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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39화 (239/463)

239화

‘이놈 간덩이 보소? 왕한테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

듣기에 따라 대단히 불쾌할 수 있는 말이다.

배짱이라면 누구에게도 접어줄 생각이 없는 철중구조차 침을 삼키며 주원장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 경직됐던 주원장은 곧 얼굴을 폈다.

“그런가. 예상은 했지만, 막상 거절당하니 서운하군.”

“에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지 마. 다 알면서 던져본 거잖아.”

주원장은 완전히 얼굴을 펴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묘한 기분이군. 거절이란 걸 당한 게 하도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릴 거야, 하는 식의 정신병자는 아니니까.”

주원장은 자신의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게 웃었다.

하지만 듣고 있는 여규와 철중구는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농담… 이겠지?’

‘시벌, 농담 한번 존나 살벌하게 하네.’

여유만만한 건 마른 비뿐이었다.

그는 주원장의 발상이 재미있다는 듯 마주 웃으며 말했다.

“서운해하지 마. 아저씨만이 아니라 누구 밑으로도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까. 나도 나름의 사정이 있거든.”

와족의 차기 족장이 될 뻔했던 남자.

하지만 사랑하는 식구들을 뒤로 한 채 중원으로 나왔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겠지만, 마른 비는 누구에게도 귀속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일종의 자존심이자, 자신을 대신해 부족을 이끌고 있을 친구에 대한 의리였다.

넓은 세상을 마음껏 보고 나면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운남을 떠나왔지만, 결국 자신이 돌아갈 곳은 식구들의 품이었다.

마른 비는 문득 노을이가 보고 싶어졌다.

“난 아저씨가 꿈꾸는 천하가 궁금해. 부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길 바라. 응원할게.”

마른 비가 한족이었다면 이런 관계 맺음이 가능했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자유분방한 성향도 한몫을 했지만, 그의 출신이 주원장으로 하여금 마른 비에 대한 경계를 허물게 했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주원장은 마른 비가 기꺼웠다.

“고맙군. 자네 역시 원하는 걸 찾길 바라겠네. 몸이 나을 때까지 편히 쉬게나. 그대들의 편의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주원장과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씩 웃어준 마른 비는 등을 돌리고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후아아…! 조마조마했다.”

여규가 안도의 숨을 쉬고,

“당신은… 날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냐.”

철중구는 더듬더듬 마른 비의 말을 흉내 냈다.

그러더니 얼굴을 왈칵 찌그러뜨리며 감탄했다.

“크으으~! 우리 비아, 배짱 보소? 왕한테 그런 막말이라니? 역시 내가 인정한 남자야! 아주 그냥 오져 부렀다!”

또 희한한 말을 쓴다.

철중구의 과장된 감탄에 마른 비와 여규가 킥킥 댔다.

“……음?!”

그러던 그들은 갑자기 얼굴을 굳혔고, 우측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복도의 구석,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한 남자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키득, 키득.

웃는 건가?

웃고 있는 게 틀림없다.

새하얀 피부만큼이나 차가운 인상.

뱀을 떠올리게 만드는 눈이 마른 비의 전신을 뜯어봤다.

연지를 찍은 여인의 그것처럼 새빨간 입술을 혀가 훑고 지나갔다.

보는 것만으로 소름을 유발하는 사내는 한림아를 사고로 위장하여 죽이고 돌아온 표금산이었다.

“주군께서 언제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놈을 들인 거지? 정말 특이해…! 이건 마치… 쉽게 맛볼 수 없는 별식이 아닌가.”

표금산은 눈을 번들거리며 마른 비를 바라봤다.

입맛까지 다시는 게 정말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자의 표정이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철중구였다.

“뭐여? 이 남자가 되다 만 변태 호로새끼는? 비아가 맛있어 보인다고? 식인종이냐? 어디서 시벌, 되도 않는 개소리를 까 잡수고 계셔?”

여규도 가만있지 않았다.

“여기 들어와 있는 걸 보면 오왕 님의 신하인 모양인데……. 무례하네요. 지금 그 발언, 감당할 수 있습니까?”

여규와 철중구는 작심하고 투기를 뿜어냈다.

마른 비에 가려져 있을 뿐, 천하구파에서 촉망받는 후기지수인 여규와 사호의 일인에 등극한 철중구가 아닌가.

표금산은 그제야 둘을 제대로 봤고,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호오, 어디서 이런 놈들이 한꺼번에…! 하지만 너희 둘은 내 취향이 아냐. 저 야만인만큼의 특별함이 없다.”

할짝대며 입술을 축이는 표금산의 표정은 섬뜩했다.

하지만 여규와 철중구가 기죽을 리 없었고, 둘은 눈을 번뜩이며 당장이라도 무기를 뽑을 준비를 했다.

“아저씨의 수하야?”

마른 비의 눈은 표금산을 목격한 순간부터 착 가라앉아 있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역겨운 피 냄새.

이놈은 재미나 쾌락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놈이다.

처음 보았지만, 마른 비는 진심으로 표금산이 싫었다.

“그렇다. 난 그분의 사냥개지. 네가 주군의 목숨을 구했다는 이족 사내로구나.”

임무 수행을 위해 떠나 있는 사이, 진영을 떠들썩하게 만든 존재.

표금산은 그제야 마른 비를 알아봤다.

그는 더 말하려 했으나, 마른 비의 경고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기질에 비해 실력은 별로네. 분명히 말하는데, 다음에 또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거야.”

“흐흐… 보기와 달리 입담이 거한 놈이군. 내 실력이 별로라고? 풍기는 냄새가 특이할 뿐, 너 따위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

실실 쪼개던 표금산이 웃음을 뚝 그쳤다.

마른 비가 정색하며 그를 노려봤기 때문이다.

맑은 눈 속에 감춰져 있던 야생의 살기가 표면으로 떠오르며 표금산의 숨통을 조였다.

‘무… 뭐냐, 갑자기…!’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고?

심지어 그게 자신의 감각을 속일 정도라니!

표금산은 뛰어난 인간 사냥꾼이었고, 그렇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마른 비가 자신이 먹어치울 수 없는 사냥감이라는걸.

‘아냐. 사냥감 따위가 아니다. 이놈은 사냥꾼이야!’

인간이나 죽이고 다니던 사냥개와, 야생의 흉포한 맹수들을 굴복시킨 전사.

사냥꾼으로서의 격이 다르다.

표금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눈에 띄지 마. 또 그 더러운 살기를 드러내면 그땐 아저씨의 수하고 뭐고 없으니까.”

마른 비는 경고를 남긴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몸은 다 회복되지 않았지만, 타고난 기질이 어디 갈 리 없었다.

무형의 압박이 사라지고, 표금산이 멈췄던 숨을 쉬었다.

그의 등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뭐여? 꼴랑 눈 마주치고 쫀 거야? 병신이네?”

철중구는 비웃으며 지나쳤고,

“오왕께선 당신 같은 사람도 수하로 들이시는군요. 다시 마주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여규도 분노를 누른 채 돌아섰다.

한동안 멍하게 있던 표금산이 눈을 희번덕대며 웃었다.

“훌륭해…! 저토록 짜릿한 놈이 있다니! 큭큭, 반드시….”

광대까지 올라간 입꼬리는 섬뜩했다.

“……먹어 치운다.”

주원장의 처소를 나온 철중구는 뒤를 돌아봤다.

“별의별 미친 새끼가 다 있구만. 나도 인간을 꽤 많이 접한 편인데, 저런 놈은 본 적이 없어. 역대급인데, 저건?”

마른 비처럼 예민한 감각이 없어도 느낄 수 있다.

방금 마주친 놈은 쾌락 살인마라는걸.

마른 비 일행은 표금산을 마주친 후 지금까지 주원장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상이 어그러지는 걸 느꼈다.

“아저씨는 왜 저런 사람을 옆에 두는 거지? 무슨 이유로… 응?”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마른 비는 표금산에 대한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건물 밖에 웅크리고 있던 별비가 다가왔기 때문에?

아니다.

그 뒤에 운집해 있는 두 부류의 무리 때문이었다.

마른 비가 주원장을 보고 나온 사이, 처소 앞에는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이 모여 있었다.

“…….”

경계, 탐색, 호기심 그리고 질시.

마른 비 일행을 바라보는 자들의 시선은 그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마른 비를 향한 감정이었다.

백 쌍에 가까운 눈이 주원장의 처소에서 나온 이족의 청년을 주목했다.

“소협! 나오셨소이까!”

경비대장이었다.

사영이 침입한 날, 마른 비의 경고를 듣고 뒤를 따랐던 그는 여전히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꽤 흡족한 표정이었다.

“중원 무림의 협사들이 주군을 돕고자 달려왔소이다. 강남을 일통한 뒤에는 북벌이 시작될 터인데, 몽골 오랑캐들을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자원한 분들이오.”

처소의 마당을 기준으로 칼로 자른 듯 양분된 무리.

왜 이렇게 나뉜 건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흘리는 기운으로 보건대 왼쪽이 정파, 오른쪽이 사파의 무인들이었다.

“저자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정말 짐승을 데리고 다니는군.”

“저렇게 큰 백호라니…!”

마른 비의 청력은 속삭이는 음성들을 잡아냈다.

그를 통해 내용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나와 별비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 건가?’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른 비는 사천에서부터 시작해 여러 번 모습을 드러냈고, 야투에서의 싸움은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기 도박에 환장한 자들이 마른 비의 싸움을 보았으니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했겠는가.

투기장에서 살아나간 자들을 통해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이미 강남 전역에 스며들었다.

심지어 별비가 건물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바보가 아니고서야 마른 비의 정체를 짐작 못 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길을 끈 건 마른 비만이 아니었다.

“저 외모… 악교익을 꺾었다는 자와 비슷하지 않나?”

“투도 말인가? 새롭게 사호에 올랐다는? 그러고 보니….”

“야만인과 같이 사라졌다고 했어. 저놈이다. 저놈이 철중구야!”

딴에는 목소리들을 낮춘다고 낮췄지만, 수십 명이 떠들어대니 안 들릴 수가 없었다.

역시나 가장 먼저 나선 건 철중구였다.

“애들 병정놀이 하냐? 좌우로 나뉘어서 속닥속닥………. 구시렁대지 말고 앞에 나와서 말해, 빙신들아!”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출신은 못 속이는군. 예의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놈이야.”

“더러운 사파 놈이 어디서 감히!”

정파의 무인들만 시끌벅적한 게 아니었다.

사파 쪽의 반응은 더욱 격렬했다.

“퉤! 길거리 골목대장이나 하던 놈이 하루아침에 이름을 얻더니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저런 놈이 악교익을 꺾었다고? 야투 출신이라니 거기서 뭔가 수를 썼겠지. 사호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무명소졸이 갑자기 등극하는 게 말이 되냔 말이야.”

시기, 질투, 의심, 적의…….

정파의 무인들과 달리 사파의 인물들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철중구를 꺾고 그의 명성을 가로채고 싶다는 욕망이 고스란히 엿보였다.

“흐흐흐…….”

노골적인 건 철중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새끼들, 안 그래도 기분 더러웠는데 잘 걸렸다.’라는 얼굴로 도를 움켜쥐었다.

장내를 정리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 미친 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소란을 피우느냐? 대의를 위해 달려왔다기에 정중히 대했거늘. 네놈들의 몸통에서 목을 분리한다고 해서 전하께서 날 탓하실 것 같은가?”

경비대장이었다.

사영이 침입한 날에는 마른 비의 뒤를 허둥지둥 따르기 바빴으나, 누가 뭐래도 그는 왕의 안위를 책임지는 자였다.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기세를 발산하자 놀랍게도 그 압박감은 철중구를 아득히 상회했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한방에 정리됐다.

여전히 중얼대는 건 깜짝 놀란 철중구뿐이었다.

“뭐야, 이거? 당신, 졸라 세네? 이런 힘을 숨기고 있었어? 그날은 왜 멍청이처럼 군거야?”

경비대장은 좌우로 나뉜 자들을 한 번 더 쏘아본 뒤 말했다.

“자네들은 전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았나. 그런 이들에게 예를 갖추는 건 당연한 일이지.”

경비대장은 바짝 긴장한 자들을 내버려 두고 마른 비 일행을 직접 안내했다.

“소협. 정문까지 모시겠소이다. 나를 따라오시오.”

경비대장은 행동으로 보여줬다.

주원장의 진영에서 마른 비 일행은 특급 대우를 받는 귀빈이라는 걸.

뒤늦게 달려온 뜨내기들이 함부로 대하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봤냐? 병신들아?”

순식간에 기분이 풀린 철중구가 낄낄댔고, 마른 비와 여규도 어깨를 으쓱하며 경비대장의 뒤를 따랐다.

“……어?”

마른 비가 멈춘 건 정문 가까운 곳에 외따로 뭉쳐 있는 사람들을 봤을 때였다.

그들은 정파와 사파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떨어져 있었는데, 그 안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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