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51화 (251/463)

251화

“후우욱…….”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열기가 올라오고, 몸이 뜨겁다.

고열에 시달리는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등판에 꽂힌 수십 개의 침이 신체 내부의 기혈을 건들며 무언가를 뽑아 올리는 느낌이었다.

철중구는 운기조식 중에 잡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몸이 이상해. 뜨겁고, 근질근질하고……. 그 여자가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이제는 몸이 후끈거리다 못해 활활 타올랐다.

철중구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야! 뭐 하는 거야?! 남자야,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피피핏―

등판에 몇 개의 침이 더 꼽혔다.

날카롭고 차가운 쇠붙이가 살을 파고드는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모발보다도 가는 세침이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육체의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져 있었다.

‘빌어먹을! 이 여자, 나한테 뭘 먹인 거야? 몸에 좋은 거라더니, 개뿔이!’

등판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시원하고 보드라운 촉감.

더 만져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부드럽네. 손길이 부드러워.’

“이 멍청한 새끼야! 정신 차리라고! 무슨 잡생각을 하는 거야? 내공을 증진시키는 것도 아니고, 고작 탁기 빼내다가 주화입마 걸려서 뒈지고 싶어?!”

화수연이 버럭 소리치며 손을 바삐 놀렸다.

진기를 이용한 도인이 아니다.

침술로 어긋난 기혈을 바로잡고, 역류하려는 진기를 통제한다.

그녀의 손이 스치고, 침이 꼽힐 때마다 달아올랐던 철중구의 몸이 서서히 정상 체온을 찾아갔다.

‘무거워. 내 몸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나?’

기분 나쁘고 역한 무언가가 온몸에 꽉 들어찬 느낌이다.

철중구는 화수연이 인도하는 경로를 따라 진기를 순환시켰다.

적사자기가 통로에 들어찬 이물질들을 밀어낸다고 느낀 순간!

푸스스스―

갑자기 기분이 상쾌해졌다.

주렁주렁 매달았던 추를 전부 끊어낸 것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후우욱…!”

운기조식을 마친 철중구는 눈을 번쩍 떴다.

“…….”

천막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시다.

몇 날 며칠 밤을 샌 뒤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것처럼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철중구는 허파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몸이 이렇게 가뿐한 건 처음이야. 공중 부양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철중구는 화수연이 준 탕약 덕분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고, 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이, 여자! 고맙…!”

뭐지? 이상한 광경이다.

화수연은 물론이고 여규와 마른 비까지 징그러운 무언가를 피하듯 천막 끝에 바짝 붙었다.

그들은 가까이하기 싫은 벌레를 본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었다.

“뭐냐, 니들? 왜 그런 표정으로…?”

그 순간, 철중구의 콧속으로 오묘한 냄새가 침투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악취가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았다.

“이, 이게 무슨 냄새… 우, 우웩!”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철중구는 텅 빈 위장을 쏟아낼 기세로 토악질을 했다.

“으으… 뭐냐, 이 냄새! 대체 어디서…!”

철중구는 보았다.

허리 높이까지 파인 구덩이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물질들이 흥건한 것을.

그리고 깨달았다.

견디기 힘든 악취를 유발하는 그것들은 자신의 몸속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는걸.

“우욱! 역겨워! 이, 이게 내 몸에서 나온 거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징그러운 벌레를 보듯 쳐다보던 화수연이 나지막이 말했다.

“더러워……. 지금까지 대여섯 명한테 시술을 했지만, 너처럼 노폐물이 많은 인간은 처음 본다. 자체적으로 불순물을 생성하는 기능이라도 있는 거 아냐?”

그 말처럼, 철중구가 들어앉았던 구덩이는 시커먼 액체로 뒤덮여 있었다.

몸 어디에서 이런 게 나온 건지 의아할 만큼 많은 양이었다.

“크흠…. 독하긴 독하군.”

그나마 제자리를 지킨 건 화인걸뿐이었다.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그는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더러워. 인간 오폐수 덩어리.”

화수연의 조롱에 철중구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수연아!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당장 사과드려라!”

화통달을 빼닮은 화수연과 달리 화인걸은 진중하고 정중한 성격이었다.

예의를 중시하는 점도 그들과 달랐다.

화인걸이 엄한 표정을 짓자 화수연은 마지못해 사과했다.

“……미안.”

화인걸은 엄격한 눈으로 화수연을 쏘아본 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올라와 앉으십시오.”

철중구는 끈적끈적해진 상의를 벗은 후 구덩이 위로 올라왔다.

화인걸은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철중구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수연이의 처치 덕분에 위험한 상황은 넘겼습니다. 시술이 잘 마무리되었군요. 몸은 어떻습니까?”

“좋아! 아주 그냥 날아갈 것 같아! 고마워! 아니, 고맙… 습니다.”

화인걸은 빙긋 웃더니 마른 비와 여규를 보며 말했다.

“철 소협은 다른 두 분과 달리 내공의 조율이 원만치 못하더군요. 그래서 이토록 많은 불순물이 쌓인 겁니다.”

철중구는 눈을 돌려 마른 비와 여규가 있던 구덩이를 살폈다.

두 사람도 노폐물을 배출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자신에 비해 그 양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

마른 비는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만큼 검은 얼룩이 군데군데 묻은 정도였고, 여규는 물을 흘린 것처럼 앉은 자리 주변이 물들어 있었다.

자신처럼 구덩이가 새카맣게 보일 만큼 많은 양을 배출한 사람은 없었다.

“심법을 수련하며 시행착오를 많이 겪으셨지요?”

과연 최고라고 칭송받는 명의의 아들은 달랐다.

화인걸은 시술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철중구가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을 파악했다.

어린 시절 적사자기를 스치듯 배운 이후, 여태껏 홀로 익혀왔다.

마른 비와 여규를 너른 하늘이나 여휘가 다듬어준 데 반해 누구에게도 조언을 얻을 수 없었던 철중구는 내공의 정순함에 있어 문제가 많았다.

“그럼에도 이 정도 경지에 오른 건 재능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심법에 좀 더 치중하면 새로운 경지가 열릴 겁니다. 마침 기를 다루는 데 있어 화가 만한 곳은 찾기 힘들지요.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기연의 중첩이었다.

철중구는 감격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화인걸에게 고개를 숙였고, 곧 마른 비에게 외쳤다.

“야, 비아야! 나 지금 누구랑 붙어도 이길 수 있을 거 같거든? 한판 붙자!”

“…….”

철중구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얼굴에 시퍼런 멍이 든 그는 의기소침해 있었고, 화수연은 킥킥대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게 왜 우 소협한테 덤벼. 척 보면 모르냐? 우 소협은 너보다 훨씬 강해.”

“몸이 가볍더라고. 이길 수 있을 줄 알았지.”

연이은 패배는 철중구 같은 인간에게도 좌절감을 안겨준 모양이다.

화수연은 그의 몸에 침을 놓고 부상을 치료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실망하지 마. 이번 시술의 가장 큰 수혜자는 너야. 우 소협이나 여 소협도 효과를 봤지만, 그 둘은 믿기지 않을 만큼 몸이 깨끗하더라.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도 인간인 이상 노폐물이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는데, 우 소협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런 경우는 나도 처음 봐.”

“더러운 것들을 많이 뽑아낸 내가 가장 큰 효과를 봤다?”

“응. 싸움이야 나보다 네가 훨씬 잘하지만, 내공의 운용이 미흡하더라. 기를 다루는 요령을 알려줄게. 심법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거야.”

화수연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철중구의 부상을 치료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철중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야, 너….”

“됐어. 말하지 마. 한번만 더 침 삼키면 침으로 인중을 뚫어버릴 거야.”

“아니, 얘기라도 좀….”

“분명히 말하는데, 넌 내 취향 아냐.”

“그, 그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원천 차단당한 철중구는 완전히 풀이 죽었다.

마른 비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식사를 나르고 있었다.

여규는 응급 처치하는 요령을 배우겠다며 화인걸을 쫓아다니고 있었고, 철중구는 느릿느릿 움직이며 환자들의 빨래를 수거했다.

악경의 영향일까?

아픈 이들을 보니 그냥 갈 수 없어서?

아니면 시술을 베푼 화수연에게 고마워서?

누구도 이렇게 하자고 하지 않았지만, 일행은 자연스럽게 백원 의원에 머물며 일손을 돕고 있었다.

화통달을 찾는 서신을 띄웠고, 전투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했으며, 철중구는 기를 다루는 요령도 배웠다.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음에도 일행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고마우이.”

마른 비에게 식사를 받은 노파가 환히 웃었다.

강소성의 북쪽, 숙천(宿遷)에서부터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그녀는 오른쪽 어깨부터 팔목까지의 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바람에 팔을 잘라야 했다.

도주하는 한림아를 쫓아 남하한 몽골 병사들에게 약탈당한 그녀는 가족을 모두 잃고, 말발굽에 짓밟힌 채 간신히 살아남았다.

끔찍한 고통에 연신 정신을 놓으면서도 지인들에게 힘입어 여기까지 온 노파는 의원들의 손길 아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할머니. 이제 어떡하려고? 막막하지 않아?”

사연을 들은 마른 비는 본인의 일처럼 힘들어했다.

그의 물음에 노파는 웃으며 답했다.

“막막하지. 막막하고말고. 의지할 곳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캄캄해.”

몸이 완쾌되고 의원을 나서는 순간 혹독한 현실이 펼쳐질 거다.

긴 세월을 거쳐 삶의 막바지에 이른 노파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어쩌겠니? 숨이 붙어 있는 이상 어떻게든 살아가야지. 삶이란 그런 게야.”

깊은 사유도, 삶을 관통하는 깨달음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건 단순한 체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한마디는 이상하게도 마른 비의 가슴을 절절히 흔들었다.

모두가 노파 같진 않았다.

환자의 대부분은 고통에 힘겨워했고,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절망했으며, 희망이 없는 미래를 저주했다.

그들은 휩쓸린 자들이었다.

운명을 개척할 힘도, 배경도 없는 이들이었으며, 힘을 지닌 포식자들에게 치여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자들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군림자의 길을 걷고, 누군가는 시대에 이름을 남기길 바라며 무에 몰두한다.

자신은 어떤가?

부족을 나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원을 떠돌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감에도 이처럼 다른 인생이 펼쳐지나니.

마른 비는 자신이 무척이나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할머니…. 존경스럽네. 정말 대단해.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

“떽! 어른을 놀리는 게냐? 아무것도 못 하고 모든 걸 잃은 무력한 늙은이한테 존경은 무슨….”

노파는 혀를 차며 마른 비를 타박했다.

그녀는 하나 남은 손으로 마른 비의 손을 붙잡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덕분에 편히 잘 지내네. 고마우이.”

그녀는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마른 비는 노파가 잡았던 손을 포갠 채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여운이 남아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그에게 화수연이 다가왔다.

“여기 있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지?”

마른 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그래.”

“무림인들은… 우리가 주로 마주치는 이들은 특수한 사람들이야.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가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또 다른 곳이지.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고. 절대 다수의 백성들에게는 하루를 견디는 것도 쉽지 않아. 지금처럼 전란이 벌어지는 시대에는 더욱더.”

운남을 나온 지 일 년하고도 수개월.

사천, 귀주를 지나 호남, 호북을 건너 강소성까지 도달했다.

장사에서 배로 이동한 탓에 시간을 단축했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거쳐 온 곳은 일반인이 평생을 살아도 돌아보지 못할 거리였다.

제법 많은 걸 경험했다고 여겼지만, 지금껏 자신이 본 건 세상 안의 세상,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사회의 일부일 뿐이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제야 조금 눈이 트인 기분이랄까?”

백원 의원에서 목격한 민초들의 삶은 마른 비의 세계를 확장시켜 주었다.

운남은 물론이고 중원에 나와서도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삶.

스무 살을 앞둔 청년의 사유가 깊어지고 있었다.

“음…. 뭔지 알 것 같아. 나도 세가에서 처음 나왔을 때 그랬거든. 그래서 말인데, 너 급한 일이 없다면 좀 더 여기에 머물….”

고개를 끄덕이던 화수연이 머뭇거리며 입술을 뗄 때였다.

의생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외쳤다.

“수연아! 대, 대협! 악 대협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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