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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45화 (245/463)

245화

사영은 비장하지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소교주님께 부탁을 받았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모양이야. 나 자신은 물론이고, 소교주님과 오왕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소중한 사람을 구한다는 그거?”

“맞아. 오왕이 제안을 했어. 자신의 일을 도와주면 그분을 구출하는 일에 힘을 빌려주겠다고. 비아, 네 말이 맞았다. 동굴에 남아 있었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 거야. 모두 네 덕분이다.”

마른 비는 몰랐지만, 지금 사영은 태어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건 마른 비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그만의 방식이기도 했다.

피 튀기는 격전으로 시작했지만, 구명지은을 입고, 새로운 길까지 제시해준 남자.

칠흑 같은 어둠뿐이던 인생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온 남자.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온 사영에게, 마른 비는 하늘이 준 선물처럼 느껴졌다.

“도와줄까?”

마른 비의 물음에 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설령 마른 비가 도울 수 있는 일일지라도 거절했을 거다.

자신이 갈 길은 걸음마다 죽음이 깃든 길이었고, 이미 큰 은혜를 입은 마당에 또다시 마른 비를 끌어들일 순 없기 때문이다.

사영은 마른 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일이 마무리되면 널 꼭 찾으마. 그땐 여유를 가지고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떤 말이든 좋아. 그냥 편하게 누워서 아무 생각 없이 떠들고 싶어. 난… 한 번도 잡담이란 걸 해본 적이 없거든.”

너무 담담해서 더욱 서글퍼지는 말이었다.

마른 비는 사영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꼭 무사히 일을 마치고 날 찾아. 그땐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자. 중원이 너무 넓어서 나를 못 찾겠으면 운남 남서쪽에 있는 청죽림으로 와. 거기서 내 이름을 대면 부족 식구들이 반갑게 맞아줄 거야.”

말하다가 아차 싶었는지 마른 비는 정정했다.

“아! 식구들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구나. 청죽림을 찾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음… 그럼… 만금당! 만금당에 가서 내 이름을 말해. 그리고 금복인이나 금귀진이라는 사람에게 부탁해. 날 찾아 달라고.”

“……만금당이면 중원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 집단이 아니냐. 거길 그런 용도로 막 사용해도 되는 거야?”

“응. 괜찮을 거야. 친구거든.”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뭐라 반박하기가 힘들다.

사영이 슬쩍 돌아보자 여규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한데 너는 여기 계속 머무르는 게 아닌가? 오왕이 널 굉장히 아끼는 눈치던데.”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 사영은 주원장에게 넌지시 부탁을 받았다.

마른 비에게 그들의 일을 도와달라는 말을 꺼내 보라고.

사영은 단칼에 거절했고, 마른 비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 결정이 잘한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른 비가 기절한 철중구를 보며 말했다.

“나도 떠날 거야. 아저씨를 도운 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중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슬슬 움직이려고.”

마른 비의 시선이 사영에게로 옮겨갔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 그땐 운남을 구경시켜 줄게.”

그건 약속이었다.

둘의 인연과 지금의 약속이 태풍을 일으키는 건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

* * *

“또 식사를 안 하신 겁니까?”

장사 외곽의 허름한 객잔.

창틈 사이로 스민 햇살이 여인의 얼굴을 비췄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는 오래도록 햇볕을 쬐지 않은 얼굴이었다.

“계속 이러시면 몸이 상합니다. 이미 기력이 쇠한 게 보이지 않습니까.”

사내가 우려를 표했지만, 여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인, 아니, 와족에선 전사라고 하던가요? 대자연의 기운을 다루는 분이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처럼 삐쩍 마르는 게 웬 말입니까. 자주 어지러우시죠? 영양분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식사를 하셔야 해요.”

“……신경 쓰지 말아요. 내 몸이니 내가 알아서 해요.”

여인은 사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스스로를 꽉 안으며 몸을 움츠릴 뿐이었다.

사내는 작게 한숨을 쉰 뒤 한걸음 다가섰다.

“힘들다는 것, 이해합니다.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래도….”

“다가오지 말아요!”

여인이 날카롭게 사내를 노려봤다.

“샤아아악―!”

여인이 소리를 지르자, 그녀의 옆에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이 독니를 드러냈다.

“분명히 말했어요. 한 발짝만 더 다가와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여인은 앙칼진 표정으로 경고했다.

사내가 난감해할 때,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단단한 체격을 지닌 노인이 걸어 들어왔다.

여인은 그를 보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파르르 떨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믿을 수 없다.

여기서 저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어디에도 기댈 곳 없던 여인은 눈물을 왈칵 쏟았다.

노인은 안쓰러운 얼굴로 다가와 여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동안 무슨 일을 겪은 게냐. 고운 얼굴이 왜 이리 야윈 게야?”

“흑… 흐흑…! 하, 할아범…!”

그 얼마나 외로운 시간이었나.

부족의 품을 떠났고, 모든 일의 발단이었던 호국영을 죽였다.

그리고 도망치듯 중원으로 나왔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뻥 뚫린 가슴이 채워지길 바랐으나 중원은, 한족의 대지는 너무나 혹독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원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쾌락을 충족시켜줄 몸뚱이일 뿐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준 이는 없었다.

저열한 욕망과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마음이 깎여 나갔고, 사람에 대한 불신은 깊어져만 갔다.

부족 식구들에게 진 죄에 대한 대가를 받는 거라고 생각하며 버텼지만, 골수에 스미는 외로움과 피부를 저미는 상실감은 버틸 도리 없는 절망이었다.

추격자들과의 혈투 끝에 쓰러졌을 때, 이대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백강이란 사내가 자신을 구했고,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지만, 한 번 치민 회의는 점점 깊어질 뿐이었다.

더 이상 어떤 것도 삶에 대한 불씨를 지필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때 기적처럼 나타난 얼굴!

겨울 달은 그믐에게 안겨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간 많이 힘들었구나.”

그믐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오열하는 겨울 달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달아, 나와 함께 돌아가는 게 어떻겠니?”

그믐은 천천히 수저를 뜨는 겨울 달에게 물었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식사를 멈추고 그믐을 바라봤다.

“이미 느꼈을 게다. 중원이 어린 시절 꿈꾸던 낭만적인 곳이 아니란 것을. 여긴 힘이 없는 자에게는 가혹한 곳이다. 이민족이면서 여인인 너에게는 특히 더 그렇겠지. 돌아가자꾸나. 시간이 걸리겠지만 식구들은 결국 널 받아들일 거다.”

겨울 달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할아범. 제가 무슨 염치로 돌아가겠어요. 이미 부족을 떠나왔는걸요. 여기 남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몸담을 곳을 찾아보겠어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 달의 모습은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잃어버렸던 생기를 찾았고, 어떤 결심을 담고 있었다.

계속 거부하던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였다.

“중원에 정착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네, 맞아요. 정말 힘들 거예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걸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할아범을 보는 순간 나아졌어요. 살아갈 힘이 솟았다고 할까요?”

겨울 달은 작게 웃었다.

그건 그녀가 정말 오랜만에 짓는 미소였다.

그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사무치던 외로움이 많이 해소된 느낌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변화였다.

‘많이 변했구나.’

그믐은 겨울 달을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달라진 환경이 변모의 계기를 만드는 걸까?

가을 수리가 그렇듯 중원으로 나온 겨울 달은 내부의 무언가가 달라져 있었다.

“설마 저를 찾으러 오신 건 아니겠고. 할아범은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겨울 달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이야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믐은 아련한 표정으로 가을 수리를 떠나보낸 때부터 최근까지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놈과 달이를 부탁하네.”

장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분주히 오가는 배들을 내려다보며 그믐이 말했다

나란히 선 백강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십시오, 어르신. 어르신 덕분에 야전단의 습격으로부터 식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드님과 동월 소저는 제가 책임지고 보살피겠습니다.”

그믐은 고개를 숙인 백강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리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하오문의 장사 분타주라고 들었네. 자네 같은 남자가 고작 그 정도 직위에 머물러 있다니. 하오문은 실력에 따라 직책이 주어진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백강은 그믐이 태어나서 본 인간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무공은 더 강한 자들이 있겠지만, 인간 자체의 그릇과 총체적인 능력을 감안하면 비견할 인물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올곧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그렇다.

하오문 총단으로 향했던 백강이 복귀하여 야전단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뒷수습을 하는 과정을 지켜본 결론이었다.

가을 수리가 그의 일을 돕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기에 궁금했는데, 과연 그럴 만한 남자였다.

그믐의 칭찬에, 백강은 웃으며 대꾸했다.

“실력 위주로 직책이 주어지는 게 맞습니다. 분타주에 머무르는 건 제 역량이 아직 그 정도인 것이겠지요.”

“지나친 겸손은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네. 하오문에 그토록 뛰어난 인재가 많다면 벌써 천하제일문이 되었겠지.”

대충 짐작은 간다.

반골(反骨).

이번 일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 남자는 그런 기질을 타고났다.

총단의 지시를 듣지 않고 주원장에게 협력한 것이 그러하며, 식구들에게 위협이 닥치자 총단의 소환명령을 무시한 채 장사로 돌아왔다.

그 결과 분타주의 직위가 해제되어 일반 문도로 강등되지 않았나.

하지만 백강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전 이제부터 따로 움직일 생각입니다.”

“……하오문을 나갈 생각인가?”

백강은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믐이 걱정이 된다는 듯 물었다.

“입문은 쉽지만 죽을 때까지 탈퇴가 불가능한 게 하오문이라고 들었네. 정보를 다루는 고위직일수록 더. 그게 가능하겠나?”

백강은 하오문 총단이 있을 어딘가를 바라봤다.

“하오문은 썩었습니다. 방대한 정보를 쥐고도 그걸로 돈을 벌 궁리만 하고 있죠. 온갖 비열한 방법으로요. 힘을 지녔다면 그 힘을 옳은 일에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것을 누릴수록 그만한 책임이 뒤따른다고 믿고요.”

백강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말했다.

“탈퇴가 불가능하다? 가능하게 만들면 됩니다. 저는 개방, 하오문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걷는 정보 단체를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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