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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41화 (241/463)

241화

마른 비는 자신을 주체라고 밝힌 소년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물론이지. 앉아.”

주체는 또박또박 걸어와서 마른 비 앞에 놓인 책상에 앉았다.

침상에 걸터앉은 마른 비와 마주 보는 위치.

곧게 편 허리와 단정한 자세에서 정갈함이 드러난다.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임에도 힘 있는 눈빛에선 장부의 기세가 엿보였다.

이대로만 자란다면 주원장에 필적하는 걸물이 되리라.

마른 비는 주체가 흥미로웠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야?”

소년은 마른 비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직접 보고 판단하려 했습니다.”

“……?”

주체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마른 비의 호기심이 짙어질 때쯤, 조그만 입술을 뗐다.

“내 사람으로 들일지, 말지를요.”

“허…!”

옆에서 듣고 있던 철중구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내 사람으로 들일지 말지를 판단하려 했다고?

저런 건 인재를 등용하는 군주가 할 법한 말이 아닌가.

심지어 제안을 받는 측은 무조건 수락할 거라고 가정하고 늘어놓는 발언이다.

보자마자 면전에서 저런 소릴 꺼낸다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가?

철중구뿐만 아니라 여규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다.

하지만 마른 비는 진지했다.

“그렇구나. 꽤 중요한 일로 찾아왔네?”

주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아이인 제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우습지 않으신가요?”

마른 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데 나이는 상관없지. 물론 네 나이에 그런 말을 꺼내는 아이는 드물지만 말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난 네 나이 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거든.”

“솔직하시네요. 당신 같은 분은 처음 봅니다. 정말 독특해요.”

주체도 마른 비가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오길 잘했다는 마음이 얼굴에 묻어났다.

“저도 솔직해야겠어요. 사실 여기로 오기 전엔 반신반의했습니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너무 허황되게 느껴졌거든요. 한데… 건물 앞에 정말로 덩치가 산만한 백호가 엎드려 있더군요.”

별비를 본 모양이었다.

주체는 눈을 더욱 또렷하게 빛내며 말했다.

“그리고 당신……. 소문이 축소됐다고 느껴질 만큼 인상적이에요. 나이가 스물도 안 됐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해요.”

소감이 저렇다면 나올 말이 짐작이 된다.

그래도 마른 비는 끼어들지 않고 소년의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아버님께선 분명 천하의 주인이 되실 겁니다. 저는 형제가 많고, 앞으로 더 많아지겠죠. 그리고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런 경우 후계자를 제외한 형제들은 십중팔구 몰살합니다.”

주체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쳤다.

아무리 어른인 척해도 언뜻언뜻 비치는 감정들에서 아직은 어쩔 수 없는 아이라는 게 느껴졌다.

닳고 닳은 위정자, 예컨대 주원장이라면 저런 감정들까지 철저하게 숨길 테니까.

상대에게 감흥을 주기 위해 일부러 드러내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마른 비는 심각해진 얼굴로 대꾸했다.

“몰살……. 난 중원의 역사를 몰라. 틈틈이 배우고 있긴 한데 그런 세세한 부분까진 듣지 못했거든. 황제 자리를 놓고 권력 다툼을 하게 될 거란 말이지?”

“네. 맞아요. 특히 새로 들어선 제국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봐도 무방하죠.”

“형제들끼리 사이가 좋아도?”

“그들끼리의 관계가 좋고 나쁜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몰아가니까요. 신하들이 부추기든, 상대를 믿지 못하든, 또는 개인의 욕망이든. 결국 그건 생존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철중구와 여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는 느낌이었다.

마른 비는 진지하게 고민해봤지만 얼른 와닿지가 않았다.

부족의 족장 자리를 놓고 대입해 봐도 와족 식구들끼리 죽고 죽이는 건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중원을 돌아보며 권력이라는 개념에 제법 익숙해진 마른 비였지만, 형제끼리의 골육상쟁은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어우. 생각만 해도 싫다. 그렇게까지 해서 황제가 되어야만 하는 건가? 난 그런 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애초에 궤가 다른 인생이다.

살아온 삶과 처한 환경이 다른 이상 마른 비가 주체의 고민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이 어린 나이에도 매우 절박하구나, 느낄 뿐.

주체는 마른 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행복……. 그런 부분을 고려한 적은 없네요. 아니,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미래를 대비해야 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 뿐.”

주체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수년 후가 될지, 수십 년 후가 될지는 몰라도 저는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이렇게 태어난 이상 꼭 아버님의 뒤를 잇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원하는 바이며, 그래서 당신께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제야 본론이다.

주체는 제법 떨리는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직접 보고 나니 확신이 생겼어요. 당신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제게 힘을 빌려 주세요.”

주체의 어조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처음엔 내 사람으로 들일지 말지를 고민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마른 비가 필요하다고, 힘을 빌려 달라고 했다.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마른 비가 지금껏 본 자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미래의 권력을 탐하며 자신의 눈에 들기 위해 벌써 알랑방귀를 뀌는 모리배들과 달리, 마른 비는 자세를 낮춰 영입해야 할 자였다.

그렇게 해도 거절당할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걸, 주체는 예감하고 있었다.

“미안. 그건 어렵겠어.”

마른 비는 단칼에 거절했고, 주체의 눈엔 실망이 어렸다.

하지만 빠르게 회복됐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인 주원장조차 마른 비를 영입하는 데 실패했다는걸.

자신이 보기에도 이 남자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타인을 도울지언정 누군가의 밑에 들어갈 사람은 아니었다.

“아쉽네요.”

소년은 솔직하게 심정을 표출했다.

“아저씨에게 그랬듯 인연이 닿는다면 돕게 될지도 몰라. 너무 실망하지 마.”

마른 비는 주체가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대안을 제시했다.

“아까 보니까 외부인들이 많이 와 있더라고. 그중에 네게 힘이 되어줄 사람도 있지 않을까?”

마른 비는 나름 고심해서 꺼낸 말이었지만, 주체는 단호했다.

“아뇨. 그들은 안 됩니다.”

“왜?”

“그들은 승냥이 같은 자들이니까요.”

주체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날카로운 눈으로 말했다.

“아버님께서 힘을 갖추기 전에는 합류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강남을 제패하고 원을 밀어낼 것 같자 우르르 몰려든 거죠. 그전에는 아버님이 내민 손을 모른 척했던 자들입니다.”

“음……. 근데 그건….”

마른 비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는지 주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죠.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는 곳에 몸을 던질 순 없으니까요. 아버님께선 그들이 탐탁지 않더라도 받아들이실 겁니다. 하지만 제 상황은 아버님과 다릅니다.”

“아… 그렇구나.”

당장 전력이 될 자들이 필요한 주원장과 달리 주체는 먼 미래를 준비하는 입장이다.

그에겐 믿을 만한 자들이 필요한 것이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은 오히려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어린 소년은 벌써부터 군림자가 되기 위해 먼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혹시나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거절당했다고 해서 치졸하게 앙심을 품거나 하진 않으니까요.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부숴버릴 거야, 라는 식의 정신 이상자는 아니….”

말을 잇던 주체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봤다.

여규와 철중구는 물론이고 마른 비까지 표정이 이상했다.

“왜… 그러시죠?”

철중구가 여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똑같은 말하는 거 봐.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주원장 그 인간, 진심이었던 거야.”

“그러게. 갑자기 오한이 드는데……. 우리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히는 거 아냐?”

둘이 진담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주체는 철중구를 보며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가? 난 자네들도 마음에 드네. 내 휘하에 들어온다면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지.”

철중구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대? 자네? ……해주지? 왜 우리한테는 말투가 그런데?”

“몰라서 묻는가?”

한족의 영토를 지배하는 왕의 아들.

그리고 곧 황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자.

일신에 지닌 능력 또한 철중구에 비해 마른 비가 월등하다.

주체가 철중구와 마른 비를 대하는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시벌, 운남 촌구석에서 다시 태어나 수련을 쌓든지 해야지, 서러워서 원.”

“올 텐가, 말 텐가?”

기분이 상한 철중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가! 네 밑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들어간다, 이 꼬맹아! 넌 날 담을 그릇이 아냐!”

성질대로 지르긴 했는데 걱정이 된 모양이다.

철중구는 저도 모르게 목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고 막 칼 든 애들 보내고 그러진 말고. 거절당했다고 꽁해있는 건… 남자답지 못해.”

주체와의 만남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현시점에 황제가 되려는 주원장은 그렇다 쳐도 미래의 황위를 노리는 자까지 마른 비를 찾았다는 건, 그의 위상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숙소를 나오니 마주치는 자들마다 마른 비에게 인사를 하고 관심을 보였다.

사람에 따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안면을 트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도 있었다.

야만인이라고 수군대던 때가 무색하게도, 마른 비는 지금 주원장의 진영에서 가장 주목받는 유명 인사였다.

“쳇. 좋겠다?”

철중구는 괜히 툴툴댔다.

아무도 자신을 아는 척하지 않는다.

장사 어디를 가도 주인공이나 다름없던 그가 마른 비와 있으면 주변인으로 전락해버리니 그로서는 배가 살살 아플 만도 했다.

그건 철중구에게 있어 마른 비를 좋아하고, 그가 인정받아서 뿌듯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모양이었다.

“내가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남자가 아닌데……. 나 사호인데……. 허 참.”

철중구가 마른 비나 여규로서는 신경 써본 적도 없는 문제를 고민할 때, 가뜩이나 작아진 그의 존재감을 개미 똥구멍 수준으로 끌어내릴 남자가 복귀했다.

“……사영?!”

마른 비가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리며 뛰어갔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사영이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전고투를 치렀는지 가뜩이나 심각했던 상처 부위는 더 엉망이 됐고, 얼굴에선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그의 주위엔 갑주가 깨지고 숫자가 부쩍 줄은 적색창기병이 함께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환마는… 잡았어?”

사영은 침중한 표정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마교의 타격대와 적색창기병까지 함께 한 공격.

소교주가 이끈 소탕 작전이 실패한 모양이었다.

“이런….”

모두가 압도적인 승리를 예상했다.

동굴을 살펴본 마른 비만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을 뿐이다.

비마가 죽고, 진 마라가 커다란 타격을 입었으니 그래도 괜찮겠지 싶었는데, 적의 전력이 상상을 뛰어넘은 게 분명했다.

“괜찮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그거면 됐어.”

마른 비는 침묵하는 사영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함께 사선을 넘었던 둘의 심리적 거리는 무척이나 가까웠다.

홀로 주원장의 진영을 휩쓸었던 사영과, 그를 막아섰던 마른 비.

두 남자가 재회하는 모습은 급변한 그들의 관계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일대의 모든 이들이 숨을 죽이고 둘을 주목했다.

이 와중에 입을 여는 건 철중구뿐이었다.

“저 시커먼 새끼는 왜 또 살아 돌아와서……. 이 몸의 존재감이 살수만도 못하다니….”

야투에서와 같은 열광이 그리운 철중구였다.

그가 괜히 투덜댈 때, 전투에서 복귀한 소교주는 주원장을 대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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