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쐐애애액― 콰앙!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얻어맞은 거 같은데 상황 파악이 안 된다.
자신이 하늘을 날고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철중구는 의식을 잃었다.
쐐애액― 풀썩.
마른 비는 일격을 꽂아 넣자마자 그대로 전진해서 철중구를 앞질렀다.
그리고 추락하는 그를 무사히 받아냈다.
“중구! 괜찮아?”
철중구는 눈을 까뒤집고 입을 헤 벌린 채 기절해 있었다.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라서 마른 비는 구경꾼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의 얼굴을 가렸다.
철중구를 배려한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별 의미는 없었다.
수백 명의 사람 중 누구도 철중구를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바, 방금 뭐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왜 승기를 잡고 있던 중구가 날아간 거지?”
“우 소협이 갑자기 사라졌어…!”
일반 병사들 중 마른 비의 움직임을 포착한 자는 없었다.
그건 정예라는 적색창기병도 마찬가지였다.
지휘자급의 장수들도 겨우 희끄무레한 잔영을 잡아낸 게 전부였다.
“으음…….”
“바, 방금 그 움직임…! 이럴 수가!”
상대적으로 무공에 익숙한 무림인들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축적된 경험으로 마른 비가 무얼 한 것인지 짐작할 뿐.
극소수의 고수들만이 마른 비의 기동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보는 눈이 있는 만큼 경악의 정도는 무림인들이 더했다.
“비마를 잡았다고 하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나…. 방금 그 속도는…!”
“어, 어떻게 야만인이 저런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새외엔 변변찮은 무공도 없을 터인데!”
“그게 무슨 오만인가? 중원의 무공이 최고라는 증거라도 있나? 초원의 십칠식 참마도법은 둘째치고, 서쪽의 사막과 북쪽의 설원, 동쪽의 반도에도 신비한 문파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야!”
“그건 소문일 뿐이잖아! 난 믿을 수 없다! 둘이 친한 사이라고 하니 뭔가 눈속임을…!”
비방과 불신에 찬 말들이 오갔지만, 결론은 하나다.
마른 비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
그의 나이와 출신 때문에 내심 얕보고 있던 자들은 경악을 터뜨리며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뭐라고 떠들건, 철중구를 무사히 받아낸 마른 비는 직전의 상황을 복기하고 있었다.
‘결…!’
성년식 중에 체득하여 완전히 몸에 붙인 개념이다.
이제는 동작 하나하나에 녹아들어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구현하는 이치였다.
새로운 과제의 돌파구로써 한동안 잊고 있던 결의 활용을 떠올렸고, 결과는 아주 좋았다.
철중구처럼 감각이 발달한 싸움꾼조차 자신의 움직임을 인지하지 못했으니까.
‘대기의 흐름. 공간의 결.’
온몸을 수압이 짓누르는 듯한 경험.
한발 앞선 시간의 영역에서 원활히 움직이기 위해 대기의 흐름과 공간의 결을 읽는다.
한없이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개념이지만, 마른 비는 가능할 거라고 봤다.
지형의 결을 읽어 기동의 질을 향상시켰듯이 공간을 더듬어 최단의 경로를 읽는 작업도 가능하리라 예상한 것이다.
단 한 걸음만 단축할 수 있어도 그게 어딘가.
마른 비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 한번 도약의 기회를 만들어냈다.
‘실제 그 영역에서도 가능할까?’
방금은 제어 가능한 속도에서의 실험일 뿐이다.
한계를 넘은 상황에서 같은 게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성공하는 순간 새로운 경지가 열릴 거라는 점이었다.
“좋아.”
마른 비가 만족하며 웃을 때였다.
“좋긴, 시벌… 뭔 짓을 한 거야? 내가 네 연습용 목각인형이냐? 괴물 같은 새끼….”
철중구가 의식을 차렸다.
“어, 어? 중구! 괜찮아?!”
철중구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하나도 안 괜찮아. 존나 아퍼. 창자가 똥구멍으로 튀어나올 거 같아.”
“휴우… 죽진 않을 모양이네.”
마른 비의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여규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규, 너도 얘랑 싸워봐라.”
“나? 내가 왜?”
“나만 처맞으니까 존나 억울해. 그리고 창피해. 점창파 제자가 나란히 뻗으면 덜 쪽팔릴 거 같다.”
“그런 이유라면 정중히 사양할게.”
“겁쟁이. 쫄보 새끼. 이길 싸움만 하는 나약한… 어억!”
손가락으로 쿡 찌르자 철중구는 죽을 듯이 비명을 질렀다.
여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반응이 재밌는지 키득대며 웃었다.
“누가 사람들 모아놓고 싸우래? 난 분명히 말렸다? 네가 자초한 일에 왜 나까지 끌어들이려고 해? 그리고 난 이미 비아와 싸워봤어.”
“뭐? 싸워봤다고? 언제?”
“음… 4년 전에?”
“4년 전? 완전 코찔찔이 꼬맹이일 때잖아! 누가 이겼냐?”
“졌지. 그때는.”
“그때는? 오호라~ 지금은 다를 것이다? 야, 거기 구경꾼들! 이놈 이거 점창의 제자다! 비아와 이놈을 싸움 붙여… 커헉!”
여규는 사정 봐주지 않고 주먹으로 후려쳤다.
겨우 눈에 초점이 잡히던 철중구는 턱이 돌아가며, 다시 눈이 흐려졌다.
“너, 너 이 새끼… 내가 못 움직인다고…!”
“그만 떠들고 자. 깨면 푹신한 침상일 거야.”
“이 개새…! 비아, 네가 팼으니까 날 간호해라. 난… 잔다….”
하여간 몸 하나는 튼튼한 놈이다.
반은 기절한 상태로 주절대던 철중구가 의식을 잃었다.
마른 비는 그를 안은 채 일어서서 숙소로 향했다.
경악, 두려움, 선망과 질시…….
온갖 감정이 버무려진 시선에 등이 따가웠지만, 마른 비는 개의치 않았다.
똑- 똑-
철중구를 침상에 눕히고 의원을 기다릴 때였다.
문이 열리며 반가운 얼굴이 방으로 들어섰다.
“어? 사영?! 어서 와! 몸은 괜찮아?”
치료를 받았는지 사영의 상태는 며칠 전보다 훨씬 양호했다.
그도 마른 비가 보고 싶었는지 보기 드문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툰 사영은 방문 앞에 선 채 머뭇거렸다.
다행히 마른 비는 어색함을 일소하는 데 있어 따라올 자가 없는 존재였고, 쏜살같이 달려 나가서 사영의 손을 마주잡았다.
“잘 왔어! 아직 밥 안 먹었지? 같이 밥 먹자!”
마른 비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사영을 반겨주었다.
평생토록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살갑게 대한 적이 있었던가.
사영은 마른 비의 반응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그는 멍하니 선 채 할 말을 고르다가 입술을 뗐다.
“고맙다. 반갑게 맞아줘서. 믿을지 모르겠지만, 너는… 나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사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친구.
너무나 외로워서 외로운 줄도 몰랐던 그의 삶에 마른 비는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사영이 마른 비에게 느끼는 감정은 존경과 고마움이 주를 이루는 스승에 대한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곧 죽을지도 모를 곳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최고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사영은 자신의 손을 붙잡은 마른 비의 손을 꼭 쥐었다.
〔전부터 느끼던 건데, 너희 말이다. 서로 반하기라도 한 거냐? 뭘 그리 뜨거운 눈으로 바라봐?〕
생고기를 뜯던 별비가 장난스레 물었다.
〔희한하군. 인간도 수컷끼리는 교미가 불가능한 걸로 아는데.〕
“뭐, 뭐라는 거야? 교… 뭐?! 별비 너 미쳤어?”
〔뭘 그리 당황하나.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면 당연한 일인데.〕
“네가 뭘 알아? 너도 해본 적 없으면서!”
〔나는 만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너처럼 너 좋다고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암컷을 차 버리진 않아. 세상을 다 뒤져봐라. 그런 암컷이 또 있나. 멍청한 고자 같으니.〕
노을이를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별비 저놈,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태 모른 척했던 건가?
마른 비는 울컥해서 외쳤다.
“노을이랑 나는 그런 사이가 아냐! 어릴 때부터 엄청 친한 친구라고!”
〔맙소사…. 역시 멍청한 고자가 맞네. 종이 다른 나도 보자마자 알겠던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억울하고 창피하다.
마른 비가 벌게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눈이 화등잔만 해진 사영이 더듬대며 말했다.
“뭐, 뭐야? 지금 저 호랑이가 말하는 거냐?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건가?”
사영도 놀랐지만, 마른 비와 별비의 놀라움은 그 이상이었다.
마른 비가 입을 쩍 벌린 채 외쳤다.
“영이, 너… 별비의 울음이 들려?!”
“……진짜로군. 그래, 들린다. 중간중간 끊기긴 하지만 분명히 들려. 영수라는 건 다 저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세상에…!”
처음이다.
자신을 제외하고 별비의 의사가 전달된 인간은.
야수 제어를 구사하는 와족의 식구들조차 별비의 울음을 듣지 못했던 걸 감안하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인간이랬나?’
붉은 발톱은 언령과 비슷한 기술을 알려주며 말했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인간’에게만 의사가 전달될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건대 그건 아마도 별비가 호감을 품은 인간이어야 하며, 상대도 별비에게 같은 감정을 지녀야 하는 듯했다.
하지만 조건이 그것뿐일 리 없다.
그게 전부라면 여규와 철중구는 벌써 별비의 의사를 들었어야 하니까.
사영이 그들과 차별되는 것.
바로 마른 비처럼 상단전의 활용에 능하다는 점이었다.
“뭐야? 저 사람, 별비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야?”
여규도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별비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제 막 마른 비와 알게 된 사영이 별비의 말을 알아듣자 여규는 부럽고 심술이 났다.
“쳇.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되던데.”
“아마 사영은 뇌력을 활용할 줄 알아서… 어? 잠깐. 그러면 부족 식구들도 가능했어야 하는데?”
야수 제어의 경지는 개인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와족의 전사들은 전원 상단전을 개방한 자들이다.
조건이 그 두 가지뿐이라면 별비가 그들을 싫어할 리 없으니 그들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하는데….
‘뭐지? 타고난 인연? 아니면 궁합? 뭐 그런 게 있어야 하나?’
지금으로선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다.
후천적인 관계 맺음이 아닌, 선천적으로 별비와 이어진 끈.
그렇게 보면 대부분의 동물과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 마른 비는 정말 특별한 존재였다.
〔신기하군. 비아 외에 내 의사를 알아듣는 인간은 처음이야.〕
별비는 기분이 묘한지 그르렁댔고,
“내가 할 말이다. 짐승이 인간처럼 말을 하다니. 게다가 너 의외로 목소리가 괜찮은데?”
그걸 목소리라고 불러도 될지 의문이지만, 사영은 별비의 울음이 듣기 좋은 모양이었다.
〔흥. 뭘 좀 아는 인간이군. 영광으로 알도록. 내 의사를 듣는 건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그리고 비아 넘보지 마라. 전혀 안 그래 보이겠지만, 얘 임자 있는 몸이다.〕
별비의 의사에 집중하던 사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농담도 할 줄 아는 건가? 비아 널 만난 이후로는 놀라운 일투성이다. 정말… 새로 태어난 기분이야.”
사영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마른 비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고맙다는 말을 하러 왔다. 네 덕분에 새로운 길이 펼쳐졌어. 마지막까지 네게 선물을 받는구나, 비아야.”
저 눈빛과 말투.
왠지 불안하다.
마른 비는 경직된 얼굴로 물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어디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