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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50화 (250/463)

250화

* * *

화수연과 이야기를 마친 일행은 천막에서 나왔다.

여규가 점창으로 띄울 서신을 작성하는 동안, 마른 비는 화수연에게 들은 이야기를 곰곰이 곱씹었고, 철중구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앉아 있었다.

여규가 서신을 완성하자마자 마른 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규야. 아까 그 이야기, 어떻게 생각해?”

주원장의 서신을 받은 악경.

그 후 삶을 정리하는 듯한 그의 태도.

마른 비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으나 정보가 없으니 추측할 도리가 없었다.

그건 중원의 상황에 해박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규도 마찬가지였다.

“모르겠어. 오왕 님이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긴 한데… 정보가 너무 없어.”

추측 가능한 것이라고 해봐야 주원장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고, 거기에 악경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악경은 그걸 거절할 생각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막연한 추측에 지나지 않지만, 여규는 왠지 이 일에 사영도 연루되었을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비아야.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영 그 사람도 떠날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

“……사영이? 그랬나?”

다시 만나자는 약속 때문에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기억을 되짚은 끝에, 마른 비는 사영 역시 주원장의 제안을 수락하고 떠났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사영도 이 일에 연관된 건가? 안 되겠어. 우리끼리 백날 고민해봐야 답이 안 나와. 그냥 물어보자.”

“누구한테? 악 대협께?”

“응. 그냥 직접 물어볼래.”

마른 비는 악경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수연이에게 무슨 말을 들었나 보군.”

천막에서 떨어진 한적한 공터.

악경은 환자들의 수발드는 일을 마치고 쉬고 있었다.

그리고 마른 비가 다가오자 대뜸 그렇게 말했다.

“응. 아저씨가 걱정된대. 주원장 아저씨의 서신을 받았다면서? 무슨 일인지 말해주면 안 돼?”

악경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 눈치였다.

화수연이 마른 비 일행을 데려가는 걸 보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다짜고짜 물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악경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부족했군. 마음이 심란한 탓에 걱정을 끼친 모양이야. 화 원주와 수연이에게도 말했지만, 별일 아닐세. 그냥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뿐.”

“아저씨, 죽으러 가는 거야?”

“음?”

이토록 거침없는 화법이라니.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청년이다.

악경은 빙그레 웃었다.

“수연이가 그렇게 말하던가?”

“아니. 그 사람은 그냥 아저씨가 주변을 정리하는 것 같다고만 했어. 방금 그건 내 추측이야.”

“염려해주는데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 미안하군. 그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주어졌다고만 해두지. 그 이상 말하지 못 하는 걸 이해해주게나.”

부드러운 말투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단호했다.

이 이상 묻지 말라는.

‘대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옆에서 듣던 여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사영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뭘 꾸미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원장은 자신의 계획에 악경과 사영을 끌어들인 게 분명했다.

‘악 대협과 사영? 왜 그 둘이지? 두 사람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한족의 영웅과 마교의 살수.

비교할 자를 찾기 힘들 정도로 출중하다는 공통점은 있으나, 그것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그 두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악 대협의 특징이라면….’

중원 최강을 논하는 무력.

평생을 원에 대항해 온 상징성.

협검이란 남자가 지닌 가치다.

‘그렇다면 사영은?’

그림자를 부리는 초능.

십좌급의 무인이라도 지척에 이르기 전까진 발견하기 어려운 은신술.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살법.

그리고… 마교라는 배경?

‘아악! 모르겠어!’

여규가 머리를 쥐어뜯을 때, 철중구가 중얼댔다.

“시벌, 하여튼 처음 볼 때부터 뭔가 구리구리했어. 뭘 꾸미는 거야, 그 인간?”

철중구의 말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는 입을 연 김에 악경에게도 물었다.

“악 대협! 다들 대협을 엄청 걱정하지 않습니까! 그냥 속 시원히 말해주면 안 됩니까?”

사실 마른 비 일행이 이러는 건 악경 입장에서 무례하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이었다.

화수연의 부탁을 받았다고는 하나, 까마득한 후배들이 몰려와서 채근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 행동임에 분명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기 때문에 더.

하지만 악경은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웃었다.

“살다 보면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지 않나. 지금 내게 그런 순간이 왔을 뿐이네.”

악경은 해가 지는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것……. 평생 믿지 않고 살아왔네만, 지금에 와선 생각이 조금 바뀌는군. 그런 게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건 이 일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 정도로.”

마른 비 일행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지난 삶을 반추한 거인은 깊은 사유가 깃든 눈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염려해줘서 고맙네. 그 마음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고. 수연이에게는 내가 잘 말할 테니 이만 돌아가 보게나.”

더없이 부드러운 축객령이었다.

말을 꺼내기 힘들게 만드는 분위기 때문에 마른 비 일행은 머뭇거리다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악경은 멀어지는 그들의 등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겠지. 평온해 보이지만 더없이 혼탁한 세상이……. 자네들의 길에 무운이 깃들길 빌겠네.”

“그랬구나…….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 고생했어.”

화수연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부탁했지만, 사실 그녀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보를 수집할 경로도 없고, 오늘 악경을 처음 본 이들이 알아낼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주원장과 인연이 닿았다는 사실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에이, 대협도 참! 주변 사람들 걱정이나 시키고, 뭐 하는 거야! 티라도 내지 말든가. 알아서 하겠지, 뭐. 천하제일의 무인을 누가 어쩌겠어!”

화수연은 괜찮은 척 애써 어조를 높였다.

그는 마른 비 일행의 어깨를 툭 치더니 어딘가로 걸어갔다.

“따라와.”

“또 어딜 끌고 가려고? 여자야, 우리 한가한 사람들 아니거든?”

철중구의 말에 화수연은 마음대로 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싫으면 말아. 근데 남자야. 안 따라오면 너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걸?”

철중구는 ‘이걸 따라가, 말아?’라는 표정으로 꾸물대다가 마른 비가 걸음을 옮기자 뭐라고 꿍얼대며 뒤를 따랐다.

“저기 들어가 앉아서 가부좌를 틀어.”

화수연이 일행을 데려간 곳은 화인걸의 천막이었다.

가뜩이나 집기가 없어서 단출했던 그곳은 그나마 자리를 차지하던 탁자마저 치워져 있어서 휑했다.

천막 안에서 탕약이라도 달인 걸까?

들어서는 순간, 탕약 특유의 텁텁한 향과 알싸한 약초 향이 버무려진 냄새가 일행을 맞았다.

특이한 건 중앙에 사람이 들어앉을 만한 구덩이 세 개가 패여 있었다는 점이다.

화수연은 마른 비 일행에게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뭐여? 저기 들어가라고? 왜? 흙으로 덮으려고? 여자, 너 생매장이 취미냐?”

철중구는 역시나 가만있지 않았고, 화수연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로 받아쳤다.

“아, 거 종알종알 정말 말 많네. 남자야, 그냥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면 안 될까? 내가 설마 은인과 은인의 동료들에게 이상한 짓 하겠니?”

“모르지. 생긴 거랑 다르게 생매장 살인마일지도.”

철중구는 쉴 새 없이 떠들면서도 제일 먼저 구덩이에 들어가 앉았다.

떠드는 말과 달리 그도 눈치챈 것이다.

화수연이 백원 의원의 의술로 무언가를 시도하려 한다는 것을.

뭘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중원 제일의 의술을 자랑하는 백원 의원의 시술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부상 때문에 몸이 뻐근했는데 잘됐네. 여자야, 상처를 봐주는 거냐?”

“생긴 대로 멍청하네.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는 거면 구덩이는 왜 파고, 가부좌가 왜 필요해?”

화수연은 철중구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탕약을 살피는 그녀에게 마른 비가 물었다.

“나도 궁금한데? 뭘 하려는 거야?”

화수연은 싱긋 웃더니 다가와서 탕약이 담긴 사발을 건넸다.

“지금부터 당신들 몸에 쌓인 탁기를 뽑아낼 거야. 당신이 왔다는 걸 들은 순간부터 준비했어. 이걸 마셔. 그리고 운기해.”

“탁기를 뽑아낸다고? 그런 게 가능해?”

여규가 깜짝 놀라며 묻자, 화수연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능하지. 간단히 설명해줄게. 인간이든 짐승이든 나이가 들면 몸속에 탁한 기운이 쌓이기 마련이야. 눈에 보이지 않는 탁기도 그렇지만, 좀 더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노폐물들이지.”

화수연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몸을 훑었다.

“우리의 몸은 날숨, 오줌, 땀, 대변 따위로 더러운 것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하지만 그걸로는 한계가 있어. 나가지 못한 채 몸에 쌓이는 것들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건 독소를 뿜어내지. 나이가 들수록 노폐물의 양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고, 기력이 쇠하고 노화가 진행되는 속도는 점차 빨라지는 거야.”

화수연은 손가락으로 탕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반적인 탕약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그건 우리 화가 의술의 결정체야. 신체에 쌓인 노폐물은 물론이고 무형의 탁기까지 몰아내 주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내가 머리를 맞대고 고안한 방법이니까 부작용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앞으로 매년 백원 의원을 찾아야겠군. 여자야, 앞으로 네 말이라면 넙죽 따를 테니 잘 부탁한다.”

화수연은 웃기지 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남자야, 제발 어깨 위에 달린 거 좀 사용하면서 살면 안 될까? 장식이니, 그거? 이게 뭐 마음 내키면 뚝딱 만들 수 있는 건 줄 알아?”

“어… 설마 비싼 거냐?”

“그 탕약 세 그릇에 담긴 게 백원 의원 전체가 일 년 동안 사용하는 약재 가격의 절반에 가까워. 중요한 건 특수한 약초들이 들어가 있어서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다는 거지.”

철중구는 한 손으로 대충 잡고 있던 사발을 두 손으로 조심히 받들었다.

“시벌, 갑자기 부담스러워지는데? 사발이 존나 무거워진 느낌이야. 근데 그렇게 귀한 걸 왜 우리한테?”

화수연의 눈길이 마른 비를 향했다.

“우 소협이 마음에 들어서? 잘 보이기 위한 선물이라고 해둘까?”

철중구는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저 여자가 사발로 머리라도 맞았나….”

화수연은 농담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고마워서 그래.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해준 거부터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한 것까지 전부. 원래는 우 소협에게 주기 위해 준비한 건데, 너희는 빼고 우 소협에게만 주긴 그렇더라고. 우 소협에게 줄 양을 줄여서 분배한 거니까 그에게 고마워해.”

화수연은 품에서 침통을 꺼내며 말했다.

“침술을 병행할 거야. 탕약을 마시고 각자의 방식대로 운기해. 아버지도 환자를 보는 게 끝나면 이리로 오실 거야.”

“음… 비아는 몰라도 우린 한 게 없는데…. 이런 엄청난 걸 덥석 받아도 되나? 괜히 미안해지는걸.”

여규가 부담스러운 얼굴로 중얼대자 화수연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지 않아도 돼. 우 소협의 일행이란 것만으로도 너흰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어. 우리 입장에서도 너희처럼 출중한 무인들에게 주는 건 아깝지 않아. 이건 너희에게 날개를 달아줄 테니까.”

잠시 시간차를 둔 화수연이 덧붙였다.

“정 부담스러우면 기억해 뒀다가 기회가 생기면 갚아. 혹시 알아? 너희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

“꼭 그러마. 까부작 대는 놈들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장사의 쾌남이자 사파의 호랑이인 이 몸께서 사발로 머리를 찍어줄 테니까.”

화수연은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여규와 철중구는 은혜를 가벼이 여기는 사내들이 아니었다.

마른 비 일행은 그녀의 말을 가슴에 담았고, 그것은 훗날 백원 의원을 둘러싼 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약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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