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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40화 (240/463)

240화

“……사천당가?”

진녹색 무복을 입은 자들은 마른 비 일행을 보고 있었다.

마른 비는 그들 사이에서 당운석과 당영령을 발견했다.

“운석이?! 영령이까지? 너희가 여길 어떻게…!”

주원장의 진영에서 저들을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른 비는 반가워하며 환한 얼굴로 달려갔다.

“오랜만이다, 비아야. 규도 같이 있구나.”

“진짜 놀랐어. 오왕 님을 알현하러 왔는데 별비가 떡하니 앉아 있지 뭐야.”

당운석과 당영령도 마른 비를 보고 반가워했다.

하지만 순수하게 기뻐하는 마른 비와 달리 그들은 복잡한 얼굴이었다.

“우린 오래 전에 본가가 오왕 님과 맺은 약조 때문에 힘을 보태러 왔다. 너희야말로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그러게. 여기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당운석과 당운령의 어조는 내내 무거웠다.

그리고 마른 비와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을 힐끗거렸다.

마른 비가 의아해하는 찰나, 당운석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먼저 말했다.

“아, 이런…. 비아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널 다시 보게 돼서 정말 기뻐. 다만… 본가 내부의 문제로 마음이 무거워서 마냥 들뜰 수만은 없네.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당영령도 또 한번 주위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나도 그래. 꼭 다시 보고 싶었어. 음… 근데 비아야. 무림인들이 모여 있을 때 우릴 아는 척하는 건… 네게 별로 좋지 않을 거야.”

마른 비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파와 사파 무림인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다는 것을.

그들의 입가엔 비웃음까지 걸려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여규가 조용히 속삭였다.

“전에 이야기한 적 있잖아. 당가가 독을 다룬 뒤로 무림의 인식이 안 좋아졌다고.”

“아…….”

마른 비는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당가의 명성을 바닥까지 추락시킨 사건.

가전무예의 한계를 극복하고 식구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 그들을 오대세가에서 끌어내렸다고 했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사를 불문한 무림인 모두가 당가를 깔보고 멸시하는 분위기였다.

“놀고들 있네.”

뒤에 멀뚱히 서 있던 철중구가 툭 뱉었다.

상황을 짐작한 그는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어릴 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생각했다. 육갑들 떨고 앉아 있다고. 솔직히 나도 독을 쓰는 게 치사해 보이는 건 사실이야. 지금도 독을 뿌리거나 암습하는 놈을 인정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철중구는 주위를 슥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그건 강약을 논하는 무공의 관점에서지, 실전에서 뭘 하든 그게 욕먹을 사유가 되나? 이빨로 물어뜯든 모래를 뿌리든 살아남으면 그만인 거야. 니들도 막상 뒈지기 직전이 되면 뭐든 할 거잖아. 안 그러냐, 규야?”

“동의해. 왜 싸우는지가 중요한 거지, 어떻게 싸우는지는 각자의 선택이라고 봐.”

이십 대 초반쯤 돼 보이는 정파 무인이 코웃음을 쳤다.

“역시 천한 것들과는 상종을 못 하겠군. 그것이 정도를 걷는 우리와 너희 잡것들의 차이다. 난 추하게 이기느니 명예롭게 패할 것이다.”

그는 말하면서도 스스로 만족스러운 듯했다.

허여멀건 인상과 투기가 깃들지 않은 눈.

제대로 된 실전 한번 치러보지 않은 놈이리라.

철중구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웃었다.

“그래서 명예롭고 귀하신 그쪽 분은 소속이?”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의 정의문(正義門)이다. 우린 뿌리 깊은 정파의….”

“아아, 이름만 들어도 알겠어. 곰팡내가 진동을 하는구만. 근데 말야. 얘는 구파일방의 제잔데? 점창파라고 알랑가 몰라?”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철중구는 얄미운 얼굴로 낄낄댔다.

“난 정의문이라는 데를 처음 들어봐서. 구파일방보다 인정받는 정도의 문파라면 인정. 아니면 깔끔하게 닥쳐줄래?”

“우, 웃기지 마라! 점창의 제자가 왜 너 같은 놈과 어울린단 말이냐? 야만인은 또 뭐고?”

저 한마디로 알겠다.

말을 섞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진영 논리로 머리가 딱딱하게 굳은 인간을 붙잡고 말해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의외의 장소에서 벌어진 무익한 논쟁은 또 한번 경비대장이 정리해줬다.

“무림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왜 이토록 쓸모없는 논쟁으로 편을 가르고 다툰단 말인가. 정의문이라 했나? 자네, 돌진해오는 몽골 기병대 앞에서도 그딴 소리가 나오는지 지켜보겠네.”

독, 암기, 기습, 합공… 뭐든 상관없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고 살아남기 위해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경비대장의 단호한 말에 정의문의 제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돼버렸다.

“한 가지 분명히 일러두겠네. 당가의 가주께선 십 년 전부터 전하의 뜻에 동참해왔어. 무림 문파 모두가 모른 척했을 때 당가만이 전하의 요청에 응답했지.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는 날, 당가주께선 개국 공신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것이네.”

당가 역시 마른 비 일행처럼 귀한 손님이다.

그러니 너희가 함부로 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경비대장은 하고자 하는 말을 최대한 부드럽게 돌려 표현했다.

“키야아~! 이 아저씨, 멋지구만? 얼빵하게 비아 뒤나 쫓아다니던 날이랑은 영 딴판이야?”

철중구는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웃어 젖혔다.

‘가주님…….’

하지만 정작 통쾌해야 할 당가의 인물들은 웃지 못했다.

당가가 세가의 미래를 건 도박에서 소기의 성과를 얻었음을 확인한 순간이다.

의기양양할 만도 하련만, 당가의 인물들은 전부 침통한 얼굴이 됐다.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당가의 손님들께서도 나를 따라오시게. 녹수대주께서 방금 절차를 밟으셨으니 여기서 대기할 필요가 없다네.”

녹수대주.

당가의 인솔자는 당건휘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당문휘는 세가에 남은 걸까?

오랫동안 비상을 준비한 당가가 마침내 움직이고 있었다.

“…….”

경비대장을 따라 이동하는 마른 비 일행과 당가의 식솔들.

그런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다.

정확히는 마른 비를 보고 있었는데, 시선의 주인은 당건휘였다.

그는 자신들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올린 후 숙소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세가의 가솔들에게 합류하는 길에 마른 비를 보고 멈췄다.

‘와족…….’

사천에서 마른 비를 본 뒤, 당건휘는 수하를 운남으로 급파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운남을 헤집고 다닌 끝에 놀라운 내용을 들고 온 수하의 보고를 떠올리고 있었다.

‘일개 원시부족이 점창을 일대일로 꺾었단 말이지.’

중원 무림이 떠들썩해질 일이었다.

외따로 떨어진 변방, 황실과 중원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더 놀라운 건 아직 잠잠한 걸로 보아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점창의 장문인이 무공은 떨어져도 굉장한 수완가라고 했었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철저히 정보를 은폐한 게 분명했다.

넓은 땅에 도시라고는 대리와 곤명뿐이고, 그마저도 태고의 밀림이 장벽처럼 둘러친 운남의 특성 덕분이겠지만 말이다.

몇 달 만에 복귀한 수하의 보고를 듣자마자, 당건휘는 가용한 인원을 전부 운남에 투입했다.

그리고 공지량이 몇 년째 부재중이란 것과, 그의 직속 세력이 모조리 물갈이된 것을 알아냈다.

천신만고 끝에 과거 응목대원이었던 자들을 찾아내서 접촉했고, 직위 해제된 채 야인처럼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전쟁의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삼십여 년 전의 원한. 그리고 운남의 알짜배기 땅들을 손에 넣기 위한 작업. 표면적으론 그게 전부인 것 같지만, 아니야.’

직감일 뿐이지만, 당건휘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운남 남서쪽 끝에 모여 산다는 와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일일 터였다.

세가의 명운을 건 일이 진행 중이기에 그 이상은 파고들지 못했지만, 당건휘는 언제고 이 일을 다시 조사하리라 마음먹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고개를 돌리자 눈자위에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웃고 있었다.

사내의 뒤에는 꽤 많은 인원이 모여 있었는데, 그가 그들의 대표인 모양이었다.

사내는 당건휘에게 호의적인 미소를 보냈다.

“당가 덕분에 오왕의 진영에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먼저 간 동지들도 고마워할 겁니다.”

삼전검 진규였다.

성도의 파촉객잔에서 살막의 살수들에게 급습을 당했던 그는 마른 비 덕분에 무사히 당가와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원 황실에 대항하는 주원장의 진영에 힘을 보태길 바랐고, 사천에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당가로 향했다.

주원장을 돕기 위해 당가가 착수한 작업에는 싸움에 능한 무인들을 모아 비밀리에 공급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가와의 연결고리까진 알지 못했지만, 원 황실은 천하 각지에서 강남의 저항군에게 합류하는 이들을 처단하고자 했고, 막대한 돈을 풀어 살수 단체나 인간 사냥꾼들을 고용했다.

살막의 살수들이 진규의 일행을 쫓았던 배경에는 이 같은 사정이 있었다.

“별말씀을. 대의를 위해 몸을 돌보지 않는 협사들이 아니십니까. 미력하나마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당건휘는 진규와 그의 뒤에 있는 무인들을 보며 웃었다.

사천 전역에서 모인 협객들은 수백에 이르렀고, 원을 무너뜨리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하지만 공손한 겉모습과 달리 당건휘는 속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당문휘와 달리 철저하게 실리에 입각해 움직이는 그는 아무런 이득도 없이 전쟁에 참여하는 진규와 같은 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청년은 정말 몰라보게 강해졌군요. 그때만 해도 뭐 이런 괴물이 있나 싶었는데, 이제는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준에 이른 것 같습니다.”

당건휘의 속내는 꿈에도 모른 채 진규는 흡족한 얼굴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더없이 따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오해를 해서 다짜고짜 공격했음에도 마른 비는 살막의 암수로부터 일행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진규는 당가에 있을 때, 뜻을 같이 하는 무인들에게 틈만 나면 마른 비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렇군요. 운석과 영령이 비무를 청했을 때, 어쩌다보니 저도 저자와 잠시 손을 섞게 되었지요. 자부하던 독들이 통하질 않더군요. 정말 대단했습니다.”

당건휘는 진규의 말에 동의하는 척했다.

마른 비를 보는 그의 눈이 착 가라앉아 있는 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주원장을 보고 온 마른 비는 안락한 숙소에서 몸을 회복하는 데 전념했다.

그간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제대로 쉴 시간이 없었고, 주원장을 지키고 사영을 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투화장으로 끌어낸 잠력의 격발은 몸에 굉장한 부담을 줬다.

경이적인 회복력을 지닌 마른 비조차 얌전히 누워서 몸이 낫길 기다려야 할 만큼.

마른 비는 이 기회에 사영과 비마와의 전투에서 얻은 경험들을 소화하기로 했다.

특히 한 차원 앞선 시간의 영역에 진입해 만물이 느려지는 것처럼 느꼈던 경험은 반드시 숙고해야 할 과제였다.

마른 비는 여규, 철중구와 함께 주원장이 제공한 산해진미를 즐기며 느긋하게 싸움을 되짚고 있었다.

똑- 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 건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

“누구야? 들어와.”

문이 열리고, 화려한 의복을 걸친 소년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아이는 총명한 눈이 인상적이었는데, 나이에 맞지 않게 진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음…….”

마른 비의 눈이 절로 커졌다.

설령 천명을 타고난 자라도 존재감을 드러내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다.

하지만 소년에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이 느낌은 마치…….’

주원장.

주원장을 처음 봤을 때와 흡사한 느낌이다.

마른 비와 정면으로 시선을 맞추던 소년이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이 아버님을 구했다는 이족의 사내로군요. 귀가 따가울 정도로 당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호기심이 동하여 찾아왔습니다.”

소년은 별빛 같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오왕 전하의 넷째 아들인 주체(朱棣)라고 합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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