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
대단히 인상적인 사내였다.
허름한 마의를 걸쳤고, 수염이 제멋대로 자라 있지만,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내다운 얼굴과 선명한 이목구비.
강인하면서도 강직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올곧은 눈빛에서 신의와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자의 대쪽 같은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힘…!’
마른 비는 진심으로 놀랐다.
사내의 내부에 웅크린 막대한 기운.
정제를 거쳐서 순도 높게 응축된 그것은 대자연의 기운에 한없이 가까웠다.
정확히 가늠하긴 어렵지만, 사내의 힘은 거의 아버지에 필적할 정도였다.
여규와 철중구도 그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깨닫고 긴장하기 시작했다.
스윽―
환자들에게 식사를 날라주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저 쳐다봤을 뿐인데, 마른 비 일행은 자신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느낌을 받았다.
“대단한 청년들이로군.”
일행을 훑어본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줄줄이 이어진 천막의 외부로 눈길을 옮겼다.
“저건 인간이 아니군. 짐승……. 맑은 기운으로 보아 영수인가.”
소란을 염려해 의원 바깥에 대기 중인 별비의 존재까지 알아챘다.
별비의 은신을 대번에 간파하는 기감.
일행은 사내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이렇게 투명한 기운이라니…!”
마른 비는 자연기가 전해준 감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맑은 걸 넘어 투명하다.
그리고 거대하다.
아버지가 하늘이라면, 이 남자는 끝없이 펼친 산악과 같다.
청정하고도 웅대한 산맥이 눈앞에 솟아난 느낌이었다.
“이름이 뭔가?”
사내는 물었고, 마른 비는 홀린 듯이 답했다.
“마른 비. 마른 비라고 해.”
“이족의 청년인가? 과연 천하는 넓구나. 그 나이에 그런 경지라니…….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지만 않는다면 십 년 안에 나를 능가할 수도 있겠어.”
“아저씨는?”
마른 비가 그렇듯 중년의 사내도 마른 비에게 호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악경. 내 이름이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마른 비와 달리 여규와 철중구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뭐, 뭐라고?!”
“악경?!”
칼을 쥐고 살아가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정도맹의 맹주 천검, 사도련의 련주 패군과 함께 십좌의 수위를 다투는 남자.
셋 중에서도 천하제일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가받는 무인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혀, 협검…!”
중원에서 가장 유명하지만, 어떤 세력에도 몸담지 않은 채 독보천하 하는 사내.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신으로 원 황실에 저항해 온 남자다.
핍박받는 한의 백성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는 정사마를 불문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만든 존재였다.
협의 대명사나 다름없는 남자와의 만남은 일행에게, 특히 여규에게 엄청난 흥분을 안겨 주었다.
“점창파 이대 제자 여규가 악 대협을 뵙습니다!”
여규는 온 마음을 담아 정중한 포권을 올렸다.
여휘조차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대는 이름이 악경이다.
여규에게 있어 악경은 가장 만나보고 싶은 무인이자 살아 있는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시벌, 놀라서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네. 난데없이 협검이라니……. 난 철중구요. 아니… 처, 철중구입니다.”
스스로 말해 놓고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바로 말을 높이는 걸 보면.
철중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패군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게 협검이다.
그리고 철중구는 사파이면서도 협과 의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게 사내다운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중시하는 사람 사이의 도리를 넘어, 천하를 아우르는 거대한 협의.
철중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상당히 공손한 태도로 악경을 대하고 있었다.
“반갑네. 하나같이 대단한 청년들이로군. 그새 강호의 후배들이 이토록 진일보 한 건가?”
최상의 극찬이나 다름없었다.
여규와 철중구가 헤벌쭉한 얼굴로 쑥스러워하는 사이, 마른 비가 물었다.
“아저씨, 유명한 사람인가 보네?”
철중구는 뭐 이런 무식한 놈이 다 있냐는 얼굴로 마른 비를 타박했다.
악경은 그런 둘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런 거 아닐세. 그냥 멋대로 살아온 고집 센 사람일 뿐이야. 최근에 짐승을 부리는 신성이 출현했다던데, 그게 자네인가 보군.”
협검도 마른 비의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그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정도로 근래 마른 비의 명성은 강남 일대를 뒤흔들고 있었다.
악경의 눈길이 여규를 향했다.
“풍기는 느낌과 기세의 날카로움, 서 있는 자세…….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았군. 자네, 고검과 무슨 관계인가?”
“아, 아버님 되십니다!”
이토록 바짝 얼어 있는 여규는 처음 본다.
꼭 한 번 만나기를 염원했던 우상 앞에서, 여규는 좀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고검이라니? 십좌의 그 고검 말이야? 여규 너, 고검의 아들이었어?!”
철중구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때, 악경이 물었다.
“자네의 내공도 느껴본 적 있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서 거칠지만, 패군의 적사자기와 매우 흡사하군. 그에게 배운 건가?”
“그렇소… 습니다.”
철중구가 익숙하지 않은 존대에 버벅대자 악경은 웃었다.
“편히 말하게. 패군과 비슷한 기질을 지닌 남자에게 존대를 들으려니 내가 더 어색하군.”
패군과 비슷한 남자.
철중구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기분 좋은 말이었다.
입꼬리가 광대까지 치솟은 그의 입에서 존대가 술술 흘러 나왔다.
“크헤헤! 그런 말을 가끔 듣긴 합니다만, 대협과 같은 분께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역시 그분과 천하제일을 다투는 분답게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악 대협!”
곧 형님으로 모실 기세였다.
여규와 철중구의 내력을 한눈에 꿰뚫어 본 악경이 이번엔 마른 비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네의 내공은… 처음 보는 것이야. 아니, 그걸 내공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군. 마치 대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체내로 받아들인 것 같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슬쩍 보는 것만으로 자연기의 본질을 파악한다.
중원에 나와서 마주친 누구도 이런 게 가능한 자는 없었다.
명성에 걸맞은 놀라운 안목이었다.
“와… 놀랐어! 아저씨, 진짜 대단하네! 이건 자연기라고 해. 우리 부족 특유의 운기법으로 쌓은 거야.”
“자연기라……. 더없이 어울리는 명칭이로군. 그런 게 가능하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네. 안계를 넓힌 기분이야.”
신기한 눈으로 마른 비를 바라보던 악경은 곧 일행 모두를 눈에 담았다.
“특이한 조합이군. 자네 셋과 저 영수가 함께 다닌다면 웬만해선 적수가 없겠어. 백원 의원에 악의를 품은 것 같진 않은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전과 다를 바 없는 어조였다.
악경의 분위기는 부드러웠고,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마른 비 일행은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악경의 말은 백원 의원에 악의를 품은 자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들이 나쁜 의도로 여기에 온 거였다면?
뒤는 상상하기도 싫다.
이전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다 낫지도 않았지만, 몸이 완전했더라도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새로운 경지에 발 들인 마른 비도 마찬가지였다.
전투화장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비마를 쓰러뜨릴 정도로 강해진 그다.
허나 천하 최강을 논하는 무인 앞에 서자 성년식을 떠나던 시절의 어린아이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꿀꺽 침을 삼킨 마른 비가 백원 의원을 찾은 이유에 대해 말하려 할 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식사가 왜 안 오나 했더니…! 악 대협! 거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하얀 피부에 갸름한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여인이었다.
백원 의원을 상징하는 흰옷을 입고, 머리를 올려서 묶은 여인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악경을 쏘아 붙였다.
“환자들 다 굶길 작정이에요? 환자들에게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말씀 드렸을 텐데? 도와주시기로 했으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죠!”
“이런… 미안하구나, 수연아. 범상치 않은 청년들이 보이길래….”
“그 사람들, 할아버지 안부를 물으러 온 거예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이제 식사를 마저 날라주시겠어요, 대협?”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인을 거침없이 부려 먹는다.
주변의 의생들까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걸 보면 저 여인이 환자 관리를 담당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화수연이라는 것과 화통달의 손녀라는 것도.
“자네들, 화가의 가주님을 찾아온 거였군. 혹시나 해서 물은 것이니 기분 나빠하진 말게나. 백원 의원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서….”
“아이씨! 말 그만하고 빨리 안 움직일래요?! 탕약을 먹여야 하는데 식사 때문에 늦어지고 있잖아!”
“그, 그래. 미안하다, 수연아. 서두르마!”
혼이 나고 다급해진 십좌의 일인이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뭔 상황이다냐?”
“글쎄… 악 대협께서 환자들 수발을 들고 있는 모양인데?”
“천하제일을 다툰다는 십좌의 일인이? 구파일방과 정도맹의 영입 제의도 차버린 남자가?”
철중구와 여규가 멍한 얼굴로 악경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왜? 칼질하는 무인은 사람 살리는 거 도우면 안 돼?”
어느새 다가온 화수연이 물었다.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악 대협 같은 분이 식사를 나르다가 혼나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해서….”
“사람 살리는 현장에서 무림에서의 명성이 무슨 상관이야? 적기에 영양을 보충하고 탕약을 마셔야 몸이 낫는데, 제일 중요한 식사가 늦어지면 어떡해? 농땡이를 피우면 대협이건 무림 맹주건 한소리 들어야지.”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다만 혼이 난 자가 무인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라서 괴리감이 클 뿐.
악경을 만난 이후로 얼이 빠져 있던 여규가 정신을 수습하고 물었다.
“소저. 저는 점창의 제자 여규라 합니다. 괴의 어르신의 손녀이신 것 같은데, 여쭙고 싶은 게….”
“원래 그렇게 딱딱해?”
“……네?”
화수연은 아미를 곱게 찌푸리며 말했다.
“소저는 얼어 죽을? 여쭙긴 뭘 여쭤? 나이도 비슷한 거 같은데 쓸데없이 격식 차리지 말자고. 서로 피곤하잖아. 예의랑 격식 따지면서 말 늘일 시간 없어. 편하게 말해. 뭐가 궁금한데?”
“크으~ 아주 좋아! 화끈하구만!”
철중구가 과장되게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말했다.
“이봐, 여자. 이놈이 뭘 묻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어디에도 몸담지 않고 외로운 호랑이처럼 살아가기로 유명한 악 대협이 왜 여기서 환자들 수발을 들고 있는 거지?”
화수연은 철중구의 말투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게 궁금했던 거니, 남자야? 무림에서의 평이 어떻든 악 대협은 본원과 오랫동안 긴밀한 관계였어. 대협께선 민초들을 돕는 우리의 일이 숭고하다고 생각하신대. 기회가 될 때마다 가까운 지부를 찾아서 저렇게 일을 도와주셔. 본원을 위협하는 악인들을 대신 처단해주신 적도 많고.”
“아…!”
가만히 듣고 있던 여규가 탄성을 흘렸다.
들은 적이 있는 것이다.
부상을 치료해준 의생에게 돼먹지 못한 짓을 한 놈들이 악경에게 목이 날아갔다고.
그때는 그저 협행의 일부로만 받아들였는데 그게 백원 의원과 연관된 일이었다니!
화수연은 감탄하는 여규를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 고마운 분이야. 무림에서는 거의 영웅처럼 떠받들어진다며? 민초들에게도 마찬가지고. 그런 분이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저렇게 궂은일을 도와주셔. 대협 덕분에 악인으로부터 목숨을 구한 본원의 의생들이 꽤 많아. 우리에겐 든든한 후원자 같은 분이지.”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한 남자다.
명성을 떨치는 무림인 중 저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른 비는 진심으로 감탄했고, 그건 여규나 철중구도 다를 바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악경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화수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은데?”
마른 비의 물음에 화수연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냥…. 대협께서 요즘 부쩍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게 떠올라서.”
“이상한 모습?”
“응. 가끔 아련한 눈으로 인생을 정리하는 사람 같은 말씀을 하셔. 나한테 ‘네 잔소리가 그리울 것 같구나.’라고도 하고, 본원을 도울 사람들을 물색하기도 하고.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날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