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백강을 보는 그믐의 눈이 깊어졌다.
‘……이자가 중간에 화를 입지만 않는다면.’
천하는 새로운 정보 단체의 출현을 목도하게 되리라.
그믐은 백강이 정파의 개방과 사파의 하오문으로 대표되는 양강 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믐이 보기에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휴우… 자네 같은 남자를 따라가려면 아들놈이 무척이나 바빠지겠군.”
좋다.
이왕 인생을 걸 거라면 이런 남자에게 걸어야 한다.
다행히 가을 수리는 안목이 있었고, 달이도 이제야 인복이 트이는 모양이었다.
“지금 하오문 장사 분타에, 아니, 자네의 조직에 가장 부족한 건 무력이겠지. 오래 머물긴 힘들지만, 자네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하지.”
“아닙니다, 어르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아니야. 안 그래도 아들놈이 너무 허약해서 붙잡고 가르칠 생각이었네. 수리와 달이가 제 몸을 지킬 수준까지는 만들어놔야 안심이 되겠어.”
그믐은 호신(護身)을 이야기했지만, 그와 같은 강자가 생각하는 호신이란 단순히 몸을 지킬 수준이 아닐 터였다.
백강은 거절할 처지가 아니란 걸 깨닫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왕 하는 거 자네도 배워볼 텐가? 남의 가르침이 필요한 수준을 벗어났다는 건 아네만, 도움이 될 게야.”
백강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르침을 준다고?
대충 봐도 십좌에 필적하는 무력을 지닌 그믐이?
간청을 해서라도 배우고 싶은 건 이쪽이다.
그는 가을 수리 덕분에 이어진 인연을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훗날, 중원 무림의 판도를 뒤흔들 조직에 와족의 비기가 전해진 순간이었다.
* * *
“지금 간다고?!”
마른 비의 작별 인사에, 당영령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마른 비가 주원장의 진영에 계속 머무를 줄 알았던 모양이다.
원을 무너뜨릴 때까지 함께할 줄 알았던 그녀는 아쉬운 걸 넘어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었다.
“왜? 급한 일이 있는 거야? 이왕 합류한 거 쭉 같이하면 안 돼?”
마른 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당운석이 나섰다.
“이유가 있겠지. 웃으면서 보내주자, 영령아. 언젠가 다시 만날 거잖아.”
“그래도 이대로 헤어지기엔….”
우물쭈물 하던 그녀는 마른 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꼭 다시 만나는 거다? 알았지? 꼭이야?”
마른 비는 안타까워하는 그녀에게 활짝 웃어 주었다.
“그럼, 당연하지. 그때까지 항상 건강해, 영령아.”
마른 비의 옆에는 겨우 몸을 추스른 철중구와 여규가 함께하고 있었다.
여규의 동행은 당연한 것이지만, 철중구가 따라붙은 건 의외였다.
평소 장사로 돌아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기 때문이다.
그가 동행을 결정한 건 주원장의 정보망을 통해 장사의 상황을 전해들은 후였다.
“야전단이 전멸했단다. 하오문과 충돌한 결과라는데,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고……. 제3의 세력이나 엄청난 고수가 개입한 게 아닌가 싶다. 장사 곳곳이 피로 물들었다더군.”
“그럼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지인들은 무사해?”
“다행히도. 그 난리통에도 동생들은 모두 무사한 모양이야. 장귀삼, 그놈이 내 식구들까지 챙겼다더라. 게다가 상인들을 안정시키고 길거리를 수습한 것 같아. 내가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다더군.”
“장귀삼? 아, 그 수적이었다는…….”
장강수로채를 나와, 장사의 뒷골목을 접수하기 위해 철중구에게 도전했던 남자.
상당한 실력을 갖췄지만 철중구에게 패했던 그가 장사에 정착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철중구가 떠나 있는 동안 그의 식구들을 챙기고 장사의 거리를 안정시킨 듯했다.
“카하하! 나한테 뚜까 맞고 정신이 번쩍 든 거지! ‘아, 나도 이 사람처럼 멋진 남자가 되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겠어?”
마른 비에게 얻어맞고 기절까지 했음에도 철중구는 여전했다.
패배를 경험하고도 전혀 기죽지 않는다.
이쯤 되니 여규도 철중구의 기질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해. 잘도 제 입으로 그런 소릴 늘어놓네. 다른 건 몰라도 얼굴 두껍기로는 네가 천하제일일 거야.”
여규는 픽 웃으며 말했고,
“뻔뻔이라니! 사실을 말하는 게 왜 뻔뻔이냐! 이건 당당한 거라고!”
철중구는 가슴을 탕탕 쳤다.
“그런고로 나는 여행을 계속해도 될 것 같다 이 말씀이지. 동생들도 무사하고, 각자의 밥그릇이 명확히 정해져 있는 동네라 식구들이 굶는 일은 없을 거다. 서신도 보내놨고 말이야. 앞으론 장귀삼 그놈이 대빵 하라고 하지 뭐!”
“너 솔직히 말해. 비아랑 더 돌아다니고 싶은 거지?”
철중구는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내심을 들킨 게 분명했다.
“뭐… 그것보다는… 평생 장사에서만 살았는데 나오니까 좋더라고. 이왕 나온 거 견문도 넓히고 강해져서 돌아가면 좋잖아? 이놈이랑 다니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니까 말야.”
“솔직하지 못하긴. 왜 말을 못 해? ‘비아야, 너랑 좀 더 여행하고 싶다! 네가 좋다!’ 쯧쯧, 말로만 쾌남이지 영 남자답지 못하구만.”
“너, 너는 뭐 다르냐! 운남에서부터 쫄쫄 따라다니고 있으면서!”
“응. 난 비아랑 다니는 게 좋아. 그런 게 아니면 넌 그냥 혼자 다니던가?”
여규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이다.
철중구는 움찔하더니 멍한 눈으로 더듬댔다.
“어… 나, 나도 비아랑 다니는 게 좋….”
“됐어. 거기까지. 징그럽게 고백할 필요는 없잖아? 그거면 충분해. 잘했어, 중구.”
그제야 농락당했다는 걸 깨달은 철중구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상하게 이 녀석들과 있으면 항상 놀아나고 만다.
희한한 건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둘의 대화를 듣던 마른 비는 배꼽을 잡고 킥킥댔다.
별비는 철중구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유쾌한 정경이었다.
주원장의 호위 임무를 맡고, 큰 사건을 겪으며 그들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살피는 자가 있었다.
‘건우라는 녀석의 힘은 가늠이 된다. 문제는 한 몸처럼 움직이는 백호…. 저 짐승의 힘까지 파악해 놔야 하는데….’
지금은 세가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지만, 언제 적으로 돌아설지 모른다.
강호 무림의 세력 관계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고, 당건휘는 마른 비를 처음 본 순간부터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기회가 있을 때, 마른 비의 전력을 속속들이 파악해 놓는 게 현명한 일일 터였다.
‘단순한 탐색을 넘어서… 가능하다면 전력을 깎아놓는 게 좋겠지. 세가의 식구가 아닌 이상 결국은 타인이고 잠재적인 적일 뿐.’
알고자 하는 대상이 인간이라면 섣불리 손을 쓰기가 곤란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짐승이었고, 마침 성의 경계 하나만 넘으면 중원에서 짐승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집단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굉장히 입이 무거운 자들이었다.
“여봐라.”
당건휘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하에게 지시했다.
“저들이 응천부를 벗어나면 은밀히 하남(河南)으로 떠나라. 그리고 내 서신을 천중산(天中山)에 전하도록.”
“천중산이라 하오시면….”
당건휘의 눈은 멀어지는 별비의 등에 고정돼 있었다.
“수천. 수천의 총단에 의뢰를 넣을 것이다.”
‘가만두지 않는다고? 눈에 띄지 마? 감히 내게 그따위 소릴 늘어놓다니…!’
마른 비 일행을 살피는 건 당건휘만이 아니었다.
성벽 위에 솟은 망루, 그늘에 몸을 숨긴 남자가 마른 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두르면 안 돼. 지금껏 마주친 놈들과는 달라. 쉽게 먹어치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완벽한 기회가 올 때까지 천천히 공을 들여서…!’
표금산은 흰자위에 핏발이 서도록 마른 비를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어느 순간, 그는 붉은 입술을 혀로 적시며 부르르 떨었다.
‘보면 볼수록 최고의 사냥감이야…! 아아, 저놈이 살려달라며 애걸하는 걸 보면 얼마나 짜릿할까!’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전보다 더욱 짙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마른 비가 멀어지는 순간까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어차피 전쟁에서 내가 할 일은 없다. 잠시 궁을 떠난다는 허락을 받아야겠어.’
표금산은 핑계 삼을 만한 걸 떠올리며 주원장의 처소로 향했다.
당건휘와 표금산만이 아니었다.
응천부 성벽 위에는 무인들이 군데군데 뭉쳐 있었는데, 그들도 마른 비 일행을 주시하고 있었다.
적대적인 감정을 지닌 둘과 달리 그들의 시선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했다.
“신성이 출현했군.”
“굉장한 사내입니다. 중원의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체술……. 정형화된 투로 없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움직이는 것 같더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게 많았습니다.”
“싸우는 방식에 있어선 네 말이 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기술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어. 무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어디서 저런 자를 키워낸 거지?”
“정보망을 가동하도록 서신을 띄웠습니다. 곧 무언가 잡히는 게 있겠지요. 사파나 마교만 아니길 바랍니다. 가능하다면 가깝게 지내고 싶군요.”
칭찬과 우호적인 시선.
한쪽에선 또 다른 의견이 오갔다.
“무서운 놈이 나타났군. 저 야만인 하나만 놓고 봐도 엄청난데 점창의 제자라는 놈과 사호까지……. 어쩌다가 저런 어처구니없는 조합이 탄생한 거지?”
“짐승도 전력에 넣어야 한다. 미물이 날뛰어봤자 별게 있을까 싶었는데… 소문이 사실이었어. 눈이 마주치는 순간 소름이 돋더군. 말로만 듣던 영수가 틀림없다.”
“현재의 구도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설마 새로운 세력이 출현하는 건 아니겠지? 주원장이 원을 밀어내면 숨죽이고 있던 놈들도 고개를 들 거다. …난세가 도래할거야.”
견제와 탐색.
앞으로 재편될 세력 구도에 대한 염려까지.
또 다른 곳엔 마른 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그게 말이 되느냐? 저런 놈이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처음 목격된 건 호남으로 추정됩니다. 동구의 지부대인이 어느 날 갑자기 폐인이 돼버렸는데,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겁에 질려서 나오질 않는다더군요.”
“그게 저 야만인과 관련이 있는 건가?”
“아마도… 아니, 확실합니다. 지부대인이 실성한 것처럼 중얼대는 말 중의 하나가 ‘하얀 짐승’이라고 합니다. 동구의 시장거리를 탐문해보니 백호에 대한 목격담이 나왔다더군요.”
“백호…! 그럼 확실하군. 저자 말고 저런 걸 데리고 다니는 존재가 또 있을 리 없으니. 한데 왜 정보가 없다는 건가?”
“그 이전의 행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저런 영수를 데리고 다닌다면 난리가 났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동구에 나타났습니다. 그다음 목격된 곳이 야투고요. 그 외에 백호에 대한 목격담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보고를 듣던 사내는 생각에 잠겼고, 곧 지시를 내렸다.
“짐승을 떼어놓고 다녔을 수도 있다. 저토록 눈에 띄는 외모를 사람들이 기억 못 할 리 없지. 사람을 풀어서 호남 일대를 탐문하라.”
마른 비 일행을 뜯어보던 사내는 무언가를 깨닫고 지시를 수정했다.
“잠깐…. 일행 중에 한 명이 점창의 제자라고 했었지? 게다가 저 외모는… 소수부족! 남방의 소수부족 중에 하나가 틀림없다! 사천과 귀주, 운남 일대를 역으로 더듬어라! 그쪽 어딘가에 저자를 배출한 세력이 있을 것이야!”
대번에 화제의 중심에 선 마른 비였다.
하지만 무림인들이 들썩이거나 말거나, 그는 일행과 함께 태평하게 걷고 있었다.
“이상하게 뒤통수가 따가운데? 저 새끼들, 모여서 우리 욕하는 거 아니야?”
철중구가 뒤를 돌아보며 중얼댔고,
“너 때문이잖아. 가뜩이나 비아가 주목받고 있는데 공개 비무까지 해버렸으니. 내버려 둬. 저러다 말겠지, 뭐. 그나저나 비아야,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여규는 마른 비에게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잠시 아련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마른 비가 말했다.
“성년식이 시작되고 나서 만난 할아버지가 있어.”
“성년식? 그럼 대리에서 날 만나기 전인가?”
“응. 맞아. 규, 너를 만나기 얼마 전이야.”
“그럼 밀림이었을 텐데, 거기서 사람을 만났다고?”
“응.”
마른 비는 수년 전 맺었던 인연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가 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 거길 가야겠어. 규야, 혹시 백원 의원이 어디 있는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