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협검을 처음 본 마른 비로서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심각한 얼굴이 됐던 화수연은 어느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내가 왜 처음 본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당신 좀 이상해. 원래부터 알던 사람 같고, 막 친근하게 느껴지고…. 말이 술술 나오네. 당신, 나한테 사술 같은 거 쓴 건 아니지?
“하하! 사술이라니! 아니야, 그런 거.”
“흐음… 이상한데?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래 봬도 내가 기공에 능한 편이거든? 이상한 짓 하면 날려버린다?”
화수연이 가슴 앞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어디선가 보았던 자세.
4년 전, 화통달이 살수들을 쓸어버렸던 백원약수공의 기수식이었다.
마른 비는 그 동작을 보며 그녀가 화통달의 손녀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못 했네. 난 마른 비야. 할아버지의 소식이 끊겨서 걱정이 많지? 별일 없을 거야. 언젠가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 마음 편히 가져.”
환자를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가 일행에게 다가온 이유.
바로 화통달의 소식을 듣고 싶어서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유쾌하게 말을 건넸지만,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다.
마른 비의 말을 들은 화수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갑자기 위로를 하고 난리야. 당신,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마른 비… 그거 건우라는 뜻이지? 나 당신 알아. 할아버지를 구해준 사람이잖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그녀가 마른 비에게 다가온 또 하나의 이유였다.
화수연은 공손하게 손을 모으더니 허리를 굽혔다.
“고마워요. 할아버지를 구해줘서. 당신은 화가와 백원 의원의 은인이나 다름없어요. 모두를 대표해서 인사드릴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좋게 말하면 시원시원하고, 나쁘게 보면 왈가닥 같던 화수연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순간, 진심을 담아 마른 비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뭐여? 반말했다가, 존댓말 했다가… 뭐 이리 왔다 갔다 해? 여자야, 너 좀 이상한데?”
철중구가 피식 웃으며 농을 건넸고,
“너보다 이상할까. 처음 볼 때부터 알았어. 남자야, 너 제정신 아니란 소리 많이 듣지? 관상이 그래.”
화수연은 여유 있게 받아쳤다.
스물도 안 된 나이에 의원에서 가장 중요한 환자 관리를 맡은 점부터, 범상치 않은 내공의 흔적과 시원시원한 성격까지.
화수연은 여러 모로 눈에 띄는 여인이었다.
여규는 그녀의 말투를 들으면 들을수록 여자 철중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끄응. 이런 인물은 중구 하나로도 족한데…….”
“뭐? 지금 그거 무슨 말이야?”
“아, 아냐.”
여규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고는 물었다.
“나도 말 편하게 한다? 그나저나 아까 그 이야기 계속 해봐. 악 대협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신다는 거.”
여규의 질문을 받은 화수연은 언제 희희덕댔냐는 듯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마른 비 일행을 한 명 한 명 탐색하듯 살폈다.
묘한 긴장감에 철중구가 한마디 하려는 찰나, 화수연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셋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엉거주춤 그녀를 따라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화수연이 일행을 데려간 곳은 사람들의 이목이 닿지 않을 만큼 깊숙한 곳에 위치한 천막이었다.
“앉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작은 탁자에 둘러앉은 일행은 화수연의 입을 바라봤다.
“음…….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너희, 악 대협에게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려 있는 건 알아?”
마른 비와 철중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여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있나. 중원 전체에서 가장 많은 현상금이 붙은 게 악 대협이잖아. 천문학적인 금액을 대협의 목에 건 건 원 황실이고. 돈 욕심 때문에 대협을 노리는 현상금 사냥꾼들이 있다는 것도 알아.”
한족이면서도 돈 때문에 민족의 영웅을 죽이려는 자들.
여규는 생각만 해도 화가 치미는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쓰레기 같은 놈들이 정말 많지. 여기는 원 황실의 힘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라 편히 계시지만, 장강 이북에서 대협은 한데 머무르지 않고 계속 이동하셔. 본원에 해가 될까 봐 웬만하면 지부에도 들르지 않으시고.”
화수연은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현상금과 추적자. 대협이 특정 사람이나 조직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이유야. 믿을 만한 사람도 드물지만, 가까운 사이라는 게 알려졌을 경우 가깝게 지낸 이들에게 상상도 못 할 피해가 갈 테니까.”
이야기를 풀어놓던 화수연은 이번엔 질문을 했다.
“하지만 명성이 높은 만큼 대협을 찾는 이들은 많아. 대부분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일들이지만, 간혹 중요한 용건도 있지.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는 대협이 꼭 필요한 연락을 받는 방법이 뭘까?”
“……백원 의원이구나!”
여규의 대답에 화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협께선 우리를 통해 중요한 연락을 받아.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비밀이지.”
그녀의 말대로 이건 기밀이나 다름없었다.
악경은 원 황실이 기를 쓰고 쫓는 특급 범죄자였고, 그와 연루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경을 치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와 접촉하기 위한 연락책의 역할을 한다?
이게 밝혀지면 화가와 백원 의원은 몰살할 게 뻔했다.
여규는 물론이고 철중구조차 아연한 표정이 됐다.
“자, 잠깐만, 여자야!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막 누설해도 되는 거야? 우리 방금 처음 본 사이잖아? 뭘 믿고 우리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화수연은 마른 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 사람을 믿으니까. 3년 전 할아버지의 서신을 받은 순간부터, 우 소협은 화가와 백원 의원의 은인이었어. 그리고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밀고 따위를 할 사람들이 아냐. 아버지의 생각도 마찬가지시고.”
천막으로 오기 전, 화수연이 일행을 살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악경을 다그치며 등장했고, 태연하게 다가왔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일행을 살피고 있었다.
화통달의 안부를 묻고, 마른 비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
그것 역시 중요한 목적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외에도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기에 그녀는 마른 비에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대협께선 얼마 전 이곳 강소 지부에 불쑥 나타났어. 그리고 평소와 달리 길게 머무셨지. 처음엔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대협께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기다리다니? 뭘?”
“서신. 대협이 도착하고 정확히 일주일 후에 이곳으로 서신이 날아왔거든. 그리고 그건 평소 연락을 주고받던 지인들이 아니었어.”
“그럼 누가 보낸 건데?”
여규의 질문에, 화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말했다.
“발신인이 적혀 있진 않았어. 하지만 서신에는 중간에 누군가 열어봤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밀랍이 칠해져 있었지.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위에 찍힌 건… 분명 오왕의 문양이었어.”
“……오왕? 주원장을 말하는 거야? 여자야, 갑자기 그게 뭔….”
뜬금없는 연결이다.
주원장이 협검에게 비밀리에 서신을 띄울 이유가 뭐란 말인가?
철중구가 이게 뭔 소리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뜰 때, 여규가 손을 들었다.
“아니, 잠깐만. 그건 별로 이상할 게 없는데?”
여규는 일행의 시선을 받으며 찬찬히 말했다.
“오왕 님은 인재를 모으고 있어. 비아에게도 영입 제의를 했는걸? 대협께 서신을 보낸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나도 처음엔 같은 생각을 했어.”
“……처음엔?”
“응. 대협은 원과 싸우는 데 평생을 바쳤고, 오왕은 지금 강남을 평정하기 직전이잖아. 그의 다음 목표는 당연히 북벌이겠지?”
원을 무너뜨리겠다는 목적이 같은 두 남자.
주원장이 협검을 섭외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언뜻 생각하기에 협검 입장에서도 주원장과 힘을 합치는 건 나쁠 게 없어 보였다.
평생 죽을힘을 다해 싸워도 제국을 무너뜨리지 못했지만, 그건 홀로 대항했기 때문이다.
전과 달리 뒤를 받쳐줄 병력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게 분명하니까.
“오왕이 대협에게 영입 내지는 손을 연수합격을 제의했다고 치자. 그럼 대협의 표정이 밝아져야 정상 아닐까? 아직 오왕의 세력이 원을 무너뜨리기엔 모자라지만, 대협 혼자 싸울 때보다는 원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화수연은 이제 본론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고민하는 게 그 부분이야. 오왕의 서신을 받은 후부터 대협의 행동이 이상해졌다는 거.”
“그…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 같다는?”
“응. 분명히 그때부터였어. 오왕의 서신을 받은 후부터 대협이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어.”
화수연은 걱정이 돼서 견딜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분은… 우리에게 평생을 두고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베푼 분이야. 원 치하에서 고통받는 한족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기도 하고. 그분의 존재 자체가 한의 꺾이지 않는 정신을 상징한다고.”
화수연은 간절한 눈빛으로 마른 비 일행을 바라봤다.
“아버지나 내가 아무리 여쭈어도 대협께선 아무 일 없다고만 하셔. 하지만 난 꼭 알아야겠어. 너희, 얼마 전까지 오왕의 진영에 있었다면서? 짐작 가는 게 있다면 말해줘. 그리고 가능하다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아봐 줄 수 있을까?”
* * *
“어떻소? 감각이 느껴지시오?”
구파일방 장문인에 대한 예우인 걸까?
화통달은 적당히 말을 높이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등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엎드린 채 발목에 힘을 주던 중년 사내가 탄성을 질렀다.
“오… 오오! 우, 움직인다! 이럴 수가…! 대단하오! 정말 대단하시오, 노사!”
완전히 끊어져 버렸던 근맥.
수년 간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었던 공지량이다.
침상에 누워서 가져다주는 식사나 먹으며 연명해야 했던 그가 오랜만에 환희에 찬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군. 조금만 더 늦었다면 손 쓸 수 없었을 것이오. 밀림을 뒤져서 날 찾아낸 수하들에게 감사하시오, 장문인.”
“당연한 말씀을! 그들과 노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소! 남은 인생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 순간을 기억하며 살아가겠소이다!”
가슴이 벅찼는지 공지량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화통달은 감격에 찬 그의 말을 들으면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꼭 그래야 할 것이오. 부디 이번 일을 계기로 다른 삶을 살길 바라겠소.”
경고? 조언? 아니면 진심 어린 기원일까?
듣기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말이었다.
화통달은 공지량의 발목을 꼼꼼히 살피며 말했다.
“잘린 근맥은 붙여놓았지만, 걸으려면 적잖은 시일이 필요할 것이오. 건네준 영약과 약초를 모두 써서 부서진 단전도 어찌어찌 복구해 놓았소. 하지만 이전의 경지를 되찾는 건 불가능할 것이외다. 천운이 따른다면 기껏해야 육 할 정도를 회복할 수 있겠지.”
“그거면 충분하오. 아니,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소.”
화통달은 환히 웃는 공지량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노파심이었나.’
악인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일생을 통해 얻은 뼈저린 경험들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기가 있으면 극적인 변화를 겪는 것 또한 사람이다.
화통달은 공지량이 달라졌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렇지 않으면 겨우 고친 환자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할 테니까.’
“허허. 잘 부탁드리오, 노사.”
화통달은 볼 수 없었다.
엎드리며 고개를 숙인 공지량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