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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47화 (247/463)

247화

백원 의원

걸음을 옮기던 여규는 의외라는 얼굴로 멈춰 섰다.

마른 비가 백원 의원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듣자, 여규는 마른 비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군지 퍼뜩 깨달았다.

“괴의! 화통달 어르신을 만나려는 거구나!”

그러고 보니 마른 비가 성년식에서 그와 인연이 닿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에게 야생초를 얻어서 무공 증진에 큰 도움이 됐다는 것도.

만나려는 사람이 화통달이라면, 여규로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칠대 기인의 명성은 중원 초출인 여규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분은 어때? 고증자 어르신만큼이나 특이해?”

여규는 화통달이 금복인처럼 재미있는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목소리가 끼어든 건 그때였다.

“방금 뭐라고 한 거냐? 괴의? 중원 칠대 기인의 그 괴의를 만나러 간다고?”

철중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십좌만큼이나 만나기 힘든 게 칠대 기인이었고, 평범한 무림인이라면 평생 가도 그들 중 한 명을 만날까 말까 한 게 보통이다.

주원장의 진영에 온 것만으로도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이번엔 괴의를 만나러 간다고?

심지어 마른 비는 그를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뭐? 고증자?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땅이나 파고 돌아다닌다는 괴짜 말이냐? 너희, 그 인간을 만났어?”

“응. 운남을 나와서 당가 다음으로 방문한 게 만금당이었어.”

여규의 답변에 철중구는 아연한 표정으로 마른 비를 바라봤다.

“너 이 새끼… 정체가 뭐야?”

운남 촌구석에서 살다왔다는 놈이 무슨 놈의 인맥이 이리도 화려하단 말이냐.

호남의 중심인 장사에서 살았던 자신은 그동안 무얼 한 걸까.

잠시 멍해졌던 철중구는 정신을 차리고 괴의에 대해 물었다.

“괴의는 어떤 사람이냐?”

“음……. 욕을 엄청 잘해. 중구 너와 욕으로 비무를 해도 될 수준이야.”

화통달에 대한 마른 비의 감상평은 그게 전부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규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정말 대단한 분이야.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기로 유명하지. 그분의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백원 의원의 의생들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 출신이나 세력, 돈, 지위…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환자라면 일단 살리고 보는 활인(活人)의 표상이지.”

“허어… 협객서에나 나올 법한 그런 인간들이 정말로 있다고?”

여규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활인의 신념도 그렇지만, 그분이 더욱 유명해진 건 전의(戰醫)라는 개념을 창안했기 때문이야.”

“전의?”

“그래. 전의. 원래 전장에서 의원들은 안전한 후방에 대기하는 게 정석이었거든. 하지만 백원 의원의 의생들은 전장 한가운데 뛰어들어서 응급 처치를 행해.”

“의원들이 전장에 뛰어든다고? 그랬다가 몰살하는 거 아니냐?”

여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가능한 건 백원 의원의 의생들이 모두 무공에 능하기 때문이야. 그들은 부상당한 아군을 치료하는 동시에 위태로운 전장에 참전하여 전투까지 수행하지. 그들 덕에 병사들의 생존율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어. 관과 무림 가릴 것 없이 괴의의 이름이 칭송받는 이유야.”

“……괴의라길래 그냥 괴팍한 늙은이인 줄 알았는데…. 대단하구만.”

철중구는 혀를 차며 놀라워했고, 그건 마른 비도 마찬가지였다.

“응.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분이야. 화타의 재림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의술에, 무공 실력까지 탁월해. 본분이 의원이다 보니 무인들만큼 실전에 능하진 않겠지만, 화가 비전의 기공은 무림 일절로 인정받을 정도야. 기공의 이름이 아마… 백원약수공이었던가?”

백원약수공.

마른 비는 오랜만에 살수들을 일거에 쓸어버렸던 화통달의 비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육신을 부딪치며 싸우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에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새하얀 광구에서 뻗어나간 기의 폭풍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화통달의 백원약수공은 너른 하늘의 서리불꽃과 더불어 뢰창을 만드는 데 영감을 준 기예였다.

그걸 보지 못했다면 뢰창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고, 검치호와의 일전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마른 비는 화통달에 대해 들을수록 점점 그가 보고 싶어졌다.

“근데 말이다. 내가 나쁜 놈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의문이 드네. 악인을 살려 놓으면 그들이 고맙습니다~ 하고 그냥 갈까? 몸이 낫고 나서 행패를 부리지 않으면 다행일 거 같은데?”

철중구의 의문은 지당했다.

여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맞아. 그런 경우도 많았대. 돈을 요구하거나 여자 의생들을 겁간하려 한다거나, 부상당한 화풀이로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거나. 하지만 나중엔 그런 것도 거의 사라졌어. 왜인 줄 알아?”

철중구는 눈으로 재촉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고.

“단호하게 손을 썼기 때문이야. 몸이 나았으니 더 이상 환자가 아니잖아? 그런 짓을 저지르는 놈들은 의원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혹하게 응징했대. 힘이 달릴 경우엔 우호적인 세력의 도움까지 받아서 말이야.”

“크으~ 멋지구만!”

철중구는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이었다.

“환자라면 일단 살리고 본다. 하지만 낫고 나서 깝죽대면 죽인다? 아주 명쾌한 원칙이야!”

철중구는 주먹을 허공에 대고 붕붕 흔들며 흥분했다.

“남자다! 그건 남자의 길이야! 나, 오늘부터 괴의 형님을 존경하기로 했다!”

여규와 철중구는 화통달과 만날 순간을 기대하며 들떠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4년 전, 살막 살수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통달이 목숨을 붙여준 자가 그를 죽이라고 청부했다는 이야기.

“잊고 있었는데, 이제야 떠올랐어. 할아버지가 운남에서 잘 나왔을까? 가장 가까운 백원 의원이 어디야? 서두르자.”

화통달의 안위가 궁금해진 마른 비는 일행을 재촉했다.

백원 의원을 찾는 건 쉬웠다.

괴의의 제자들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환자들을 돕기 위해 중원 각지에 퍼져 있었고, 지금 중원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곳은 이곳 강남 일대였기 때문이다.

주원장을 포함한 한족의 군웅들이 강남의 패권을 쥐기 위해 다퉜고,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원 황실은 틈만 나면 병력을 파견해왔다.

죽어나가는 숫자에 비해 살릴 손길은 부족하니, 괴의의 제자들은 상당수가 장강을 넘어 강남에 내려와 있었다.

여규도 백원 의원의 위치까지 알지는 못했지만, 워낙 명성이 자자한 곳이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양주(揚州)를 넘어 고우(高郵)에 이르자, 강소성 일대를 관할하는 백원 의원의 지부에 당도할 수 있었다.

“유명한 곳이라면서?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철중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백원 의원은 도시가 아닌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제대로 된 건물도 없이 수십 개의 대형 천막을 쳐서 환자들을 받고 있었다.

천막은 튼튼하고 깨끗했지만, 호화롭기까지 했던 주원장 진영의 의원에 비하면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백원 의원을 상징하는 깃발이 아니었다면 여기가 맞냐고 되물었을 거다.

철중구의 의문에 대한 답은 여규가 주었다.

“원래 이렇대. 백원 의원의 본산인 화가(華家)를 제외하면 지부들은 전부 이런 식으로 운영 돼. 환자가 있는 곳을 직접 찾아다니기 때문에 천막을 쓰는 거고, 산자락에 위치한 건 신선한 약초를 캐기 위해서일 거야. 그들은 의원인 동시에 뛰어난 약초꾼이거든.”

또한 많은 환자를 받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백원 의원이 개원했다고 하면 일대의 환자들이 물밀 듯이 몰려드는데, 시가지에서는 아무래도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백원 의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환자들에 초점을 맞추어 운영되고 있었다.

“마른 비요?”

마른 비는 의생 중 한 명에게 이름을 밝히고 화통달에 대해 물었다.

천하 각지를 싸돌아다니는 그를 당장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그가 무사한지를 묻고,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면 찾아가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의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음하기가 어렵군요. 일단 저는 그 이름에 대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의생은 마른 비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전장에 투입이 가능한 의원 집단.

강호의 문파들에게 백원 의원의 의생들은 군침이 도는 존재였고, 그들을 포섭하기 위한 갖은 시도가 행해졌다.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이족의 사내가 스승을 찾자 그의 경계심이 발동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뭐야? 괴의 형님을 안다는 건 뻥이었냐?”

드문 일이다.

마른 비의 곤란해 하는 얼굴을 보는 건.

철중구가 낄낄대며 즐거워할 때, 마른 비는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한족식 이름을 댔다.

의생은 건우란 이름을 듣자마자 낯빛이 바뀌었다.

“소협이 건우란 분이시라고요? 자,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화들짝 놀란 그는 양해를 구하고 어딘가로 뛰어갔다.

그리고 곧 멀끔하면서도 강직한 인상의 사내를 동반한 채 달려왔다.

“백원 의원의 원주를 맡고 있는 화인걸입니다. 소협의 성함이 건우가 맞습니까?”

‘화인걸…!’

여규는 놀란 표정이 됐다.

마른 비나 철중구는 몰랐지만, 그건 현재 백원 의원을 대표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일선을 떠나 약초를 캐고 새로운 약을 연구하는 화통달 대신 백원 의원을 이끄는 남자였으며, 화통달의 모든 걸 물려받은 아들이기도 했다.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화인걸은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할 이야기가 많겠군요. 이쪽으로…. 장진. 잠시 환자들을 부탁하네.”

“네, 원주님.”

중앙에 위치한 천막이 화인걸의 거처였다.

화인걸은 필요한 물품만 정갈하게 비치된 그곳으로 일행을 안내했고, 따뜻한 차를 내왔다.

그리고 마음이 급한지 대뜸 본론을 꺼냈다.

“격식을 지키지 못함을 용서하시길. 가주님, 아니, 아버님의 소식이 끊긴 지가 삼 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서찰에는 소협의 이름과 함께 정체 모를 살수들의 흉계로부터 구명지은을 입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요.”

화인걸은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차를 들이켰으나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살수들의 의뢰는 보통 기한이 있는 걸로 압니다. 아버님께선 살수들을 피하고 약초를 구할 겸 운남에 더 머무를 작정이라 하셨습니다. 저희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요. 그리고 당부하셨습니다. 언제든 소협이 찾아오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요.”

화인걸은 정중히 읍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아버님의 소식을 들은 바가 없으십니까? 운남으로 사람을 보내봤지만 끝도 없이 펼친 밀림에서 아버님을 찾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한 번 출타하시면 수년씩 자리를 비우는 건 예사지만, 이번엔 마음이 너무도 불안하여….”

화인걸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마른 비는 감정을 삼키는 그를 위로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도 그 이후론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어. 하지만 괜찮을 거야. 장담하는데, 할아버지가 작심하고 숨었다면 살수들은 찾지 못해. 운남이 고향인 내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돼.”

좀 더 구체적인 위안을 준 건 여규였다.

“제 사문이 마침 운남입니다. 서신을 띄워 어르신의 행적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점창은 운남의 지리에 밝은 편이니 분명 성과가 있을 거예요.”

“점창파의 제자십니까?! 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철중구도 질세라 한마디했다.

“나는 운남을 하나도 모르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만, 괴의 형님께선 무사하실 것 같아. 그냥 느낌이 그래. 그러니 힘내라고.”

“…….”

정적이 흐르자 철중구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왜 또? 뭐가 문젠데?”

그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나았다.

마른 비와 여규는 한숨을 쉬고 화인걸을 위로한 뒤 밖으로 나왔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원주님이 일을 마치셔야겠지. 그때까지 서신을 작성할게.”

아직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고, 여규가 서신을 작성할 동안 마른 비는 철중구를 데리고 일손을 도울 작정이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상상도 못 한 인물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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