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관조.
마른 비는 모든 걸 잊은 채 내부로 침잠했다.
고요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돌이키고 들여다본다.
마른 비는 비마에게 달려들던 스스로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의 그 감각….’
바람, 구름, 풀, 몸을 숨긴 동물들과 곤충들은 말할 것도 없다.
대치 중인 비마와 자신을 지켜보던 별비와 사영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물이 멈춘 듯했다.
아니, 멈춘 게 아니라 자신이 그들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거지?’
단순히 육체만 빠르게 움직인 거라면 그런 현상이 나타날 리 없다.
전투화장으로 개방한 전신의 감각이 육체의 기동을 따라왔던 것이다.
적의 움직임을 포착할 동체 시력, 미세한 소리까지 잡아낼 청력, 적의 공격을 예측할 육감이 한층 앞선 시간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그건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비마의 속도를 앞지르는 것이었다.
‘다시 할 수 있을까?’
글쎄. 지금으로선 불가능할 것 같다.
전투화장 덕분에 한계를 초월한 경지를 잠시 맛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육체는 그때의 감각을 기억하며, 뇌리에 각인된 전율은 지워지지 않는다.
육체의 능력을 끌어올려 자유자재로 그 속도를 구현할 수 있을 때.
감각을 더욱 갈고닦아 무한히 쪼개진 찰나를 포착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모든 것을 압도할 빠르기를 손에 넣게 되리라.
“어이, 비아야. 끝났냐?”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하루가 지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만 하루 동안 그의 명상이 끝나길 기다린 남자가 있었다.
철중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잠도 자지 않은 채 마른 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까지 회피할 거냐. 한번 붙어야 해!’
기에 눌려서, 승산이 안 보여서, 싸우기 싫단 이유로 마른 비와의 싸움을 피해왔다.
그건 정말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철중구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찜찜했던 부분을 털고 가기로 했다.
“뭔 생각을 그리 오래 하냐?”
명상에 잠겨 있던 놈이 드디어 눈을 떴다.
마찬가지로 꼼짝 않고 마른 비만을 지켜보던 철중구는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새파란 빛이 번뜩이고 지나가는걸.
‘시벌… 뭔가 깨달았네. 좟 됐구만.’
중원 무인들처럼 오기조원(五氣朝元)이니 삼화취정(三花聚頂)이니 하는 요란스러움은 없지만, 직감으로 알겠다.
마른 비가 방금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는걸.
번쩍이는 강렬함이 잔잔한 눈빛 뒤에 숨는 순간, 철중구는 패배를 예감했다.
“하아… 재수 더럽게 없네. 안 그래도 힘든데 하필이면 지금….”
그렇다고 물러설 순 없다.
사나이가 마음을 먹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 법.
철중구는 고개를 돌려서 여규를 바라봤다.
“규야, 부탁한다.”
“끄응… 마음은 알겠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마른 비가 명상에 잠겨 있는 동안 무슨 말들이 오간 모양이다.
여규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고, 철중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하는 거 나답게 제대로 한다.”
“하아… 알았어. 나중에 후회하지 마. 난 분명히 말렸다?”
여규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철중구는 비장한 얼굴로 마른 비에게 말했다.
“비아야, 한판 붙자.”
“좋아.”
마른 비는 의외로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안 그래도 한번 움직여봐야 했어.’
깨달음을 당장 구현하는 건 무리지만, 한 가지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눈을 뜨자마자 철중구가 대련을 신청해왔고, 그가 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요청할 생각이었다.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적당한 게 철중구였으니까.
“오오오! 진짜다! 진짜 한다!”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마른 비가 움찔한 건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수백 명이 숙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른 비가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눈으로 묻자, 철중구가 답했다.
“우리를 궁금해하는 놈들이 많더라고. 규에게 사람을 모아 달라고 했다. 이왕 붙는 거 야투에서처럼 공개적으로 한판 붙자. 화끈하게 가자고, 화끈하게!”
경비대장의 엄포 때문에 대놓고 나서진 못하지만, 주원장의 진영에 당도한 무림인들은 마른 비 일행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
주원장의 손님만 아니었다면 벌써 시비를 걸고도 남았으리라.
직접 눈으로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건 무림인이란 자들의 특성이었다.
철중구는 일행의 실력을 증명하는 동시에 존재감을 뽐낼 목적으로 이 자리를 기획했다.
“드디어 소문의 실체를 확인할 순간인가.”
마른 비와 철중구가 한판 붙는다는 소식을 들은 무림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정파와 사파로 나뉘어 있었고, 그 안에서도 소속 집단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지한 분위기의 무림인들과 달리 병사들은 들떠 있었다.
“난 우 소협에게 이번 달 월봉을 모조리 건다.”
“저자가 정말 그렇게 세? 체격이 좋긴 해도 너무 어려 보이는데….”
“내 말 믿고 걸어. 살수가 침입한 날, 내원에 있던 자들은 전부 우 소협에게 걸 거다.”
마른 비를 기다리는 동안 병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내기가 시작된 모양이다.
내원에서 주원장을 호위했던 경비병들이 마른 비의 승리를 확신하는 반면, 내원에 들지 못했던 자들은 철중구의 승리를 예상했다.
“적색창기병의 지 부장이 깨지는 것 봤지? 철중구란 자, 보기 드문 싸움꾼이야. 난 저자에게 건다.”
“나도. 확실한 실적이 있잖아. 셀 수도 없는 사파의 후기지수 중 네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게 쉬운 일일 것 같아? 저자가 이길 거다.”
“우리도. 우린 야투에서 중구와 직접 싸워봤다. 부끄럽지만 우리 중에 중구에게 한칼도 제대로 먹인 놈이 없어. 저놈은 진짜다.”
야투에서 영입된 병사들도 철중구에게 돈을 걸었다.
마른 비가 마교의 장로를 쓰러뜨렸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다.
본인 말고는 목격한 자가 없는 것이다.
철중구가 인증해 주었지만, 제 놈도 승산이 있으니 이렇게 판을 벌인 게 아니겠는가.
그들은 설마 철중구가 패배할 걸 각오하고 공개 비무를 벌인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많이들 모였구만! 놀아볼 맛 나겠어!”
철중구가 우두둑 소리 나게 목을 꺾으며 말했다.
열세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음… 중구, 괜찮겠어?”
마른 비는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말했다.
철중구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과 그의 무력 차이는 상당하다.
비마와의 일전을 겪고, 새로운 경지에 눈을 뜬 지금은 그 격차가 더욱 벌어졌으리라.
마른 비로서는 철중구의 자존심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철중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카핫! 사타구니에 털도 안 났을 꼬맹이가 누굴 걱정하는 거냐! 나, 장사의 쾌남 철중구다! 비아 네가 아무리 강해도 날 염려할 정도는 아냐!”
“음. 예전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 있는데, 난 꽤 풍성한 편이라고.”
철중구는 마른 비에게 도를 겨누며 말했다.
“시끄럽고! 실전이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해라! 힘을 아끼면 우리 관계는 오늘로 끝이야!”
“알겠어. 그렇게 할게.”
철중구는 좌중을 둘러보며 외쳤다.
“잘 봐라! 그리고 그 눈에 똑똑히들 새겨둬! 내가 바로! 사호에 등극한 남자! 철중구다!”
푸화아아악―!
과연 큰소리칠 만하다.
철중구가 전력을 다해 뽑아 올린 적사자기는 짙붉은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내며 그의 도를 휘감았다.
붉은 철로 제련한 도가 아닌지 의심될 만큼 그 색은 뚜렷했고, 기운은 농밀했다.
지켜보던 무림인들 사이에서 경악이 터졌다.
“마, 말도 안 돼! 도강(刀罡)?!”
“……아니야! 도기를 밀도 있게 응축한 거야! 도강의 경지는 아니다!”
철중구의 도기는 순간 도강으로 착각할 만큼 막강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과거 마른 비를 뒤쫓던 설지굉이 애뢰산에서 선보인 회설검기가 딱 이랬다.
한끝 차이로 절정에 모자란 경지.
나이를 감안하면 경악할 수밖에 없는 재능이었다.
“길거리 싸움꾼이라지 않았나? 그런 놈이 어떻게 저런…!”
안목이 있는 무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너무 일렀다.
철중구의 진정한 저력은 실전에서 발휘되는 유연한 투술이었으니까.
“카아압!”
철중구는 곧바로 달려들었다.
마른 비는 자신이 사정 봐 줄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붉게 타오르는 도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흠….”
쩌어어어엉―!
마른 비는 피하지 않았다.
교룡갑을 둘러친 팔뚝으로 도의 궤적을 막아설 뿐이다.
수년 전 설지굉의 수준 정도로 그를 물러서게 하기엔 한참이나 모자랐다.
“매… 맨손? 저걸 맨손으로 막았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놈들, 짜고 치는 것 아냐?!”
상식을 뛰어넘는 광경은 불신을 낳는다.
자신의 무공에 자부심을 가진 자들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심했다.
하지만 이어진 격전을 본 이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예상했던 바다.
철중구는 도가 가로막힌 상태에서 그대로 회전했다.
정수리를 마른 비 쪽으로 향하고 휘돌자, 도가 몸을 따라 풍차처럼 회전했다.
잔기술 따윈 배제한 직도 참격!
회전력이 가미된 적사자의 발톱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렸다.
“카아합! 사자포지(獅子跑地)!”
대지를 긁어 파는 사자의 발톱처럼.
맹렬한 일격은 철중구의 모든 걸 담은 한 수였다.
교룡갑을 발동한 상태라도 이런 걸 정면으로 받으면 부상을 입고 만다.
마른 비는 땅을 박차며 거꾸로 회전했다.
“역, 불벼락.”
회피 기동 없이 철중구의 모든 걸 정면으로 받아주리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른 비는 그래야만 한다고 느꼈다.
꽈아아아앙!
양측 다 회전을 등에 업고 쏟아낸 강격이다.
불벼락은 말할 것도 없고, 철중구의 사자포지 또한 패력에 집중한 맹격이었다.
하지만 격차는 명확했다.
“크윽…! 빌어먹을!”
철중구의 손아귀가 터지며 도가 하늘을 날았다.
사자포지를 완성한 이후 힘에서 밀린 적이 없건만 마른 비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력의 수급 또한 마른 비가 한 수 위였다.
“자세 잡아, 중구. 바로 갈 거야.”
거꾸로 회전하며 뒤꿈치를 올려 찼음에도 마른 비의 자세 전환은 탁월했다.
어느새 착지하여 물 흐르듯 짓쳐온다.
강대한 힘! 포탄 같은 충격파!
천둥바위가 터질 때, 구경꾼들은 끝을 예감했다.
“비아, 너 이 새끼…!”
본 적 있는 기술이다.
등으로 끊어 치는 강격.
하지만 힘이 많이 빠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전력을 다한 천둥바위는 철중구를 산산조각 낼 것이고, 마른 비는 무의식적으로 힘을 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행동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철중구는 배려를 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전력을 다하랬지! 내가 죽음이 겁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철중구의 전신이 붉게 타올랐다.
스스로도 더 이상 끌어올릴 수 없다고 여겼지만, 그의 기운은 분명히 치솟고 있었다.
어릴 때의 짧은 인연을 끝으로 혼자 수련한 철중구는 알지 못했다.
패군의 적사자기는 중단전에 큰 비중을 둔 심법이었으며, 시전자의 감정 상태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눈자위까지 붉게 물든 철중구가 주먹을 내뻗었다.
“날 얕보지 말란 말이다!”
쾅! 콰콰콰캉!
철판을 두드리는 충격음이 울렸다.
철중구는 천둥바위를 목격했고, 그의 전투 감각은 한 번 봤던 기술을 흘려버릴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천둥바위는 정교한 투로보다는 알고도 막을 수 없는 힘으로 적을 압살하는 기예였다.
철중구를 염려한 결과지만, 힘을 뺀 건 마른 비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큭…!”
천둥바위가 중간에 끊긴 적이 있었던가?
철중구의 사자아권(獅子牙拳)은 등판에 노출된 요혈들을 사정없이 두드렸고, 마른 비는 내장이 진탕되는 충격을 받았다.
주먹뼈가 부러진 듯 덜렁댔지만, 철중구는 멈추지 않았다.
“같이 사선을 넘고도 아직 날 몰라?! 나 철중구다, 이 새끼야! 방심하면 네가 죽어!”
철중구는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몸체가 휘리릭 돌아가고, 수많은 적을 때려눕힌 발차기가 쇄도했다.
마른 비는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미안, 중구. 내가 잘못했네. 최선을 다할게.”
마른 비의 안광이 번뜩이는 순간, 바람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