 거기에 사영이란 사람이 얽혀 있는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마른 비가 되물었지만, 여규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추측할 뿐 답을 줄 수는 없었다.

마른 비는 미간을 찌푸리며 며칠 전을 돌이켰다.

‘비마를 쫓기 전에, 아저씨는 사영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했어. 그것과 연관된 말일까?’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주원장의 속내까지 짐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른 비가 고민하고 있을 때, 철중구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듣다 보니 생각나네. 소교주와 살수 놈…. 네가 기절한 다음에 아주 가관이었다. 세상천지에 지들만 있는 줄 알더라.”

철중구는 실감 나는 어조로 사영과 천진운이 만났던 순간을 묘사했다.

“소교주님…!”

사영은 기마대와 함께 당도한 천진운을 보는 순간, 감격한 얼굴로 부복했다.

반면 천진운은 사영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날 아느냐? 보아하니 네가 오왕 님을 습격한 살수인 모양인데, 본교의 살수는 예나 지금이나 한 명뿐이다. 네 진짜 정체가 무엇이냐.”

천진운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독대를 할 때, 주원장은 사영이 마교 소속의 살수라고 확신하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하지만 내부사정을 아는 천진운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알기로 마교에서 살수 비기를 연마한 건 오직 음살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주원장은 사영을 필요로 했고, 마른 비가 구출에 성공하면 그를 설득해줄 것을 부탁했다.

천진운에게 시급한 건 환마를 찾는 일이었고, 그의 흉계를 깨부수는 것이었기에 사영이 ‘마교 소속의 살수가 맞다면’ 그를 설득하기로 하고 병력을 지원받은 것이었다.

여규와 철중구가 아무리 요청해도 요지부동이던 주원장이 적색창기병을 내준 이유였다.

“교에 있을 때, 소교주 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사영의 답변은 천진운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그는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우리가 만난 적이 있다고? 네가 본교 출신의 살수가 맞단 말이냐?”

심호흡을 한 사영은 입술을 떼다 말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듣는 자들을 의식해서 전음을 보냈다.

그의 말을 들은 천진운의 눈이 점점 커졌다.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허면 네가… 아니, 자네가 그때의 그 소년이라고?”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천진운의 말투가 달라지고 있었다.

“네. 소교주님. 그리고….”

잠자코 전음을 듣던 천진운이 경악을 토했다.

“이럴 수가…! 그분의 진전을 이었다고? 아, 아니… 그전에 자네, 정말 ‘그곳’에서 나왔단 말인가?!”

이토록 놀라는 게 얼마 만인가.

천진운의 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 번 들어가면 절대 살아나올 수 없는 지옥.

그곳을 탈출한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거긴 ‘그자’가 관할하는 영역이라 자신조차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탈주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아 있다는 이야기가 극비리에 떠돌기도 했다.

하지만 소문은 탈주를 ‘시도했던’ 자가 죽은 걸로 마무리됐다.

대외적으로는 참살되었다고 전해진 자.

한데 소문이 사실이었고, 여태껏 죽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보다도 어리다니!

‘잠깐. 이게 사실이라면….’

자신이 사영을 만난 건 성인이 되기 전이다.

그럼 대체 몇 살에 거길 탈출한 것인가.

소교주는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놀랄 일은 더 남아 있었다.

“소교주님. 다시 뵙게 되어 감개무량하지만, 이럴 때가 아닙니다. 환마가 진 마라를 제조하고 있습니다.”

천진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둘이 이야기하는 내내 수백 명이 강변에서 대기했다. 뭔 내용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야. 시벌, 우리는 투명인간이고 지들이 세상의 중심이여, 아주.”

철중구는 사영과 천진운이 만났던 때를 떠올리자 못마땅한지 툴툴댔다.

이야기를 마무리한 건 여규였다.

“진 마라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소교주는 폭죽을 쏘아 올렸어. 마기 때문에 멀찍이서 뒤를 따르던 그의 수하들이 달려왔지. 그리고 소교주는 곧바로 비아 네가 발견했다는 동굴로 향했어. 적색창기병까지 대동한 채로 말이야.”

천진운과, 그가 이끄는 마교의 타격대.

그리고 수백에 이르는 적색창기병.

실로 어마어마한 전력이다.

환마만이 아니라 비마가 살아 있다 해도 막을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마른 비는 낙관하지 않았다.

동굴 안에 있는 것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 사영은 기운을 차리자마자 곧바로 소교주를 지원하러 간 거네?”

여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른 비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오왕 님께서 네가 깨면 데려오라고 했어. 긴히 할 말이 있는 것 같더라. 일어날 수 있겠어?”

여규의 부축을 받은 마른 비가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졌다.

“오오오! 우 소협이시다!”

“주군을 지킨 영웅! 몸을 아끼지 않고 병사들을 돌본 협사!”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소협!”

마른 비는 의원 앞을 메우고 환호하는 병사들을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여규는 자신의 일인 것처럼 즐거워하며 속삭였다.

“비아 요 며칠간 네가 한 일들이 병사들 사이에 퍼졌어. 넌 지금 완전히 영웅이라구, 영웅.”

마른 비가 여전히 얼떨떨하게 있자 철중구가 나섰다.

“왜 바지 내리고 춘화(春畵)보다가 엄마한테 걸린 얼굴을 하고 있냐? 이럴 땐 사나이답게 답해줘야 한다고!”

철중구는 마른 비의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이놈이 바로 야투를 뒤집어놓은 신성이다! 그 무시무시한 살수 놈 기억하지? 그놈의 암습으로부터 너희의 왕을 구했단 말이다! 심지어 마교의 칠대 장로라는 비마를 죽이기까지 했어!”

“우오오오오!”

함성이 고조되고 있었다.

철중구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카하하! 마른 비란 이름을 기억해라! 이놈은 곧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 테니까! 저어기 머나먼 남쪽 끝, 운냥에서 올라온 야생의 전사가 바로 이놈이다, 이것들아!”

“운냥 말고, 운남. 이 똥 멍청아.”

여규는 ‘어쩐지 잘 나간다 했다.’라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마른 비를 띄워준 철중구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지 흡족하게 웃었다.

더 큰 함성이 터진 건 의원 창문을 넘은 별비가 나타났을 때였다.

“오오오오! 우 소협이 부리는 백호다!”

“세상에! 저 덩치라니…! 저게 말로만 듣던 영수인가?”

“난 백아(白牙)가 싸우는 걸 직접 봤다고! 저 녀석은 주군께 달려드는 살수를 물리치기도 했어!”

어느새 멋대로 백아라는 이름까지 붙인 모양이다.

별비를 처음 본 자들은 물론이고, 내원에서 경비를 섰던 자들까지 백호의 늠름한 위용에 감탄했다.

주원장의 병사들에게 있어 마른 비와 별비는 생명의 은인이자 주군을 구한 영웅, 그 자체였다.

“어우, 부끄러워. 얼른 가자.”

고막이 아플 정도의 환호.

처음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칭찬하며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건.

마른 비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민망했다.

얼굴이 빨개진 마른 비는 여규를 재촉해서 주원장의 처소로 향했다.

“정말 고생 많았네.”

마른 비를 본 주원장의 첫마디였다.

그는 드물게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강무재의 추천으로 받아들인 호위.

스물도 안 된 이족의 청년 덕에 목숨을 구했고, 망가질 뻔한 계획을 수정할 수 있었다.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잘만 풀린다면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주원장은 진심으로 흡족했다.

“약속대로 자네의 청을 한 가지 들어주겠네. 무엇을 원하는가?”

“괜찮아. 딱히 원하는 것도, 필요한 것도 없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었는걸.”

마른 비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주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네. 자네가 욕심이 없는 사람이란 건 충분히 알겠어. 허나 이토록 큰 빚을 지고도 아무런 보답을 하지 않는다면 내 체면이 서지 않지. 언제고 원하는 게 생기면 나를 찾게.”

“응. 그럴게.”

마른 비는 싱긋 웃었고, 인사를 하고 나가려 했다.

하지만 주원장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비마가 그랬었지. 상상하는 것 이상을 제공하겠다고.”

“……?”

주원장은 마른 비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자네가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데 동의하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원하는 모든 조건을 수락할 테니, 내 진영으로 들어와 주게.”

여규와 철중구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그들은 이어진 마른 비의 말에 기겁을 해야 했다.

“하하! 나보고 아저씨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왜 말이 안 되는가?”

마른 비는 평온한 얼굴로 대꾸했다.

“성향이 다르니까. 아저씬 천하를 담을 수 있을진 몰라도 날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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