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창틀 사이로 햇살이 스미는 오후.
목조 건물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언뜻 봐선 평온해 보이지만, 내부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남자 때문이었다.
그들은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적색창기병들이 학을 떼더군.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소.”
먼저 입을 연 건 주원장이었다.
그는 느긋한 미소를 지은 채 소교주에게 말했다.
내어준 병력의 절반이 날아갔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추궁을 하지도, 전투의 결과를 묻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보이는 걸 그대로 믿을 만큼 소교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뼈아픈 손실을 안겨드려 송구할 따름입니다. 환마가 그토록 많은 준비를 해놓았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천진운은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책을 솔직히 시인했다.
그는 주원장의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올라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인세의 것으로 보기 힘든 괴생물체들이 득시글거렸다고 들었소. 어느 누가 그런 걸 예상할 수 있었겠소이까. 소교주의 탓만은 아닐 것이오.”
주원장은 알고 있다.
천진운이 환마를 찾고자 한 이유가 마라 때문이라는걸.
천진운도 알고 있었다.
주원장이 자신의 목적을 눈치채고 있었다는걸.
그럼에도 덮어주는 건 그걸 빌미로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함이리라.
‘여기서 원하는 답을 주지 못한다면 상황은 급변하겠지.’
이건 거래이며, 현재 빚을 진 건 자신이었다.
지금은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때였다.
“사영이라 합니다. 전하를 습격했던 살수의 이름.”
주원장은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천진운은 그의 기대감이 상승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전하의 말씀대로 그는 본교의 살수가 맞더군요.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저와 개인적인 인연이 닿았던 자이기도 합니다.”
주원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턱을 괸 채 눈빛으로 다음 말을 재촉할 뿐이다.
천진운은 일부러 말을 천천히 끌며 말했다.
“그를 전하의 계획에 동참하게 할 수 있느냐를 물으신다면…… 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주원장은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천천히 허리를 세우고, 등받이에 등을 기댄다.
몸짓으로 드러내는 흡족함이었다.
하지만 천진운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저울을 동등하게 맞출 때였다.
천진운은 짐짓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원장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무거운 침묵으로 계속하라고 채근할 뿐이다.
천진운은 기울었던 저울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 걸 느꼈다.
“저는 그에게 부탁을 할 수 있을 뿐, 명령할 수 없습니다. 그의 위치는 본교에서도 대단히 독특하기 때문이죠.”
“마교, 아니, 천마신교는 서열을 기반으로 한 위계질서가 철저하다고 들었소. 서열 2위의 소교주가 명을 내릴 수 없다라…….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동요하고 있다.
입을 연 순간부터 주원장의 평정은 흔들린 거나 다름없다.
천진운은 그제야 꼿꼿하게 세웠던 허리를 등받이에 기댈 수 있었다.
“본교의 기밀과 연관된 일이라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사실입니다. 그의 지위는 전통적인 서열 체계를 벗어나 있죠. 아니, 애초에 서열에 편입된 적도 없는….”
“그만. 말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지. 음살의 후계자. 내 말이 틀린가?”
주원장의 말투가 변하고 있었다.
또한 전과 달리 서두르고 있다.
평온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속이 들끓고 있다는 증거였다.
“맞습니다. 저도 이번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사영은 그분의 진전을….”
“그렇군. 그랬어. 그래서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늘어놓는 거군.”
주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빛냈다.
“이거면 정리가 되겠군. ‘가장 오래된 삼 인.’ 맞나?”
“당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천진운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전하’라고 하던 호칭이 ‘당신’으로 변한 점에서 그 역시 평정이 깨졌음을 알 수 있었다.
천진운이 그랬듯, 주원장도 그의 변화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날 바보로 아는가? 자네도 짐작하고 있을 텐데? 원래 나와 계약을 맺은 자를.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자네에게 접촉했단 것도.”
“그렇다 해도 당신이 어찌 그 이름에 닿을 수가…!”
여기까지 패를 열어 보인 이상, 이제 표정 관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원장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날 너무 가볍게 본 모양이군. 내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 정도도 알아보지 않고 그에게 칼을 겨눴을 것 같나?”
이걸로 확실해졌다.
소교주씩이나 되는 자가 신강에서 튀어나와 중원을 휘젓고 다닐 때부터 예상은 했다.
비마의 이름을 듣자마자 직접 추격하겠다고 나섰을 때, 구할 가까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주원장은 천진운과 자신의 적이 같다는 걸 확인했다.
“당신의 말이 맞소. 내가 당신을 가볍게 본 모양이오. 심지어 그의 정체를 알면서도 배신한 거라면…… 진정 놀랍구려.”
“놀라운 건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달걀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을 텐데 저항하고 있지 않나. 나와 달리 자네는 그의 사정거리에 있었으면서도 말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탐색은 이걸로 끝이다.
피곤하기만 한 밀고 당기기도 마찬가지.
서로의 적이 같다는 걸 확인한 순간, 주원장과 천진운은 상대의 처지를 짐작했다.
상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명령을 내릴 수 없다는 점, 이해했네. 하지만 난 그 살수가 꼭 필요해. 어떻게 안 되겠나?”
주원장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천진운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가능하오. 사정을 설명하고 부탁한다면. 그게 그의 목적에도 부합하는 일이니까.”
“자네, 역시 일부러 그런 것이었군. 그를 움직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으면서 말이야.”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오. 서로의 속내를 알 수 없었으니 없던 일로 해둡시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사영을 떠올린 천진운은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가 수락하리라 예상하지만, 아닐 수도 있소. 그는 우리와는 많이 다른 존재니까. 이런 말은 뭐하지만 그는… 불쌍한 자요. 그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나는 진심으로 미안하오.”
“의외로 감상적이군.”
천진운과 달리 주원장은 거리낌이 없었다.
사연이야 어찌 됐든 사영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다.
지금 주원장이 그를 찾는 건 필요에 의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반드시 그를 움직여야 하네. 십 년에 걸쳐 북쪽에 침투시킨 세작들이 작업에 착수했어. 때를 맞추려면 당장 그의 확답을 받아야만 해.”
“노력해 보겠소.”
“노력가지고는 안 되네. 무조건 성사시키게. 일이 끝난 후, 그의 목적이 달성될 수 있도록 나 또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야.”
공동의 적을 인식한 순간, 둘은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풀어졌다.
그리고 허심탄회하게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이게 최선인 듯하오.”
“나도 같은 생각이네. 한데 자네… 정말 괜찮겠나?”
“다른 방법이 없지 않소.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밤을 꼬박 새운 둘은 서로의 목적에 합치하는 방안을 도출했다.
두 거인이 합작한 그것은 강남에서 시작하여 중원, 신강을 거쳐 북방초원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계획이었다.
많은 이의 희생을 필요로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계책이기도 했다.
일이 잘못되지만 않는다면.
밑그림을 완성한 둘은 차갑게 식은 차를 마시며 혹사한 뇌를 달랬다.
오후에 시작한 회동은 날을 넘겨버렸고, 어느덧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천하를, 자네는 위협받는 교의 안위를……. 둘 모두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길 바라겠네.”
“그래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창으로 스미는 새벽의 공기를 음미하던 천진운이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물었다.
“마른 비. 그 이족의 청년은 왜 당신의 진영에 있는 것이오?”
“그를 아나?”
주원장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천진운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오. 안다고는 할 수 없지. 매우 인상적인 사내여서 기억할 뿐.”
“마주쳤다? 아, 야투로군. 거기서 보았겠어.”
강무재의 보고를 떠올린 주원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마른 비가 있을 숙소 쪽을 바라봤다.
“사영이라고 했었나? 그자의 암습으로부터 날 구했네. 그 뒤엔 비마를 쫓아서 그 살수를 구출했지. 동굴의 위치를 알아낸 것도 그자야.”
“들었소. 결과적으로 그자 덕분에 당신과 내가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소이까. 환마가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겠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천진운은 동굴을 공격하여 환마가 준비한 것들을 대부분 부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환마와 진 마라의 숨통을 끊지 못했고, 그건 결국 천진운이 패배한 것과 다름없었다.
재밌는 건 환마는 다르게 생각할 것이란 점이었다.
강남 일대의 거점이자, 진 마라의 부화장인 동시에, 다수의 마라를 만들 수 있는 제조소.
동굴이 초토화된 건 환마에게 있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뼈아픈 손실이었다.
심지어 가장 큰 조력자인 비마까지 죽어버려서 환마는 당분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터였다.
그 모든 일을 촉발시킨 게 마른 비였으니, 환마는 갑자기 튀어나온 야만인 청년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할 게 뻔했다.
“그자, 당신의 수하요?”
도저히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지만, 천진운은 물었다.
주원장은 움찔하더니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영으로 들이려 했는데, 멋지게 차였지. 최근 몇 년 동안 본 자들 중 가장 탐나는 인재였는데 말이야.”
“호오… 당신의 제의를 거절했단 말이오?”
“그래. 내가 자신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더군.”
“뭐요? 그릇? 당신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하하하!”
역시 흥미로운 사내다.
저 주원장에게 그런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니.
천진운은 마른 비에게 어렴풋이 품었던 호감이 짙어지는 걸 느꼈다.
“정말 보기 드문 사내였소. 나이를 뛰어넘은 힘과 영수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렇지만, 설명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더군. 그가 당신을 돕게 할 수는 없겠소?”
주원장은 딱 잘라 말했다.
“불가. 뭘 제시하든 흔들릴 자가 아니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움직일 순 있겠지만, 역효과가 더 크네. 그런 자에게 쓸 방법이 아니지.”
잠시 말을 멈춘 주원장이 말했다.
“느낌일 뿐이지만, 적으로 둬선 안 될 자야. 그러기도 싫네.”
천진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오.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인데 그런 남자를 눈뜨고 놓쳐야 하다니……. 안타깝구려.”
다른 누군가가 들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청년을, 심지어 아무런 배경도 세력도 없는 이족의 사내를 이토록 후하게 평하다니.
천하를 논하는 두 거인이 마른 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즈음, 당사자는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명상에 빠져 있었다.
머나먼 타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전투 경험을 축적한 전사가 또 한번 도약의 때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