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왜요? 무슨 일이길래? 대협이 뭐…?”
화수연이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의생의 얼굴에선 다급함과 걱정이 묻어났다.
“대협께서 떠나셨다! 아무런 말도 없이 말이야!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지 않느냐! 문제는 서신이야! 서신을 남기셨는데…!”
마른 비와 화수연은 의생을 따라 뛰었다.
악경이 머물던 천막에 당도하자 서신을 읽고 있는 화인걸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읽어 보거라.”
화수연은 낚아채듯 서신을 받아서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서신에 쓰인 문체는 평소 악경의 어조처럼 담담했는데, 문제는 내용이었다.
악경은 자신이 떠난 후에 백원 의원에 닥칠지 모를 위협을 염려하고 있었다.
전의라는 희소한 전력을 탐내는 자들이 백원 의원을 건드리지 못했던 이유는 자체적인 무력과 명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돕는 우호적인 세력에 기인한 바가 컸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두말할 것도 없이 악경이었다.
백원 의원을 집어삼킬 힘이 있는 세력은 백원 의원과 악경이 긴밀한 관계임을 알아챌 정보력이 있었고, 그 정도도 모르는 자들은 악경 없이도 자체적으로 처리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악경은 자신이 없는 상황에서 백원 의원에 드리울 먹구름을 경계했고, 그 말은 곧 그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는 말과 같았다.
서신의 말미에는 화가 사람들의 안위를 비는 내용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 이건….”
서신을 다 읽은 화수연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유서잖아!”
악경은 끝까지 어떤 일인지 말해주지 않고 떠났다.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몰라도 화수연은 그가 야속했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악경은 그녀에게 존경의 대상이자 친한 삼촌 같은 존재였고, 실제로 그녀만큼 악경을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써 눌러왔던 염려와 불안, 서운함이 한꺼번에 터졌다.
화수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우리를 왜 걱정해! 죽으러 갈 것처럼 써놓은 사람이 왜 우릴 걱정하냐고! 본인 일이나 신경 쓸 것이지!”
화수연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울었다.
“수연이가 마음고생이 심했나 봅니다.”
화인걸은 엉엉 울다가 뛰쳐나간 화수연을 떠올리며 씁쓸히 웃었다.
마른 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괴의 할아버지에 이어 협검 아저씨까지……. 충분히 그럴 만해. 아저씨는 괜찮아?”
“걱정은 되지요. 두 분이 무사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허나 저는 이 와중에도 두 분의 안위보다 앞으로 백원 의원을 어떻게 건사해야 할지가 더 고민이군요. 아무래도 나이를 먹더니 마음이 닳았나 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 그럴 리 없다.
집단을 이끄는 자로서의 책임감이 더 클 뿐이겠지.
화인걸이 침묵을 지키자 마른 비가 물었다.
“괜찮겠어? 두 사람의 비호가 백원 의원의 가장 큰 방패였을 텐데.”
화인걸은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요. 아버님과 대협 덕분에 본원을 노리는 자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아저씨가 방법을 찾을 때까지 만이라도 머무를게. 돕고 싶어.”
당연히 승낙할 줄 알았던 화인걸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을 구해준 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소협의 여정을 방해할 순 없지요. 쉽지는 않겠지만… 나름 생각해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어떤 건지 물어도 돼?”
화인걸은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오왕. 오왕의 제의에 응할 겁니다.”
“오왕? 주원장 아저씨?”
또 주원장이다.
그 인간은 도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친 것인가.
눈치로 보아하니 백원 의원이 자신을 돕기를 종용한 모양이었고,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건 뻔했다.
“아버님도, 저도, 수연이도 무림이나 관을 싫어하지요. 본원을 찾는 환자들의 상당수가 그들의 사정에 휘말린 거니까요. 가능하면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선택의 순간이 온 것 같군요.”
“북벌에 참가하려고?”
“네. 자파의 이익에 혈안이 된 무림 문파들보다는 그게 훨씬 나을 겁니다. 전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다치는 이들이 줄어들기도 하겠고. 여러모로 오왕의 제안에 응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입니다.”
마른 비가 생각하기에도 나쁘지 않은 방안이었다.
의원을 지킨다는 목적뿐만 아니라 대의에도 부합하는 방법이며, 최소한 주원장의 일을 돕는 동안에는 감히 수작을 부릴 세력 따윈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일 때, 화인걸이 물었다.
“슬슬 떠나실 생각이었지요?”
속마음을 들킨 마른 비는 움찔했고, 화인걸은 웃었다.
“소협을 처음 보았을 때, 바람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흐르는. 바람이란 끝없이 흘러야 하는 법이지요. 수연이한테는 제가 말할 테니 조용히 떠나세요. 지금은 그게 나을 것 같군요.”
마른 비는 화인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소중한 인연이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을 남긴 채 돌아섰다.
마른 비를 다시 멈춰 세운 건 화인걸이었다.
“아, 소협. 이걸 말한다는 걸 깜빡했군요. 최근에 들어오는 환자들 중에 짐승의 발톱이나 이빨에 해를 입은 자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흉흉한 소문도 돌더군요. 소협 같은 분께 위협이 되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세요.”
짐승에게 입은 상처?
산짐승들이 마을에 내려오기라도 한 건가?
마른 비는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는 고맙다는 말과 작별 인사를 남긴 채 천막을 나왔다.
“떠나기 전에 잠깐 들르자.”
백원 의원을 나온 마른 비는 산을 내려와서 일행을 고우의 시가지로 이끌었다.
그리고 지금은 만금당 고우 지부의 창구 앞에 서 있었다.
“이러면 되겠어?”
여규가 전표를 내밀며 묻자,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부 다 해줘.”
운남을 나오기 전 금복인에게 받은 돈부터 당가와 주원장에게 받은 사례비까지, 마른 비는 그간 상당한 금액을 만금당에 맡겨 놓았다.
지금 그 돈을 찾았고,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만 남긴 뒤 전액을 백원 의원에 기부해버렸다.
“오? 꽤 많네? 비아 너, 땡전 한 푼 없게 생겼으면서 알부자였구나?”
전표를 본 철중구는 놀라워했다.
그러더니 여규가 수속을 마치자 자신도 창구 앞에 섰다.
“철중구다. 그간의 거래는 전부 장사 지부에서 했어. 이만큼만 찾을게.”
여규는 철중구가 전표에 기입한 금액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억?! 뭐, 뭐야? 너 이렇게 큰돈이 있었어?”
철중구는 피식 웃었다.
“내가 인마, 장사의 뒷골목을 평정한 남자 아니냐. 이 정도는 기본 아니겠어?”
철중구가 전표에 기입한 금액은 장사 한복판에 고래등 같은 저택을 두 채는 지을 돈이었다.
그는 그 돈을 백원 의원에 미련 없이 쾌척했다.
“와… 중구 너 통 크네?”
“그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은혜를 입었다. 시술을 받고 기를 다루는 법을 배운 후에 무공 경지가 상승한 게 체감될 정도야. 고작 이 정도가 대수겠냐. 열심히 번 돈이 좋은 일에 쓰일 테니 기분도 좋다.”
철중구는 호쾌한 성격만큼이나 손도 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괜히 주눅이 든 건 여규였다.
“나도 많이 내고 싶은데… 나, 나는 그 정도의 돈이….”
재밌게도 셋 중 주머니가 가장 가벼운 건 여규였다.
사문으로부터 중원행을 하기에 충분한 경비를 받았으나, 마른 비와 철중구가 내놓은 금액이 너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할 수 있는 만큼만. 금액이 뭐가 중요하겠냐. 마음이 중요한 거지.”
웬일로 옳은 말을 하나 했는데, 역시 그냥 지나갈 철중구가 아니었다.
“헹! 점창, 뭐 별거 없구만?”
울컥한 여규는 마른 비처럼 최소한의 경비만 남긴 채 전액을 기부해버렸다.
철중구의 비아냥거림은 그칠 줄을 몰랐고, 둘은 티격태격하며 만금당의 지부를 나섰다.
웃겨 죽겠다며 배꼽을 잡는 마른 비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젊은 소협들께서 만금당의 지부를 이용하다니, 주머니가 빵빵한가 보구려. 불쌍한 거지가 끼니를 때울 수 있게 전낭을 좀 열어주시면 어떨까?”
마흔 전후로 보이는 거지였다.
거지들이 구걸을 하는 건 천하 각지에 산재한 상가의 지부마다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지만, 마른 비 일행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내의 허리춤에 매달린 매듭을 보았기 때문이다.
중원에 빌어먹고 사는 거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저런 종류의 매듭을 달고 다니는 건 딱 한 부류뿐이다.
여규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정중히 포권했다.
“개방(丐幇)의 일원이시군요. 무림말학 여규가 인사드립니다.”
중년의 걸개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최근 신기한 조합의 일행이 강남 바닥을 휘젓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내가 운이 좋은가 보오. 구걸을 나왔다가 명성 자자한 신성들을 보게 될 줄이야. 그래, 점창의 제자시라고?”
여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자신은 사문을 밝히지 않았고, 점창의 무복을 입고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알고 있다는 것.
이미 신상 파악을 끝내고 일부러 앞에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어디 보자…. 이쪽이 최근 사호에 등극했다는 철 소협이신가? 여 장로의 아들씩이나 되는 분이 사파의 신성과 함께 다닌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면 오해하기 십상이겠구려.”
격식 따위 배제한 채 곧바로 치고 들어온다.
구파일방의 인물을 만나 반가웠던 마음은 싹 사라져버렸다.
여규는 불쾌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답했다.
“여행 중에 인연을 맺은 소중한 동료입니다. 중구의 행적을 더듬으면 아시겠지만 그는….”
“더 큰 문제는 이쪽이지.”
걸개는 여규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마른 비에게 시선을 옮긴 그가 눈을 번쩍였다.
“출신을 알 수 없는 이족의 사내. 운남에서부터 동행했다고 알고 있소만…. 소문에 의하면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하다고 하더군. 비마를 쓰러뜨렸다고도 하고… 사실이오?”
마른 비는 걸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호오… 신기한 일이구려. 소협은 마교의 인사들과 교류를 주고받는다던데… 마교의 핵심 전력이나 다름없는 칠대 장로의 일인과 싸웠고, 심지어 죽였다? 확실하오?”
질문처럼 보이지만, 명백한 추궁이었다.
사영과 별비 말고는 마른 비가 비마를 쓰러뜨리는 걸 본 사람이 없었고, 마른 비에게 전해 들은 철중구가 병사들 앞에서 외쳤을 뿐이다.
걸개는 그 진실 여부를 의심하는 게 틀림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안에 마른 비가 마교의 주구일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뭐여, 지금 비아가 헛소문을 퍼뜨렸다고 의심하는 거야? 왜? 뭐 하러? 설마 비아가 마교의 인물이고 중원에 침투하기 위해 농간을 부리는 거다, 그런 의심을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딴 개소리를 늘어놓으려고 여기 나타난 거냐?”
철중구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따졌지만, 그건 걸개가 파고들 빌미를 제공할 뿐이었다.
“허허. 누가 사파의 인물 아니랄까 봐 입이 험하구려. 그리고 너무 간 것 아니오? 난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그저 물었을 뿐. 스스로 그런 말을 꺼낸다는 건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
“뭐야? 남의 돈이나 빌어먹고 사는 새끼가 어디서 말장난을 해?”
산뜻하게 기부하고 나왔는데 난데없이 튀어나온 거지 때문에 기분을 잡쳤다.
철중구는 개방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기세였다.
“중구! 잠깐만!”
여규가 앞으로 나서며 격앙되는 분위기를 수습하려 할 때였다.
마른 비가 손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뭐가 궁금한 거야? 내가 마교의 인물인지 아닌지? 그걸 묻고 싶은 거야?”
“허어, 난 그런 말을 꺼낸 적 없대도. 소협이 먼저 말을 꺼냈으니 묻겠소. 최근 마교의 타격대가 중원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그게….”
마른 비는 걸개의 말을 듣지 않고 잘랐다.
“그들과 인연은 맺었지만, 난 마교 소속이 아니야.”
“그걸 입증할 방법이 있소? 야투에서부터 벌어진 소란의 중심부에는 항상 소협이 있더군. 마교의 인물이 아니란 걸 증명하지 못하면….”
더 들어주기 힘들다.
마른 비는 더 이상 대화를 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걸 왜 내가 증명해야 하지?”
“당연한 일이오. 마교와 연관이 있다는 건 심대한….”
“그건 당신한테나 중요한 일이겠지. 입증은 명백한 혐의가 있는 사람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하는 거야. 난 잘못한 것도 없고,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어. 사실 여부는 당신이 알아봐.”
마른 비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걸개를 노려봤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눈빛.
뭐라 더 말하려던 거지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일로 귀찮게 하면 참지 않을 거야.”
마른 비는 그 말을 남긴 채 뒤돌아섰다.
“허… 비아 저놈은 평소엔 멍청한데, 이럴 때는 말을 잘하더라?”
철중구가 걸개를 쏘아본 뒤 뒤를 따랐고,
“점창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비아는 마교의 주구가 아니에요. 이번 건 선배님의 실수입니다. 대단히 불쾌하군요.”
여규도 싸늘한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잠시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혼자 남겨진 걸개는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소문만 무성한 놈들의 행적을 겨우 잡았다. 절대 놓치지 말도록.」
그의 등 뒤, 길게 펼친 담벼락 뒤에서 소리 없는 움직임이 일었다.